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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과효의 가문 文씨와 韓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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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과효의 가문 文씨와 韓씨


나라와 부모에 대한 충과 효는 궁극적으로 하늘에 대한 충,효의 도리로 이어진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게 된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 부모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복종
이요, 자식으로서 부모의 뜻을 이어받지 못한 불효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 가문의 내력을 살펴보는 일은 그 가문이 하늘과 얼마만큼 닮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글에서 남평문씨의 상조(上祖)는 금천인을 숭배하며 동북아시아일대 문화창조
주역인 동이(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 했다.

김일제로부터 흘러온 문씨 가계는 크게 문다성을 시조로 하여 충과 효의 두 계열로 나
누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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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개국공신인 시조 문다성으로부터 1세 익, 2세 공인, 공원 공유, 3세 극겸에
이르기 까지 남평문씨 가문은 고려건국의 기틀을 잡고 문물을 정비했으며 왕을
올바로 좌하는 일에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극겸 충숙공의 충정은 동국여지
승람, 고려사 열전, 문극겸전에 자세히 기록하여 나라와 왕을 위한 충의를 후세까
지 밝히고자 하였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충숙공의 시에 대한 시평을 통해 “옛날 의왕은, 수십세의
풍족하고 평화스럽게 잘 다스려진 왕업에 의지하여 왕위에 있은 지가 오래 되도록
일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자, 모두 태평한 왕업이 태산보다 더 안정스럽다고 여겨
감히 중간에서 진언하는 자가 없었다. 정언 문극겸(正言 文克謙) 공은 바로 임금이
계시는 곳의 문을 두드려 충간을 하는 글 한 통을 올렸는데, 말한 바가 당시의 병폐
를 제대로 맞아서 다른 사람들이 봉이 아침해에 우는 것과 같다 하였다. 왕이 그 말
을 들어주지 않자, 공은 관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해서 아니고,

원앙이 그 수레 가로막은 일 어찌 일신을 위함이었을까?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여윈 말 세차게 채찍질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리노라.

“명종왕이 등극하심에 이르러, 왕명의 출납을 맡는 자리에 발탁(拔擺)되었는데,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 백성의 이해(利害)와 사대부(士大夫)의 어짐과 못됨을 다 왕께 아뢰고
추호()라도 막힌 것이 없었다. 이제것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안팎으로 편안하고
환란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공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이 총재(이부상서)의 지위에
서 나를 옥당(玉堂 : 홍문관)으로 들어가 왕을 모시게 천거했었는데 일년이 지나서 공은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만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기렸다
.

(8구중 파한집에 3구~6구가 있고 나머지는 동문선에서 발췌)“

영특한 그 모습이 상대성(上臺星)을 응했었고

옥병의 얼음같이 그 마음 깨끗했네.

일찍이 대궐문의 구름을 헤치어 외치었고

늘그막에 우연(虜湖)에서 해를 돌이켰네.

단봉(丹鳳)은 오래도록 못(池 : 中書省) 위에서 목욕하였는데

흰닭(신유년을 뜻함)은 어찌하여 꿈 속에서 재촉했나.

사조(謝跳)의 '푸른 이끼' 시구(詩句)만이 남아서

온 세상 만인(萬人)의 입에 우뢰같이 전하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길 "공이 벼슬길에서 지킨 절개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시구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비록 그 분의 실록(實錄)이라 해도 좋겠다. "하였다. 어제 공의 옛
별장(別莊)을 지나다 보니,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샘물이 돌들에서 나오는데, 공이
평소 시던 곳이다.

나는 슬프게 여겨 배회하면서 차마 떠나지를 못하고, 시를 지어 벽에 써 두었다.“

바위 밑 찬 물줄기, 감돌아 흐름이 무슨 생각 있는 듯하네.

빙설파(氷雪派)가 아직도 봉황지를 따름을 누가 알리오.

동각(東閣)을 거듭 엿봄이요 서문(西門))에 날 저물려 할 때로다.

