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도 하나님 사람이다.
하늘편의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구치고, 인류와 더불어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은 어디로부터 연유된 것인가.
기쁨은 혼자서는 느낄 수 없다. 상대를 통해서 기쁨을 느끼도록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하늘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관계속에서 태어나 관계를 맺으며 관계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나는 지금 기쁨의 관계가 많은가, 아니면 슬픔의 관계가 많은가. 최종적으로 기쁨의 관계가 되게 하는데 인생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인간 타락 이후 여자의 일생은 사람 대접 못 받고 살아온 피눈물의 길이었다.
성서를 보면 여자는 특수한 인물 소수만 등장한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여자들이 먼저 전해 들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다(고 14:34). 여기에 근거해 18세기 전반까지 교회 합창단은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사리사욕의 관계에는 하나님이 떠난다고 했다. 사람도 떠난다. 지도자가 자기 이익에만 집착할 때 어떤 사람이 그런 지도자를 존경하겠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희생하는 사람을 대환영한다. 그들의 삶이 감동을 주는 것은 물론 때로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왕이 사냥 도중 활을 잃어버렸다.
활은 요즘 표현으로 명품이었다. 신하들이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왕은 “초나라에서 잊어버린 것이니 초나라 사람이 가질 것이다. 내가 꼭 찾아 무엇하랴”고 했다.
공자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왕의 생각이 왜 그렇게 크지 못 할까, 왜 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얻을 거라고 말하지 못하는는가”고 꼬집었다.
고 양주동 박사는 이에 대해 “아깝다 공자의 생각이 왜 그리 크지 못했을까. 왜 자연에서 잃은 것 자연이 얻는다고 말하지 못했을까”라며 아쉬워 했다.
슬픔과 고통과 원한 관계를 모두 기쁨의 관계로 승화시켜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했다. 나눌 수 있는 관계에 한해서 해당되는 말이다. 고통을 나눌 수 없는 사람에게 “나 지금 엄청나게 고통스럽다”고 말하면 고통이 적어지겠는가. 결코 아니다.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는 좋은 꽃과 열매를 맺으므로 사람들이 따러오기 때문에 그 나무 밑에 자연히 길이 생겨난다.
깊은 물이 얕아지면 오던 물고기도 오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기쁨의 관계란 이익이 되는 관계를 말한다. 이익이 없는 곳에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겠는가.
은혜 있는 곳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희망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위해 주려는 마음을 갖고 산다면 세상은 지금보다는 휠씬 좋은 기쁨 세상이 될 것이다.
이인규 목사 서울 한강로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