동양철학-7. 주자학과 양명학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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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學과 陽明學의 槪觀
[槪觀]
性理學은 朱熹가 集大成하였고, 陽明學은 王守仁이 만들었다. 朱子學은 송나라가 양쯔강 북쪽을 금나라에 빼앗긴 상황에서 일어난 유학 부흥운동이 기반이었고, 양명학은 농민봉기와 함께 남쪽 해안지방에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맹아가 나타나던 시기에, 진헌장과 담약수가 마음을 강조하는 학풍을 일으키면서 시작 되었다.
朱子學의 명제는 ‘性卽理’이다. 주희는 만물에 이기가 다 있지만 시간적, 논리적, 가치론적으로 이가 먼저라고 한다. 또한 만물의 이치가 달라도 그 이치를 있게 한 궁극의 이는 하나라고 한다. 사람도 기질이 다르지만 본 모습인 본연지성은 같다고 한다.
하지만 陽明學의 명제는 ‘心卽理’이다. 내 마음에 들어 있는 이치가 부모에게 펼쳐지면 孝가 되고 나라에 펼쳐지면 忠이 되며 벗에게 펼쳐지면 信이 된다는 것이다.
朱熹는 마음(心)공부와 사물(理)공부를 나누었다. 하지만 王守仁은 마음의 본체인 良知를 구체적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致良知를 주장하였다. 주희는 또 앎과 실천이 같이 가지만 선후를 따지면 앎이 먼저라고 보았다. 그러나 왕수인은 앎이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이란 앎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知行合一을 主張하였다.
朱子學은 원나라 이후 官學이 되었고, 陽明學은 현성파와 귀적파, 수증파로 나누어 졌다. 특히 현성파는 인간 주체를 강조하면서 명대 서민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두 사상의 관계를 계승이라고 보기도 하고, 극복이라고 보기도 한다. 근대 이후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몰락하였지만 오늘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다.
1. 北宋 朱子學의 登場
性理學은 ‘새로운 내용의 유학 (新儒學, Neo-Confucianism)'으로서 南宋(1127~1279)의 朱熹(1130~1200)가 집대성한 학문이다. 송나라에서 나온 학문이란 뜻에서 宋學이라고도 부르고, 朱子가 완성자라는 뜻에서 朱子學이라고도 하며, 주희에게 많은 영향을 준 정이와 주희의 성을 따서 程朱學이라고도 부르고, 유가의 도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道學이라고도 한다. 외적인 성립 배경은 송나라가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이었고, 내적 배경은 北宋(960~1127) 중기 이후부터 시작된 儒學 復興運動 이었다.
먼저 외적 배경을 보자. 당나라는 지방마다 병마절도사를 두고 이들에게 행정권과 함께 군 통솔권을 맡겼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 왕실의 힘이 쇠약해 지면서 지방 절도사들의 반란이 잦았고 그 결과 당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거를 반성하면서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상대적으로 국력의 약화를 가져 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주 일대를 통일한 여진족이 중국 북부를 점령하였고 한족은 양쯔강 남쪽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 북쪽 강토를 이민족에게 빼앗긴 상황은 지식인들에게 중국이 강해져야 한다는 반성을 가져다 주었고,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신하들이 군주에게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리학이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 대안으로 자리 잡은 것이며, 그 결과 性理學의 ‘理’는 현실에서 의리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송나라에서는 과거제를 통해 유교 지식을 갖춘 독서인들이 출생과 상관 없이 상위 계층으로 올라서면서 왕권에 대한 독자성을 유지한 채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해 갔다. 그들의 학문이 바로 朱子學 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내적 배경을 보자. 한나라는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지만 말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유학이 힘을 잃었고 대신 불교와 도교가 큰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유학부흥운동은 이 같은 학문 상황에서 유학 전통에 대한 자기반성과 함께 불교와 도교 비판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비판은 문학, 역사학, 경전에 대한 해석 등의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문학에서는 고문운동이 중심이었다. 고문운동은 지나친 꾸미기 위주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현의 말이나 경전의 글처럼 알맹이가 있는 옛글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알맹이’란 현실에 도움을 주는 유교의 ‘道’였다.
역사학 방면에서는 역사가의 임무가 사실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도리에 입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역사 사실을 기록하여 늘어놓은 방식으로 씌여진 司馬遷의 <史記>를 비판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알맞은 <春秋>의 編年體 서술을 높였다. 그들에게는 역사 또한 도를 밝히는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생각을 담아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지었다.
