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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8. 오다 가다 ... 金 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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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8. 오다 가다

金 億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은 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 바단 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 포구 산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水路천리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조선시단> 창간호(1929. 11)--

평자에 의하면, 현대인의 안목으로 볼 때 동시보다 좀 높은 수준의 시라고 할까...

시라면 응당히 추구되어야 할 시정신이란 것이 안서에게는 빈약하다고 평가 된다.

흔히 시에는 사상과 언어(표현), 이 2개의 면이 추구되어야 할 미학이라는 것이 상식이라는데, 안서에게는 탁월한 시정신 보다는 우리 말의 리듬에 반응을 보인 것 같다고 평가 한다.

[金 億](1896~?) : 호는 岸曙, 본명은 熙權, 평북 곽산 출생.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게이오 의숙 문과 중퇴. 오산중학, 평양 숭덕학교 교원. 6.25때 납북.

프랑스 상징시 번역으로 유명. 첫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는 신시사상 최초의 개인 창작 시집이며, <금모래> <봄의 노래> 등 모두 7권. 번역 시집은 최초의 근대적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 외에 10권의 번역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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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Ugylizozadymawap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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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님의 댓글

작가가 태어난 곽산과 오산학교만 기억에 담겠습니다. 친일한 사실도 납북활동도
시대가 만들어준 산물입니다.

낙엽길 쌓인 산길은 좋아라 날을듯 오를건데 바위산 돌산은 가까이 하기에
먼 산이네요....
산행 하시랴 !~ 좋은 글감 주시랴 고맙습니다.
권사님은 왜 안오시는겨 !~~

정해관님의 댓글

작가가 태어난 곳, 정주의 곽산(성진님의 외가 이기도), 오산학교는 우리들과 친근감 있는 곳이며 학교 입니다.
당대 최고의 시인 소월을 길러낸 공로와 문학에서 상징주의를 도입한 역사는 대단했지만, 그도 한 인간인지라? 친일 시를 썼다거나 나중에 납북되어 그곳에서 활동한 사실( 그 내면의 마음 까지는 알 수 없어도)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네요.

정해관님의 댓글

[상징주의 문학] ...金 億과 관련...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 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칸,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 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 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 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 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 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레아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é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 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 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 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 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 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 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 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 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로 À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 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액슬의 성 Axel's Castle〉(1931)은 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주의는 1910년대에 백대진·김억 등이 발표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백대진은 〈20세기 초두 구주 제 대문학가를 추억함〉(신문학, 1916. 6)에서 레니에·보들레르·모레아스 등의 상징파 시인들을 소개했고, 〈최근의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1918. 11. 30)에서 말라르메 계열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반면 김억은 〈요구와 회한〉(신문계, 1916. 9)·〈프랑스 시단〉(태서문예신보, 1918. 12)에서 베를렌 계열의 감상적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시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은〉·〈아름다운 밤〉 등과 11호에 베를렌의 〈작시론 作詩論〉을 번역해서 실었고, 상징주의 시가 곧 자유시임을 보여주는 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펴냈다. 그러나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내면의식의 섬세한 음영(陰影)이나 외부세계와 자아와의 교감이라는 상징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기분의 시학으로서만 이해했다는 점에서 한국 상징주의 시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1920년대 후반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이르러 감각과 사상이 결합된 한국적 상징주의 시로 발전했다. 1950년대 이후 상징주의 시는 김춘수의 존재론적 순수시, 전봉건의 언어의 마술적 암시성, '현대시'동인들의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형태로 변모했다.

정해관님의 댓글

김억(金億, 일본식 이름: 岸曙生, 1896년 11월 30일 ~ ?)은 한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2]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조선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3]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시집으로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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