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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4. 이슬람제국의 전성기1, 우마이야왕조(66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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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4. 이슬람제국의 전성기1, 우마이야왕조(661~750)

[우마이야왕조]

우스만의 세력을 대표하는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가 시리아인, 비아랍계 무슬림, 정권 소외 계층인 남부 아랍인 들을 규합하여 알리의 칼리프 정권에 도전했다. 이러한 분란의 와중에 알리가 암살 당하자, 이슬람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이야(Umaiya)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은 이미 상당한 이탈세력이 생겨, 알리를 추종하는 정치세력 들이 앞선 칼리프들과 새 왕조의 칼리프 체제를 부인하며, 시아(Sh'ia)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 아래 결집 되었다.

새 왕조의 과제는 분열되고 약화된 이슬람제국을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역대 군주들은 종래의 이슬람 신정제를 탈피하여, 아랍부족 중심의 세습적인 신분제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한 시도의 첫 번째로 제국의 중심을 메디나에서 비잔틴제국의 동부 수도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정주화에 착수하여 수많은 요새와 건축물을 축조하였다.

우마이야시대에 영토는 더욱 넓어져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의 헤라트, 카불,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당나라와 접경하게 되었고, 710년에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모체가 된 신드 주와 인도의 뻔잡 주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서쪽으로는 비잔틴제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여, 비잔틴의 군소 속령을 차지하고 두 차례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도 했다.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복에도 관심을 기울여 베르베르족을 복속시킨 후,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스페인은 15세기 말까지 이슬람국가로 유럽에 이슬람문화가 전파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이슬람군은 여세를 몰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공략하였으나, 732년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의 군대에 저지당함으로써 유럽 중심부의 이슬람화는 달성되지 못했다.

모든 무슬림들의 평등을 강조한 초기 이슬람사회에서는 신분과 계급 갈등이 미미하였다. 유목생활을 근간으로 하는 아랍 지배자들은 정착적인 경작생활보다는 군사적 정복자로서 비무슬림들인 피정복자로부터 인두세와 토지세를 징수하는 생활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아랍의 지배계층들도 정복자가 증대되고 토지 소유가 허용되면서 점차 정착생활을 시작하였고, 개종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신분 계층이 분화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런 비아랍계 개종자들을 마왈리(Mawali) 라 하는데, 그들은 아랍 지배세력보다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아랍인보다 훨씬 열등한 대우를 받았다. 마왈리들의 불만은 곧 쿠파(Kufa,바그다드 근교)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아파들과 결탁하여 우마이야왕조의 강력한 위협 세력으로 등장 하였다. 여기에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부 아랍인들까지 가세하였다. 결국 페르시아의 호라산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하고, 아불 압바스(Abul Abbas, 750~754)에 의해 압바스 왕조가 새로운 이슬람의 옷을 걸치고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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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정해관님의 댓글

'한분'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나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라크의 분봉왕 되심을 축하 드리옵고, 막중한 사명을 맡으셔서 한편으로는 다시 없는 영광이며, 한편으로는 '님께서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우리 연배에 이슬람권의 역사나 문화는 '너무나 먼 당신'이 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시각으로 본 역사와 문화였기에 오해의 소지도 많아 불필요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고요.
특히 천일국을 이루는데 알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 제2위의 영향력있는 종교권임을 생각할때, 최소한의 상식 만이라도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서 애써보는 비전문가의 열정 쯤으로 이해하시면서 눈길이라도 주신다면, 더 바랄 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임원모임은 지나갔고 '홈위원'으로 평생 모실 계획이오니, 그 모임을 유서깊은 모악산이든 내장사에서이든 가질 수 있도록 마음 한 구석에 입력해 주시기를 부탁 올립니다.(저는 곧 '총장' 내놓고, 홈관리위 '총무'는 당분간 유지할 생각 입니다.--명렬위원장님의 후광하에--)

이판기님의 댓글

우공의 뜻 과는 상관없이 바그닷드(이락)의 국가 메시아 겸 분봉왕에 임명 받았으나 실제로 이락크를 위하여 할 일을 못 찾아 헤매이다 마침 이슬람 관련 글이 연재로 올라와서 공짜로 스크렙을 해 둡니다. 님의 수고에 빈대 붙는 송구함이 있아오나 어리버리 우공이 할 줄 아는것이 없어 눈을 감고 가져갑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우리 안의 이슬람]
‘서울 밝은 달밤에/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로구나/둘은 내 것이지만/둘은 누구의 것인고/본디 내 것이다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가(處容歌)의 주인공 처용.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아내와 동침한 역신(疫神)을 노래와 춤 한방으로 스스로 물러나게 한 ‘포스’를 가졌으니….

