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쉼터

효녀 심청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효녀심청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효녀심청
세교천 작사 / 전오승 작곡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공양미 삼백석에 제물이 되어
앞 못보는 부친님과 하직을 하오서
사공 따라 효녀심청 떠나갈 때에
산천도 울었다네 초목도 울었다네


2.인당수 푸른물결 넘실 거릴때
만고효녀 심청이는 뱃전에 올라서
두 손모아 신령님께 우러러 빌때
물새도 울었다네 사공도 울었다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자료

댓글 3

문정현님의 댓글

세계복귀를 위한 일본국가의 사명이 막중한
섭리현장에 필요한 때에 적합한 지도자를 보내시는
하늘의 섭리를 느껴 봅니다.

말씀으로 일본열도를 사수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셨던
섭리에 이어서, 실천과 봉사로 중심국가로서의 책임을
이루고져 하는 사령탑을 지켜봅니다.

심청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과 땅도 감동하여 죽음의 고비를
영광된 자리로 등극시키는 드라마틱한 고사는 21세기에도
이어지네요.

정해관님의 댓글

효녀 심청이 ‘팔려간 땅’ 중국에서...


‘효녀 심청’을 기리는 공원이 ‘팔려간 땅’ 중국에 세워질 전망이다. 중국 저장(浙江)성 저우산(舟山)시 푸투어취(普陀區) 문화체육방송국(文體廣電局)은 “중한양국이 수 천년간 교류한 문화자산을 전시하고 현재 보다 활발한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호문화공원(友好文化公園)을 조성할 계획이며,

그 1단계 사업으로 ‘심청원(沈淸園)’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효녀 심청’의 원형설화로 현지에서 주장하고 있는 ‘심청고사’의 내용에 따라 심청과 그의 남편 심국공(沈國公)을 기리는 비석 등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며 한중 양국의 고유 전통 건축양식으로 건설된다고 설명했다.

현지에서는 효녀 심청의 본명이 원래 원홍장(元洪庄)으로 심봉사로 알려진 원량(元良)의 딸이었으며 아버지를 위해 부처님께 자신을 바쳤다가 우여곡절 끝에 진(晉)나라 상인인 심국공에 팔려갔으며, 결국 그의 부인이 되면서 ‘심청(沈淸)’으로 개명했다는 설화가 전해져온다. 저우산시 여유국(旅遊局)의 왕하오빈(王浩斌)씨는,

“따지고 보면 심청이 새롭게 탄생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면서 “효녀 심청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중한 양국의 우호관계를 증진할 수 있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우산시측은 현재 심청원의 조감도를 마련해놓고 있으며 관련 기관의 협의를거쳐 공원 건립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공원 건립과정에서 한국 지방단체등과의 협력도 추진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심청원 건립방안에 따르면 전체면적은 1만2천평에 달하며 다섯 구역으로 구분돼건설된다 심청의 거처 등이 들어설 본관(심청별원)의 면적은 850㎡로 돼있다. 심청본관등은 한국식 건축양식으로 들어서며 연꽃호수도 함께 건축된다,

유락구역에는 한국식의 널뛰기 등도 설치돼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심청별원 옆에는 남편인 심국공의 저택이 진나라 시대의 양식으로 건설될 예정이다. 500㎡에 달하는 심국공의 저택에는 거실과 사당, 서재 등 전통적인 중국 정원식 건물들이 들어선다. 공원에는 또 과거 서해 뱃길을 따라 진행됐던,

양국간의 수상교역을 증명할 수있는 역사유적들도 전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중국 저우산의 심청 원형설화 중국 저장(浙江)성 저우산(舟山)시에는 이른바 ‘효녀 심청’에 대한 원형설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현지 관계자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자료를 근거로 한 ‘심청(沈淸)전설’을요약한 것이다,

『옛날 백제시대에 맹인 원량(元良)에 홍장(洪庄.한국 일부 학계에서는 洪莊이라고 주장)이라는 딸이 있었다 홍장의 효성이 지극했는데 그 소문은 나라안은 물론중국땅에까지 알려졌다. 원량은 어느날 인근 홍법사(弘法寺) 스님을 만났는 데 큰 시주를 부탁받았다. 그러나 돈도 없는 처지에 시주를 할 길이 없었다,

결국 원량과 스님은 하나 밖에 없는 원량의 딸을 부처님께 시주하기로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열여섯이었다 (일부 학계에서는 스님의 정체에 대해 성공(性空)스님이라고 밝히고 시주과정을 자세하게 전해주고 있으나 현지에서는 간단하게 소개) 때는 중국 진(晉)나라 영녕(永寧) 원년(서기301년)이었다,

홍장은 스님과 함께바다가 보이는 곳(일부에서는 소랑포라 전함)에 갔다가 그 곳에서 진나라 상인을 만났다 진나라 상인 심국공(沈國公)은 스님에게 두 척에 싣고온 금은보화를 홍법사에 바치고 홍장을 중국으로 데려갔다. (일부에서는 진나라 황제가 황후가 사망하자 새로운 황후를 맞기위해 사신을 이곳에 보냈다고 전함,

현지에서도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때는 마침 진나라내에 팔왕의 난(八王의 亂)이 일어났었다 이로 인해 홍장은 새로운 모후로 등극하지 못했다. 홍장은 나라의 어지러움을 극복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관세음보살에 기도했으나 결국 황제가 죽고 말았다. 이에 홍장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바다의 짐승들이 모여 연꽃을 이뤄 홍장을 구했다. 그후 심국공의 봉지(封地)가 있는 심가문(沈家門)으로 데려갔다 이에 심국공은 홍장의 충효를 높이 사결국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이름도 심청(沈淸)으로 개명했다. 심청은 관세음보살께 백제와 백제백성을 구원해주고 중국과 백제의 화평창세를 기원했다,

그리고는 오십삼불(五十三佛)과 오백성중(五百聖衆), 십육나한(十六羅漢)을 조성하도록 한 후 이를 백제에 보내게 했다 (이 과정이 전남 곡성군의 관음사(觀音寺)의 창건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일부 학계에서 주장) 결국 심청의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 원량은 두 눈을 뜨게 됐고 95세까지 장수했다 심청의 효와 자비로움은 영원이 빛나게됐다. (중국 문화탐방에서)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