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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3. 정통 칼리프 시대와 이슬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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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3. 정통 칼리프 시대와 이슬람의 성장

이슬람 공동체의 성장은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함으로써 일시 위기에 봉착했으나, 이슬람식 합의제 선출을 통한 칼리프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약을 맞이 하였다.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정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최고 통치자로서 이슬람 공동체를 확장해 나갔다.

아부 바크르(Abu Bakr,632~634), 우마르(Umar,634~644), 우스만(usman,644~656), 알리(Ali,656~661)에 이르는 4칼리프의 통치 시기를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칼리프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대외 정복 전쟁이 시작되어, 3대륙에 걸친 광대한 이슬람 제국이 형성 되었다. 특히 우마르의 통치기에는 비잔틴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시리아를 정복하고(638), 640년에는 비잔틴의 곡창인 이집트를 점령하여 콘스탄티노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또 다른 강국 사산조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637년 카디시야 전투와 642년 네하완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페르시아제국의 멸망(651)을 초래하였다.

이로써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거의 기적 이었다. 이와 같이 단시일에 정복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이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치 못함에 따라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의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종교가 기독교보다 더욱 철저한 일신교로서 종교에 대한 긍지가 강했고, 그들이 진출한 지역에 로마교회의 삼위일체 사상에 반대하는 아리우스파나 단성론자들이 집단 거주하여, 이슬람교의 교리가 훨씬 용이하게 스며들었던 요인도 있다. 더욱이 신의 뜻을 위해 싸우는 지하드의 개념이 종교적 정열과 함께 전리품의 노획이라는 현실적 동기부여를 조장해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일찍이 서구인들은 무슬림들에 의한 단시일의 정복사업을 소위, “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무슬림의 호전성과 이슬람교의 강제 전파를 설명하였으나, 이는 그들의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교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진 용어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사실 무슬림들은 인두세나 토지세 등의 일부가 면제되었으므로 정부는 오히려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는 공납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슬람제국 내의 기독교인들과 유대교도들은 상당한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급격한 정복사업으로 영토가 광대해지면서, 부족들 간의 이견과 이해관계의 대립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2대 칼리프 우마르가 살해되고 우스만이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그는 무함마드의 이슬람에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던 우마이야 부족 출신이었으나, 그 자신은 일찍부터 무함마드의 성실한 추종자로서 이스람교의 발전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우스만의 중앙집권적 통치방식과 우마이야 부족의 대거 등용은 반대파의 불만을 증폭시켜 그도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무함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 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으나, 우스만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충돌과 갈등이 첨예화 되었다.

이때 우스만의 세력을 대표하는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가 시리아인, 비아랍계 무슬림, 정권 소외 계층인 남부 아랍인 들을 규합하여 알리의 칼리프 정권에 도전했다. 이러한 분란의 와중에 알 리가 암살 당하자, 이슬람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이야(Umaiya)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은 이미 상당한 이탈세력이 생겨, 알리를 추종하는 정치세력 들이 앞선 칼리프들과 새 왕조의 칼리프 체제를 부인하며, 시아(Sh'ia)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 아래 결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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