경학 방면에서는 문자 해석 중심의 ‘訓詁學’이 아니라 경전의 참뜻을 밝히는 학문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경전에 대해 자유롭고 폭 넓은 해석을 강조하였다. 학자들은 경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기도 하였고, 문장 잘 짓고 경전 잘 외우는 사람 위주로 선발하던 과거시험을 나라 다스리는 방안을 묻는 ‘책문’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여 관철 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경전의 뜻과 성인의 도를 밝히는데 초점이 모아졌고 무엇이 성인의 도이고 도가 어떤 경로를 통해 전해 졌는지를 따지는 ‘道統論’이 제기 되었다. 도통론은 내부로는 유학의 정통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따지는 논의로 나아갔고 외부로는 다른 사상을 배척하는 異端論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비판하였다.
사실 성리학은 사상의 구조나 논리가 약했던 유교가 노장과 불교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 인식 방법 등을 들여다가 인간과 자연의 보편 법칙에 대한 새로운 이해 틀을 만든 사유체계이다. 만물이 하나라는 논리와 성리학의 주요 개념인 성, 이, 같은 개념이 모두 도가와 불교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사상의 축을 인본주의에 둠으로써 오히려 도교와 불교를 배척해 낸 것이다.
주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를 ‘北宋五子’라고 부른다. 주돈이는 性理學의 선구자로서 <太極圖說>과 <通書>를 지었다. <太極圖說>은 우주만물이 어디로부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생겨났는지를 밝히는 일종의 우주발생론이다. 그의 사상에는 老子 思想이 많이 담겨 있지만 주희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어 계승했다.
장재는 <정몽>과 <서명>을 썼고, <역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氣一元論’을 완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氣로 가득 차 있으며, 만물의 생성, 소멸을 氣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정이는 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사상의 새 지평을 연 인물이다. 理와 氣가 만물에 같이 있지만 이는 원리로서 형체 없는 形而上者이고, 기는 이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형체 있는 形而下者라고 보았다. 그는 또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와 사물을 알아가는 공부를 말하였다. 이러한 이론들이 모두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근거가 되었다.
2. 陽明學의 등장 배경
陽明學은 명나라 때 王守仁(1472~1528. 호 陽明)이 만든 학문이다. 陽明學이 나온 배경 또한 사상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사회경제적 배경을 보자. 명나라는 중기 이후 황실, 환관, 훈척 들이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지방을 다스리던 번왕 들 또한 자주 반란을 일으키면서 쇠퇴기로 접어 들었다. 1508년 즉위한 武宗은 첫 달에 장원을 7개나 만들어서 모두 300개의 장원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의 세금 부담을 늘렸고 그 결과 농민봉기가 확산 되었다. 당시 농민군의 구호는 “다시 혼돈의 하늘을 열자(重開混沌之天)” 였다. ‘혼돈의 하늘’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정해진 하늘의 이치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사회적 위기 앞에 무력한 주자학 대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라는 시대의 요구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왕수인은 하늘이 정한 이치가 인간주체와 분리되는 한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구나 명나라에서는 중기 이후 남쪽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맹아가 나타났다. 전문 수공업 도시가 생겨났고, 임금 노동자의 출현에 따른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도입 되었다. 숙련된 노동자가 임금을 보고 고용주를 선택하기도 했고, 숙련 정도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고용인이 신체적 자유를 누리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예의법도를 통해 개인을 억누르던 주자학적 전통이 개인의 요구와 맞서는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따라서 전통 도덕으로 개인 의지를 배척하면 안 된다는 반성을 불러 오면서 개인과 자아라는 근대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다음으로 사상적 배경을 보자. 주희가 살아 있을 때 핍박받던 주자학은 그가 죽고 2년이 지난 1202년 복권되었다. 그리고 원나라가 들어서 있던 1313년에는 과거제도의 부활과 함께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모범답안이 되면서 관학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주자학은 관학이 된 이후 현실과의 긴장을 상실하면서 학문의 탄력성을 상실한 채 경색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理學으로부터 心學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 같은 흐름을 이끈 사람들은 陳獻章(1428~1500), 담약수(湛若水,1466~1560)이다.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는 주희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으므로 자신들은 주희의 이론을 철저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존 주자학자 들과 달리 마음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앞 시대와 분기점을 이루었다. 진헌장은 육구연의 학문을 계승하여 靜坐를 강조하면서 마음이 바깥 사물에 끌리지 않는 자유를 얻으면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된다고 봄으로써,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누어 보던 주자학의 이원구조와 다른 생각을 끌어냈다. 그리고 담약수 또한 모든 이치가 마음에 들어와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어떠한 깨달음도 마음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陽明學이 나온다.
