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14. <그 날이 오면> 심훈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그 날이 오면
심 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매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그 날이 오면> 1949.
‘그 날이 오면’은 40여년간의 어둠 속에서 씌여진 이 땅의 저항시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한용운의 깊이 있고 아름다운 일련의 작품과 옥중에서 쓴 한시, 김소월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 이육사의 <절정> 등 일련의 작품들이 저항시로 꼽힌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옥스퍼드대학 부총장이었던 C.M 바우러는 그의 저서 <시와 정치>에서 이 시를 세계 저항시의 한 본보기로 들었으며,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햇으나,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고 하였다.
[심 훈 1901~‘36] 본명은 대섭. 소설가. 영화인. 경성 제일고보 재학시 3.1운동에 참가 4개월 복역. 상해 원강대학 수학. 동아. 조선. 중앙일보. 경성방송국 기자. 1935년 ’상록수‘가 동아 현상소설로 당선, 크게 각광 받았다. ’36년 <상록수>의 출판 교정을 보다가 발병하여 장티푸스로 사망.
관련자료
정해관님의 댓글
저도 마침 그 때에 심훈의 <상록수>를 감명깊게 읽고서, 방학 때면 농촌으로가서 활동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피차가 어려웠고, 환경이 여의치 않았는데도 말하자면 전도하기가 그렇게 쉬운! 때가 아니었나를 생각하면서, 그 순수함을 잃어버린 지금의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교회에서는 '홈짱활동만이 살길이다'고 어쩌면 지난시절의 흘러간 노래를? 강조하시던데...
우리가 독창적으로 개발해서 모든이들이 환호작약할 수 있는 '손오공의 여의봉' 같은 새로운 도구나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정해관님의 댓글
소설가·시인·영화인.
심훈 /심훈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본관은 청송. 본명은 대섭(大燮), 아명은 삼준·삼보. 호는 해풍(海風). 백랑(白浪)이라는 별호도 사용했다.
아버지 상정(相珽)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큰형 우섭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은형 명섭은 교회 목사였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했다. 1919년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중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 항저우[杭州]의 즈장[之江]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焰群社)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부인 이해영과 이혼했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박헌영·임원근·허정숙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1930년 신여성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생활에 힘을 쏟았다. 1933년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근무했고,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
이전
-
다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