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역사7.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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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7.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1)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배경
메흐메트 2세의 정치적 지상과제는 선왕들의 유업이기도 한 비잔틴을 점령하고 세계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군대인 예니체리 군대도 비잔틴 공략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다만 오스만 내부의 패권 다툼에서 세력 약화를 우려한 재상과 정통 투르크 귀족 관료들은 이 정책에 극력 반대했다. 그들은 비잔틴에 대한 공격이 교황 및 유럽국가들을 자극하여 또 다른 십자군 원정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유럽 진출을 위해, 또 비잔틴과 유럽 국가의 군사적 연계를 단절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어야 했다. 특히 동방무역의 이익을 독점한 오스만이 지중해와 유럽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필연적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종교적인 배경도 고려되어야 했다. 즉,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을 당부한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이미 아랍인에 의해 7차례나 시도되었던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다시 준비되었다. 이처럼 비잔틴 정복은 무슬림들의 영광스러운 사명감을 완수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점령 준비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러스(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고 좁은 해협)의 아시아 쪽에 이미 건설한 아나돌루 성채에 이어, 1km폭의 유럽 쪽 해안에도 루멜리 성채를 축조했다. 이로써 실크로드의 마지막 관문인 보스포러스 통행권을 장악하여 흑해로부터의 위협을 차단하고, 비잔틴에 경제적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비잔틴도 방어 준비에 나서, 성문을 수리하고 콘스탄티노플 성으로 연결되는 해로인 골든혼 양쪽 기슭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선박의 진입을 봉쇄했다. 그리고 로마 교황과 유럽 각국에 오스만에 대항할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정교와 로마의 가톨릭을 통합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정통을 주장하는 비잔틴인의 다수가 이를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정복 준비를 완료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수도인 에디르네를 출발하여 1453년 4월 5일에 콘스탄티노플 성문에 도착했다. 술탄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마흐무드 파샤를 비잔틴 황제에게 파송해 유혈 충돌 없는 항복을 요구했다. 이 항복 요구가 거절되자,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5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육해군 합동 공격으로 비잔틴의 결사 항전이 와해되고, 5월 29일 토프카프 성벽이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일시에 점령되었다.
비잔틴 성문으로 진입한 메흐메트2세는 곧바로 비잔틴 제국의 상징인 성 소피아 사원에서 이슬람식의 의식을 행함으로써, 비잔틴제국의 공식적인 멸망이 확인 되었다.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는 후일 정복자를 의미하는 “파티(Fatih)" 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대군의 전통적 군율에 따라 3일간 약탈이 허용되었다. 3일 후 모든 무질서가 종식되고, 비잔틴 시민의 생명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공표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그리스정교의 심장부인 비잔틴이 이슬람교의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서 술탄은 대대적인 도시의 복원과 정비에 착수 했다. 단순히 새로운 정복자들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토착 비잔틴인과의 공존이 가능한 국제적 성격의 제도와 조직이 완비되었다.
조세제도의 확립으로 비잔틴 장인들과 무역상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고, 밀레트(Millet) 제도를 통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개연성을 인정해 주었다. 이로써 술탄의 보호아래 비투르그인, 비무슬림 복속민들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종교의식, 언어, 관습의 보존이 완전히 허용되었다. 또, 파편된 비잔틴 건물이 복원되고, 새로운 이슬람 건축물이 신축되었다. 거리가 정비되고, 상수도 시설도 확충되었다. 특히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기능을 극대화하여 산업과 무역업이 활성화되고, 장인과 상인들을 위한 경제 법규가 마련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점령의 의의와 영향
콘스탄티노플의 점령과 이스탄불로의 개칭, 오스만 수도의 이스탄불 이전은 오스만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 역사에서도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이미 동방과 접경한 비잔틴이 수준 높은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서유럽에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이제 유럽은 오스만제국이라는 동방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대발견”이라고 불리는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진출로 오리엔트 지역을 통한 종래의 동서교역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새로운 동방 해상항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신항로 탐험은 오스만투르크족의 진출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세계에서도 제국으로 성장한 오스만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명실공히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실력자인 이집트의 맘루크조 술탄이 오스만 술탄에게 축하 사절을 파견하였고, 맘루크조 치하로 망명한 압바스조의 칼리프도 모스크에서 오스만제국 술탄의 업적을 기리게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 회복을 위한 십자군 결성이 논의되었으나, 그리스 정교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적대감과 유럽 각국의 내부 투쟁으로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했다.
