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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8. <내 마음을 아실 이>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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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8. 내 마음을 아실 이

金永郞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이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은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시문학> 3호(1931. 3)

나의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주실 님을 간절히 염원한 노래. 지금은 자기 앞에 없는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 그 님을 향하여 도란도란 속삭이고 있다.

사람의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처럼 영묘한 것도 또한 없다. 실은 나도 모를 내 마음의 정체를 나와 똑 같이 알아줄 임을 그리워하는 이 노래는 매우 시적인 테마이다. 섬세하고 맑은 정서가 순화된 시정이며, 말을 주옥같이 갈고 다듬어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북도에 소월이 있고, 남도에 영랑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소월이 북도의 투박한 사투리로써 독특한 가락에 시를 담았다면, 영랑은 나긋나긋하고 감칠 맛이 있는 남도의 방언을 쓴다. 그러면서 두 시인은 시상이 곱고 아름다우며, 여성적인 섬세함으로써 무르익은 민족적 정서에 닿아 있다.

[金永郞 1903~50] 본명은 윤식. 전남 강진 출생. 휘문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학업을 중단, 일본으로 가 아오야마학원 영문과 수학. 이때 평생의 지우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으면서 괴테. 로제티. 키이츠 등을 탐독했다. ‘30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 이후 많은 서정시 발표. 해방 후에 공보처 출판국장을 잠시 지냈으며, 6.25때 서울에서 은신중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고 47세로 사망. 묘지는 망우리. 시집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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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정해관님의 댓글

김영랑(金永郞, 1903년 1월 16일 - 1950년 9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의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1년만에 사별하였다. 졸업하고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간토 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번째로 결혼하였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이후 두어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9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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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그의 작품들은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 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 속을 흐르는 조용한 저항의식이 담긴 민족주의적 시를 쓰기도 하였다. 주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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