우리 학창 시절엔 처용이 무당일 가능성이 있다고 배웠지만 우리 딸은 아랍인이라고 배우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용은 880년경 헌강왕 때 동해 바닷가 개운포(울산항)에 홀연히 나타났다. 외지인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코란 즐겨 들은 세종대왕]
아랍인의 저술에도 우리나라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슬람 학자인 마수디는 947년 한반도에 대해 ‘신선한 공기, 맑은 물, 비옥한 농토를 가졌다’고 썼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 박해를 피해 달아난 알라위족이 한반도에 망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엔 몽골을 매개로 이슬람인과의 교류가 더욱 빈번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이들은 고려 개성에 예궁(禮宮)을 짓고 살았다. 예궁은 지금의 모스크다.

이슬람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예조가 아뢰길 회회(回回)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이질감을 느끼는바 이미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의관을 따라 차이를 없애야만 자연스럽게 혼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돼 있다. 세종은 이 말을 타당하게 여겨 ‘그리하라’고 윤허했지만 코란 강독만은 아주 즐겨 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슬람에 대한 기억 하나가 있다. 살던 동네에 모스크가 있어서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함께 중동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모스크였다. 호기심에 살짝 들어가 보았던 모스크 내부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발을 씻기 위한 수도꼭지만이 생각난다.

모스크에선 새벽 예배를 알리는 독경 소리를 확성기로 내보냈다. 달콤한 아침잠을 깨우는 괴상한 소리가 너무 싫어 베개로 귀를 막으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곤 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어떤 종교도 잠을 깨울 권리는 없다고 씩씩거렸다.

그것이 이슬람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다. 그리고 지금껏 이런 인식에서 별로 나아가질 못했다. 이슬람은 배타적이고, 여성을 차별하며, 반문명적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 당연했다. 이슬람에 대한 인식은 서유럽 사회,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이 짙은 미국이라는 안경을 통해 한 번 걸러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이슬람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슬람은 사막 한가운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주변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며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로 개종시켰다는 것은 서구에서 만들어 낸 개념”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반문명 이슬람’은 서구인 편견

탈레반 인질 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게도 이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탈레반은 알라의 가르침을 이단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인질 사건을 겪으며 탈레반을 이슬람 전체로 인식하는 태도가 더욱 심해진 것 같다. 그래선 안 된다.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될 모처럼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이슬람 인구는 14억 명으로 기독교 인구 다음으로 많다. 우리나라 에너지의 90%가 중동에서 공급된다. 중동에서도 우리 드라마 ‘대장금’에 열광하고 우리 휴대전화가 불티나게 팔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그들은 여전히 멀고 낯선 존재다.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곧 글로벌 스탠더드는 아니다. 미국조차도 이슬람을 이해하지 못해 정책 실패 등 곤경을 겪고 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화사회에서는 다른 문명, 다른 종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곧 경쟁력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동아일보 칼럼에서 전재)

정해관님의 댓글

무아위야 1세(602년~680년, 재위 661년~680년, 아랍어: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는 사라센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의 시조이다. 메카에서 출생하였다. 무함마드가 메카 성에 들어오자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1대 칼리프(이슬람교의 교주)인 아부바크르 때 시리아 원정에 공로를 세워, 후에 다마스쿠스의 지사가 되었다. 2대 칼리프가 암살된 후 칼리프가 되어 4대 알리와 대립하였다. 661년 알리가 암살되자 예루살렘에서 즉위,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그 후 이라크를 평정하여 이슬람권 최초의 세습 왕조를 세워 국정의 정비와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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