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이 드라마틱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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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영화같이 드라마틱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
안동 김씨가 경주 김씨를 공격하여 촉발된 당시 추사 김정희는, 대왕대비 (순조의 부인)에 의해 “국청에 수금된 죄인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 하도록 하라.”
즉, 주거제한의 연금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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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은 주군안치였기에 유배중 4번이나 집을 옮겼고 나들이도 하였지만
김정희는 죄가 워낙 무거워 다니지도 못하며 외부와 만남도 금지되었다.
위리안치는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중형이다.
※유배의 종류와 의의
[본향안치] 고향동네로 유배를 보냄, 유배지내에서 행동반경에 제약이 없음
[주군안치] 고향은 아니지만 유배지 행정구역내에서 행동반경에 제약이 없음.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
[중도부처] 애초 지정된 유배지까지 가지 않고 중간지에서 유배생활을 함.
*** 고산 윤선도(원래 제주귀양이었는데 중간인 보길도로 유배지를 정했다는 설.
[절도안치] 섬에 가두어 둠
[위리안치] 유배지 집 울타리에 가시나무(보통 탱자나무)를 심어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제약이 많은 유배(=가극안치) ***추사김정희의 유배
유배 길에 올라 전주를 지날 때는 창암 이삼만 서예가를 만났고, 해남 대둔사도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대웅보전” 현판글과 “무량수각” 횡액글을 써 주었다.
김정희는 배를 타고 서귀포 부근 화북진에 닿았다.
이곳은 우암 송시열이 150년 전에 귀양와서 상륙하였고, 후일에는 면암 최익현도 귀양와서 귀착지로 삼았던 곳이다. 제주도 대정읍성 안동네의 집(송계순의 집)을 유배처로 삼았다.
김정희 나이 59세인 1844년, 유배생활도 5년이 되었다.
귀양살이 4년 되는 해, 제자 이상적(당시 온양군수, 중국역관)이 동지사로 가서
북경에서 구해온 책을 스승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독서광인 김정희는 귀한 책을 받고 감동하였다.
누구나 죄인을 멀리 하는 세상에 귀중한 서적을 권세가에게 넘기지 않고
유배자에게 보냈으니 이상적의 정성에 눈물이 났다.
해를 넘겨 새봄에는 두루마리 한지에 수묵으로 소나무 3그루와 둥근 창이 난 볼품없는 집한채를 그렸다.
소나무는 세월과 추위를 이기듯 강고하게 표현되었다.
마음속의 한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림 왼편에 273자인 20행의 설명을 적었다.
대강의 내용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는
공자의 말씀에 빗대어,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는 글을 적었고 또한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여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귀양 오기 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귀양 온 뒤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그러나 귀양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일컬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귀양 온 이후의 그대는 성인에게 일컬음을 받을 만하다고 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갈지(之)가 13군데 있으나 한 군데도 같지 않다고 추사체를 칭찬하였다.
스승으로부터 선물 받은 그림이 너무도 기뻤다.
그해,10월에 동지사로 북경을 떠났다.
4달째 되던 날, 1845년 1월 22일, 북경에서 중국인 벗 오찬의 잔치 초대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스승이 그려준 세한도를 펴 놓고 보였더니 옹방강의 제자 16명이 찬사의 글을 적었다.
덧붙인 한지에 적었다. 가히 격찬이 끝이 없었다. 두루마리는 길이가 10m나 되었다.
귀중한 가치를 지니게 된 세한도는 훗날 서울대학교 역사과 교수로 한국에 온 김정희 연구가 후지츠카가 소장하였다.
1943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여름에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서울 거처를 방문하여 세한도를 감상하면서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 주십사”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하였고 1944년 여름 후지츠카는 김정희 관련 서화, 서적을 모두 갖고 도쿄로 귀국했다.
손재형도 뒤를 쫓았다. 자택으로 매일 찾아가 졸랐다.
무려 2개월을 만났다. 12월에 손재형의 열의에 감동하여 무상으로 건내면서 잘 보존 해달라고 했다.
폭탄이 퍼붓는 타국에 가서 그림 한 장을 받아내었으니 한 편의 드라마임이 틀림없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받고 귀국하였다.
1945년 3월 10일 후지츠카 가족이 태평양전쟁 공습을 피해 피난 간 사이
가옥은 폭격을 맞았으니 귀중한 김정희 선생의 책과 서화가 불타버렸다.
세한도는 천만다행으로 화를 면했으니 훗날을 예견한 듯 하다.
손재형도 훗날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선거자금때문에 사채업자에게 세한도를 맡겨 돈을 빌렸다.
지금은 다른 소장가 손장근이 소장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흡사 세한도의 삶은 아닌지 되새겨 본다.
세한도(歲寒圖)는 김정희의 그림 중에 백미(白眉)이다.
1974년 12월 31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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