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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8. 대제국으로서 오스만제국의 팽창과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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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8. 대제국으로서 오스만제국의 팽창과 번영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통적 오스만 국가와 사회를 구축하고, 동서 정벌을 통해 오스만 최대의 영토를 이룩한 것은 술탄 슐레이만이었다. 유럽인들에 의해 ‘위대한 술탄’으로, 투르크인들에 의해서는 카누니(Kanuni), 즉 ‘입법자’로 불린 슐레이만의 시대(1520~1566)에 오스만 제국은 최대의 번성기를 누렸다.

술탄 슐레이만의 등극은 전대 술탄들과는 달랐다. 오스만 왕가의 전통에 따라 왕권 경쟁자들이 모두 살해된 상태에서 등극한 슐레이만은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아랍 세계의 지배는 국가재정을 배가시켜 국민들과 관료들에게 새로운 조세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오스만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술탄으로 군림했다.

슐레이만은 1521년 베오그라드를 획득하고, 1526년 헝가리를 오스만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다시 자신의 영토로 귀속시키자, 술탄은 즉시 출병하여 1529년 헝가리 영토를 탈환하고, 같은 해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여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슐레이만의 비엔나 점령은 이스탄불 본부로부터의 충분한 병력 지원이 여의치 않아 포기 되었다. 이는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안도감을 심어 줌과 동시에, 향후 비엔나가 오스만 세력의 진격으로부터 중서부 유럽을 지키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비엔나 포위는 오스만의 유럽 정책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 또한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의 위협을 충분히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두 제국 간의 교착 상태는 육상에서 해상으로 대결을 유도 하였다. 당시 오스만 해군력은 급속히 성장하여 베네치아 해군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슐레이만은 1533년, 바르바로사 하이레틴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지중해 제해권 확보에 나섰다.

바르바로사는 원래 서부 지중해에서 해적 두목으로 활약하다가 1518년에 오스만 해군에 소속되어, 중서부 지중해에서 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1529년에는 알제리를 점령하여 그곳의 지역사령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결국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가 유럽 연합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오스만의 지중해 해상권이 확립 되었다. 이어 베네치아도 에게 해의 마지막 보루였던 모리아와 달마티아를 오스만에 양도함으로써, 동지중해에서 오스만의 해상 우위가 인정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향후 30년간 지속되었다.

술탄 슐레이만은 오스만이 확보한 서아시아의 지정학적인 입지를 활용하여, 고대 교역로를 활성화 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16세기에 들어 포르투갈 해상 세력들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와의 직접 교역을 증대시킴에 따라, 인도- 서아시아 - 유럽을 잇는 종전의 교역로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걸프 해역에서 사파비조로부터 물자를 공급받는 포르투갈 해상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술탄은 1517년 수에즈에 해상기지를 설치하고, 1538년에 걸프 내해의 바스라에 해군 함대를 진주시켰다. 또, 동방교역의 패권 유지를 위해 몇 차례의 인도 해상 원정이 단행 되었다.

1538년에는 아덴을 점령하여 인도에 군대를 상륙시켰고, 1551년 경에는 피리 레이스 해군 제독이 오만의 무스카트를 정복하고 인도양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16세기 들어 오스만은 번성했던 고대 교역을 어느 정도 부활시켰으나, 포르투갈의 등장으로 가격 경쟁에서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566년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술탄 슐레이만이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도 오스만제국은 계속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밀레트 제도]

오스만 제국에 편입된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들을 종교. 문화적 자치성과 고유성을 보장해 주면서, 술탄을 정점으로 결집시켰던 제도가 밀레트이다. 즉 밀레트는 오스만제국 지배하의 피지배계층에게 허락된 종교와 민족에 따른 민족자치 공동체를 의미한다. 밀레트 내에서는 독자적인 관습법과 제도가 통용되고,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는 최고 종교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었다.

제국의 가장 중요한 4개의 밀레트는 무슬림, 그리스정교도, 아르메니아기독교도, 유대교도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각 밀레트의 수장은 무슬림들의 셰이훌 이슬람, 아르메니아 기독교 및 그리스 정교도들의 총사교장들, 유대교도들의 최고 랍비였다. 밀레트의 수장들은 전체 구성원에 대한 책임과 함께 국가에 대한 조세와 국방의 의무를 갖고 있었다. 대신에 각 밀레트는 무슬림과 관련된 송사 외에는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결혼. 이혼. 출생. 사망. 교육. 언어. 전통 등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향유했다. 또, 모든 밀레트 구성원은 개인의 능력과 계기에 따라 사회적인 출세를 할 수도 있었고, 개종하여 다른 밀레트로 이주할 수도 있었다.

[독특한 군대 예니체리 부대]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의 최정예 부대로, 오로지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는 충성과 용맹의 상징이었다. 600년간 3대륙을 지배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를 건설했던 대오스만제국을 실질적으로 반석에 끌어올린 견인차였고, 제국의 1등 공신이었다. 오스만 제국에는 영광과 자부심을 가져다 주었지만, 제국의 위협에 시달렸던 주변 유럽 국가들에게는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예니체리 군대가 오랜 기간 동안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군인 충원방식과 운영제도 덕분이었다. 바로 데브쉬르메 제도였다.

에니체리는 제국의 최초의 정규군이고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충원방식으로는 초기에는 주로 전쟁포로들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술탄 바예지트가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한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정복전쟁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이런 상황은 동시에 정복전쟁으로 충원되었던 포로군인의 공급루트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엘리트 군대 충원방식이 바로 데브쉬르메 제도였다. 즉, 제국 내의 이교도 자제, 특히 기독교 소년들을 데려다 훈련시켜 군대에 배치하는 제도 였다. 군인 숫자의 필요에 따라 3~5년에 걸쳐 한번 씩 8~20세 사이의 기독교 청소년을 모집하였다. 처음에는 오스만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발칸반도의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지에서 주로 모병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발칸 북쪽 지방까지 확대하여 세르비아나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마케도니아 등지에서도 필요한 소년들을 이스탄불로 데려왔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유럽 땅이 아닌 아나톨리아 반도에 사는 기독교 소년들에게까지 이 제도를 확대해 나갔다.

예니체리는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고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그에 따르는 군율도 엄하여 웬만한 부정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렸으며, 술탄 셀렘 때까지는 결혼조차 엄격히 금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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