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15. <道峰> 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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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道峰)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3인 시집 <청록집> 1946.
이 시는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 마음을 붙일 아무것도 없는 뼈저린 고독감과 한 줄기 구원을 바라는 외로운 심경을 읊었다. 그러면서 그 감미로운 서정과 애조가 감동과 공감을 짙게 확산시켜 주는 작품이다.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지은이는 그의 <시와 사랑>에서 이 시가 애착이 깊었던 것임을 밝히면서 ‘산을 찾고, 산에 숨어 살고, 그리고 안으로 울고, 그러한 심정을 얼마간 시로써 미화시키는 것으로 자위를 삼았다’하였고, ‘그리하여 도피도 장했고, 서러움을 노래하는 것도 하나의 지조였다. 최후의 모국어에 그지없는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깍고 다듬고 그 말로써 울었다’고 감회 깊은 피력을 남기고 있다.
[박두진 1916~1998] 박목월·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초기에는 자연을 읊다가 차츰 사회현실에 대한 의지를 노래했다. 호는 혜산(兮山).
1948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49년에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에 가담해 민족주의계열의 문학건설에 힘썼다. 1955년 연세대학교 전임강사가 된 뒤, 1959년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대한감리회 신학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 출강했으며,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같은 해 다시 연세대 교수로 취임해 1981년 정년퇴임했다. 그 뒤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가 1986년 추계예술학교로 옮겼다.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문장〉에 시〈향현 香峴〉·〈묘지송〉·〈낙엽송〉·〈의 蟻〉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어 〈문장〉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는데, 그를 추천한 정지용은 '삼림(森林)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만열이상(滿悅以上)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1946년 박목월·조지훈과 〈청록집 靑鹿集〉이라는 공동시집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그의 시들은 질식할 듯한 일제 말기의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자연에 친화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종교적 기다림을 노래한 것이다. 이후 〈바다로〉(백민, 1947. 2)·〈햇볕살 따실 때〉(학풍, 1949. 2)·〈산(山)아〉(민성, 1949. 5) 등을 발표하고, 1949년에 개인시집으로는 첫번째인 〈해〉를 펴냈다. 이 시들은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과 교감하면서 생기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을 부드러운 산문 형식에 담아낸 것이다.
그의 시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변하는데, 시집 〈오도午禱〉(1953)·〈거미와 성좌〉(1962)·〈인간밀림〉(1963)에 이르러 인간의 자유와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반복되는 관념적 언어로 읊었다. 그 뒤 4·19의거를 겪으면서 민족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시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사상계, 1960.6)·〈우리들의 8·15를 4·19에 살리자〉(국제신보, 1960. 8. 15)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격정을 보여준 시세계는 계속 이어져 시련을 겪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민족적 생명력을 읊은 〈아! 민족〉(현대문학, 1971. 4)과 같은 장시를 통하여 조국애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또 다른 암흑의 시기에 시인의 현실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자연과 신앙의 심미적 절대화에 머물지 않고 10월유신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격동기에 시인이 지켜야 할 자세와 비판정신을 보여주었다.
시집으로 〈박두진시선〉(1956)·〈사도행전〉(1973)·〈하늘까지 닿는소리〉(1973)·〈수석열전 水石列傳〉(1973)·〈야생대〉(1981) 등과 시선집으로〈청록집 기타〉(1968)·〈청록집 이후〉(1968)·〈에레미야의 노래〉(1981) 등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시인의 고향〉(1968)·〈언덕에 이는 바람〉(1973) 등과 시론집으로〈한국현대시론〉(1970) 등이 있다. 1982년 범조사에서 〈박두진전집〉을 펴냈다. 1956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0년 3·1문화상, 197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8년 인촌상,1989년 지용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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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님의 댓글
사진 정말 멋있어요.
사진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무척 집에 사진 많아요. 박두진 청록파 시인 다시 알았어요. 너무 너무 무식해서 큰일입니다.
형님 이 지식을 많이 가져다 줍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동생도 외대에서 강의하는 외대 강사 박남용 박사 ( 중국어과 )시인이 있어요.
시는 어떻게 쓰는 것 일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요.
천일국에이름 3자 남기고 죽을수 있을가 모르겠읍니다.
형님은 천일국의 최고 주인이십니다.
또한 1800가정의 최고의 주인이십니다.
형님은 1800가정 홈페이지의 주인이심을 이제야 알겠읍니다.
형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2009. 3. 6. 울진교회장 박구용 올림
정해관님의 댓글
송추계곡 쪽에서 오르는 도봉산은 매우 호젓하고 좋은 코스였습니다.
산을 찾으면, 세파에 시달린? 마음도 가벼워지고, 심신이 상쾌해 지는데, 위 시의 작가는 조국이 암울한 시기였기에 시어에 나타나는바와 같이, '삶은 쓸쓸하고 사랑은 괴롭다'고 읊었습니다.
역시 시대를 잘 만나야함을 실감 합니다.
비가 오리라는 예보 때문인지 인적이 드문 편이었는데, 산에 많은 경험이 없는 할멈을 모시고 꽤 긴 코스를 시도하다가 자신이 없어 중도에 하산한다는 것이 그만 옆길로 새서 고생 좀 하면서 간신히 내려 왔습니다.
다행히 하산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그나마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지요.
시 <도봉>을 게재할 차례가 아니지만, 마침 그 산을 다녀오게 되어 일기처럼 한 장을 장식하게 되었네요.
여러 자매형제들께서도 기회가 되시면, 한날의 일기가 '역사'가 되도록 한번 시도해 봄직 하다고 생각 됩니다. 두루 건승하심을 앙망하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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