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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5. < 曠野>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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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5. 曠野

李陸史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였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유고시집 <陸史詩集> 1946.--

陸史는 윤동주와 함께 일제 말 2대 민족시인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이 생애와 시가 민족의 수난과 함께 있었고, 또한 희생된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을 17회나 드나들은, ‘그가 이 세상에 왔다 간 자취라도 남겨보려 하니 실로 그 발자취는 자욱자욱이 피가 고일 만큼 신산하고 불행한’ (유고시집 ‘육사시집’ 발문) 40세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의 생애이다. 그는 투사였고, 지사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사를 영원히 고발하고 잇는 시인이었다.

[결연]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백마타고 온 위대한 초인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니, 그로 하여금 내가 뿌린 노래의 씨를 거두어 웅장한 노래를 부르게 하리라(미래의 조국)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絶世의 초인적 모습, 부활한 민족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저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과 같은 늠름한 모습이요, 그러한 정신의 화신과 같은 ‘위대한 민족 시인’이다. (물론 우리들은 그의 염원대로 ‘천마를 타고 하강하신 초인중의 초인’을 이미 목도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시는 한 시대와 문화의 精華라는 점을 감안 할때, 이 시는 식민지 시대의 절박한 생존적 노래를 넘어 가장 압축된 민족의 悲歌요, 민족시가 도달한 한 精彩라고 할 것이다.

[李陸史 1904~‘44]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본관은 진보(眞寶). 본명은 원록(源祿). 자는 태경(台卿).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絶 頂

李陸史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0 <문장>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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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정해관님의 댓글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한국의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이다.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음 투옥되었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이때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으며, 나중에 이육사(李戮史), 이육사(李陸史)로 고쳤다. 또다른 필명으로 이활(李活)이 있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32년 6월 초 중국 북경에서 만국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다.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1943년 국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구금 중에 사망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이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에 의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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