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34 <참회록>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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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34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일제 말 암흑기 우리 현대시의 마지막 페이지는 윤동주에 의해 쓰여졌다. 모국어도 생존권도 빼앗긴 40년대 변절자들이 속출하고 있을 때, 그의 시는 문단에도 선을 못보인 채 노트에 기록되고 있었고, 그는 일본 큐우슈우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로 옥사 했다. 당시 그는 도오지샤 대학 영문과 학생이었다.
이보다 앞서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40세로 병몰한 것은 광복 1년전 1944년 이었고, 윤동주는 불과 6개월 전이었다. 기구한 그들의 생애는 피보다 짙은 그들의 저항시가 ‘무명’에 파묻혀 있게 하였고, 해방이 된 뒤에야 각광을 받았다.
36년간의 어둠 속에서 우리의 저항시는 일제의 검열과 압수 등에 의하여 햇볕을 볼 수가 없었다. 이육사. 윤동주의 시와 심훈의 <그 날이 오면>, 한용운. 이상화. 변영로의 시편에서 귀한 정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十字架>
쫓아 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尹東柱] 1917. 12. 30 북간도 명동촌~1945. 2. 16 일본 후쿠오카[福岡].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아명은 해환(海煥).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했다. 〈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東京]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각각 2,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고, 1968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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