3. 性理學과 陽明學의 意味와 思想史的 影響
性理學은 중세 시기 동아시아 3국 모두의 普遍的 世界觀이 되어 700년 이상을 이어왔고, 陽明學 또한 인간주체와 실천을 강조하면서 近代的 思惟의 싹이 되었다. 그러나 朱子學은 명대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敎條主義的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陽明學 또한 인륜이나 사회 기강을 거부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朱子學은 특히 중세 봉건왕조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사상적 유연성이나 새로운 발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固着化하는 경향을 보였고, 陽明學 또한 개인 주체를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問題點을 드러냈다. 그래서 명말 청초에 이르면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학문 경향이 등장 한다.
그러한 경향의 처음을 연 사람은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다. 황종희는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개인적 도덕수양의 한계를 넘어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계몽사상가적 정치 이론을 전개하였다. 고염무 또한 경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세론을 찾으려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훈고학과 비슷한 고증학을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왕부지는 고대부터 내려온 氣哲學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대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서양문물의 유입과 함께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서구의 충격과 그에 대한 대응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크게는 봉건제를 유지하면서 성능이 우월한 무기를 중심으로 서구의 우월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려는 洋務派와 이를 넘어서서 정치, 경제의 개혁까지를 주장하는 變法派가 대립하였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근대 이전까지 사회를 이끄는 사상으로 기능하였으며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늘날 다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중국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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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주희] 송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양쯔강 위쪽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쫓겨나온 남송에서 태어났다. 더욱이 금나라가 여전히 남송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주희는 금나라와의 굴욕적 화친을 반대했는데, 이러한 자주의식이 그의 철학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중화문명과 정신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한 왕도정치의 실현이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주희는 젊어서 도가와 불교를 두루 공부하였고 李侗(1088~1163)을 만난뒤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50여년 동안 벼슬에 있었지만 실제 관직생활에 머문것은 몇 년 되지 않았고, 한 차례의 중앙관직도 40여일 만에 쫓겨 났다. 그러나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민강 유역에서 가르쳤으므로 그의 학문을 閩學(민학)
이라고도 부른다. 만년에는 당시 세력을 잡았던 한탁주 무리에 의해 그의 학문이 ‘거짓학문(僞學)’으로 몰렸고 심지어 주희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을 정도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1,000여명이 몰려와 추모한 것만 보아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짐작 할 수 있다.
주희는 한.당 경학과 도가, 불가 그리고 문학, 사학, 심지어 자연과학 까지 두루 관심을 가졌다. 그의 학문은 중세 동아시아의 보편적 세계관으로 기능하였다. 저술로는 북송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한 <근사록>, 사서에 해석을 붙인 <사서집주>와 <사서혹문>, 그 밖에 <주역본의>, <자치통감강목>, <역학계몽>, <주자가례> 등이 있다.
[왕수인] 여요(余姚)출신으로 越의 陽明洞에 살았기에 호를 양명이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전쟁을 좋아하였고 18세 때부터 오여필의 수제자 누일재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28세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나 37세때 당시 권세가이던 환관 劉瑾(유근)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산골마을인 龍場의 역승으로 쫓겨 갔다. 오지였던 그곳에서 마침내 ‘내 마음이 곧 만물의 이치’라는 ‘心卽理’를 깨달았다.
그는 장군으로 많은 민란을 토벌하기도 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으며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의 학문에 朱子學의 理智的인 측면과 달리 파토스적인 요소가 많은 것도 이 같은 생애와 관련이 있다. 또한 그의 사상 속에 평등을 지향하는 요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가 민란 토벌에 적극적이었던 점이 모순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글을 꾸미는 사장학에서 道家와 불교를 거쳐 성인의 학문으로 돌아왔다는 평을 받는다. 뒷날 朱子學者들은 마음을 강조한 그의 학문을 불교와 같다고 보고 禪學이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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