비잔틴제국의 함락으로 유럽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관심과 정복은 가속도를 더해 갔다. 세르비아 문제를 일단락 지은 술탄은, 왈라치아 공국을 복속시키고, 1463년에는 보스니아를, 1476년에는 몰다비아를 편입시켰다.
3) 베네치아와 아랍 세계의 정복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오스만에 대한 유럽 십자군 결성이 본격화 되었다. 동방 무역으로 번성한 베네치아는 교역로의 새로운 주인인 오스만과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오스만제국의 에게해 이익 거점에 대한 야욕을 거두지 않자, 오스만제국은 공생에서 공략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베네치아 정벌의 성공으로 양국 사이에는 1479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술탄 파티 메흐메트 2세는 아나톨리아 주변 세력에 대한 평정에 착수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북부를 감싸고 있는 흑해 연안 도시들은 오랫동안 제노아의 식민도시로 전락하여, 동서교역의 막대한 이익이 제노아에 귀속되는 실정이었다. 이로써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공략을 통해 흑해 연안의 시노프, 트라브존 등의 교역 도시들이 하나씩 오스만제국에 복속되었다.
1514년 셀림(Selim) 1세 때는 이란의 강력한 세력인 사파비 왕조와의 일전도 불사하였다. 이란 원정의 목표는 시아 종파의 침투로부터 정통 이슬람 이념을 보호하고 이란을 오스만 영토에 병합시키는 것이었다. 유프라테스 강의 동부에 잇는 찰드란에서 사파비 주력부대와 격돌하여 그들을 패퇴시켰다.
찰드란 전투는 사파비 통치자들에게 오스만의 위력을 실감케 한 기회가 되어, 향후 사파비의 오스만에 대한 공격은 자제되었고, 이런 정책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 1516년 셀림 1세의 아랍 원정은 이슬람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압바스 왕조의 허수아비 칼리프 무타와키로부터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의미하는 칼리프직을 양도 받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칼리프직 이양과 함께 바그다드 칼리프들이 공식 행사 때 사용하였던 예언자(무함마드)의 외투와 그의 수염, 인장, 검, 활 등 성스러운 유물들이 이스탄불로 옮겨졌다.
이후 오스만 술탄들이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인 칼리프가 되어, 1923년 터키공화국이 선포되고 칼리프제가 공식으로 폐지될 때까지, 이스탄불은 이슬람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다. 종교. 문화적인 면에서는 메카나 메디나, 예루살렘 등 이슬람 성지들을 통치하고 오스만의 술탄이 칼리프가 됨으로써, 세속과 종교의 실제적인 최고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적 유입이었다. 당대 최고의 무슬림 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이스탄불로 몰려들면서 이슬람의 우수한 과학과 기술, 문화가 자연스럽게 소개 되었다. 이로써 오스만제국은 역사상 가장 번영하는 이슬람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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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였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537년, 신라 진흥왕 시기)때 건축 되었는데 크리스트교의 성전이 되었다.
이 건물 완공이후 약 1천년간 유럽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오스만제국의 무함마드2세는 이 성당을 부수지 않고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바꾸어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다.
1차대전 이후에 오스만제국이 멸망하고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무스타파 케말은
정교 분리를 추진하면서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건물면적은 가로 150m 세로100m, 돔의 폭이 33m, 돔의 높이 55m 이다.
이 건물은 그리스어로는 [성스러운 지혜의 교회]라는 뜻으로
[하기아 소피아, Haghia sophia]라 부른다.
세계사에서는 이 성당을 비잔티움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비잔티움 양식의 특징은 정사각형 벽위에 둥근 돔을 올려놓은 형태이며
내부는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성당주위의 4개의 첨탑은 오스만제국시대에 증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잔티움 양식은 이슬람 세계에 전파가 되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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