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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에 그 딸, 그리고 그 할머니에 그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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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에 그 딸, 그리고 그 할머니에 그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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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조실록』권91, 34년 1월 17일(갑진) <화순옹주의 졸기>

“화순옹주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바로 임금(영조)의 첫째 딸인데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동복 누이동생[同母妹]이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시집가서 비로소 궐문을 나갔는데, 심히 부도(婦道)를 가졌고 정숙(貞淑)하고 유순함을 겸비(兼備)하였다. 평소에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복식(服飾)에 화려하고 사치함을 쓰지 않았으며, 도위(都尉)와 더불어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항상 깨끗하고 삼감으로써 몸을 가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진 도위와 착한 옹주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도위가 졸하자, 옹주가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그 집에 친히 거둥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곧 토하니, 임금이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돌아왔는데, 이에 이르러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되어 마침내 자진(自盡)하였다. 정렬(貞烈)하다. 그 절조(節操)여! 이는 천고(千古)의 왕희(王姬) 중에 있지 아니한 바이다. 조정에 받들어 위로하고 정후(庭候)하였다.”

2. “화순 귀주(和順貴主)의 마을 어귀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사람이 제몸을 버리는 것은 모두 어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그리하였을 경우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자식이 그리하였을 경우에는 효자(孝子)가 되고 부녀자가 그리하였을 경우에는 열녀(烈女)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은 교훈으로 삼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생명을 잃은 것을 성인이 경계하였지만 거상(居喪)을 끝내지 못하고 죽어도 효도에 지장이 없고 보면 지어미가 지아비를 위하는 것에 있어서 무엇이 이와 다르겠는가? 부부(夫婦)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는가, 매섭지 않은가? 여염의 일반 백성들도 어렵게 여기는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가문이겠는가? 백주(栢舟)를 읊은 시는 겨우 《시경(詩經)》에 나타나 있으나 죽음으로 따라간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화순 귀주는 매우 뛰어났다고 하겠다. 월성 도위(月城都尉)의 상(喪)에 화순 귀주가 10여일 간 물과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는데, 그때 선대왕께서 그의 집에 가시어 위로하면서 음식을 권하였으나 끝내 강권하지 못하였다. 어질고 효성스러운 화순 귀주가 임금과 어버이의 말씀을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의리를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그의 한번 정한 뜻을 바꾸지 않았던 것은, 정말 왕명을 따르는 효도는 작고 남편을 따라 죽는 의리는 크기 때문이었다. 아! 참으로 매섭도다. 옛날 제왕의 가문에 없었던 일이 우리 가문에서만 있었으니, 동방에 곧은 정조와 믿음이 있는 여인이 있다는 근거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화순 귀주는 평소 성품이 부드럽고 고우며 덕의가 순일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니, 대체로 본디부터 죽고 사는 의리의 경중을 잘 알고 있으므로 외고집의 성품인 사람이 자결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 참으로 어질도다. 화순 귀주와 같은 뛰어난 행실이 있으면 정문의 은전을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를 잊은 적이 없었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지금 각도의 효열을 포상하는 때를 맞아 슬픈 감회가 더욱더 일어난다. 유사로 하여금 화순 귀주의 마을에 가서 정문을 세우고 열녀문(烈女門)이라고 명명하라.”<『정조실록』권15, 7년 2월 6일(정묘) >

3.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그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는 김정희가 너무 강직한 탓이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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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유노숙님의 댓글

오늘날 화순옹주 같은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경주 김씨나 안동김씨나 김은 김인데 사적인 원한으로 핍박을 했군요.
사람은 죽어서 훌륭한 이름을 남기어 후세에 길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도
성공한 인생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박순철님의 댓글

참, 좋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활자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읽기가 힘드네요.
좀 키워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홈지기와 올린 사람은 수정 가능하니 부탁합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1. '그 아버지'는 조선에서 세종 다음의 훌륭한 군주라는 영조를 이름이고, '그 딸'은 왕족으로서 세계에 유래가 없을 열녀인 화순옹주를 말하며, '그 손자'는 19세기 조선의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는 추사선생을 뜻한다.

2. 경주김씨인 추사가 안동김씨에 의해 핍박을 받는데, 여기서 알고보니, '강직한 성품' 때문에 암행어사로서 그 직무를 충실히 하다가 사적인 원한을 사게 되어 그리되었음도 밝혀진다.

3. 첨부된 사진 하나는 예산의 추사고택 부근의 열녀문이 있는 화순옹주 부부의 묘이고, 그곳 옆에 있는 백송은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한남동 공관(입구 우측)에도 백송이 잘 자라고 있는데, 지금은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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