시를 지어 벽 절반에 써 두는 것은 저승의 임에게 알리려 함이로다.

충숙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에는

<정사(丁巳) 세모(歲幕)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 삼가 지음>

가원(家源)은 일찍이 고려사를 읽다가 문충숙공(文忠肅公)의 사적에 이르러선 무릎을 치며 여러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에 날카로운 의기로 권세 부리는 간악한 무리 베기를 청하고, 궁중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규탄하므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치었고, 면직되어 서울을 떠남에 청고(淸高)한 명망이 더욱 높아
져서 영특한 풍모와 굳센 절의는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 중략

라고 기록하였다.

효혜공(孝惠公)의 시호를 하사받은 4세 유필은 1177년(고려명종) 형 후식과 함께
문과에 급제, 1220년(고종7년) 안서(황해도 해주)부사가 되어 뇌물을 받아먹는 풍습
을 단속하고,
1222년(고종9) 지문하성사를 지낼 때 조석의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물러나지 않으므로 왕이 빠른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다고 칭송하였다.
78세로 별세하셨을 대왕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고 한다.

11세 충정공(忠貞公) 숙선은 1351년(충정왕3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학사, 좌정
언 지제고 사간원헌납으로 원종훈에 책록되고 보문각제학을 지냈으며 군수로 있을때
선정을 베풀어 검소한 생활로 군호를 청도라고 불렸다 한다.
오산현 원님으로 재임시 미신에 미혹되어 인륜을 알지 못하던 백성들을 교화하여 3년
에 걸친 노력으로 미신을 버리게 되었다.

12세 충정공의 차남으로 출생한 충선공(忠宣公) 문익점남평문씨를 대표하는
인물
로서 현세 까지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분의 업적은 시대를 넘어 오늘 대한민국
모든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지 않고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 바로 목화씨를 중국에서
몰래 붓통에 넣어 들여와 한반도에 의복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충선공파의 시조인 문익점(益漸)선생은 1331년 2월8일 출생하시고 1400년 2월8일
별세하였으며
호는 사은(思隱)또는 삼우당(三憂堂)인데 삼우의 의미는 항상 국가가
어려움을 걱정하고, 성리학이 보급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걱정하는 것으로 선생이 직접 지은 호라고 한다.

8세에 학당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
(牧隱)이색(李穡)선생과 함께 정동향시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신경동당에 급제하였다. 그 후 벼슬이 여러차례 올라 33세에 좌정언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면종자를 가져와 문물혁신과 국가경제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3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하고 43세인 공민왕 22년 성균관 대사성에 보임 되었
으며, 45세에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를 역임하였다.
62세에 고려가
망자 조선조에서 여러 차례에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였으며
70세인 1400년 2월 8일에 돌아가니 5월에 예장으로 장례하였다.
사후에 참지의정부사,
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증직되고 강성군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가정대부 의정부참지정사를 추증하고 갈충보국 계운순성 좌익택중광리 정량
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시호를 충선이라 하고 부조묘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대왕은
대광보국 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을 추서하고 부민후로 봉하였다.
문익점 선생은 충과 효 그리고 학문에 있어 시대의 경계를 넘나든 남다른 영웅이였다.

1. 문익점의 충의

충의에 있어서는 평소 충성을 다해 나라를 보위했음은 물론이고 목숨을 바쳐
간쟁하기도 하였다.

33세에 고려의 서장관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자 원제는 예부시랑을 제수하고
장차 크게 기용하고자하였다.
이때 마침 고려에서 지를 짓고 망명한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이 간신 최유와 원후 기씨와 함께 음모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하였으니 선생은 이 일을 바로 잡으려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간쟁하였
으며 간원에 들어가 위조문서 수십통을 소각하였으니 이에 최유등이 가진 모략을 항
선생을 덕흥군 편실에 42일간 감금하고 공명과 부로 유혹하고 권세로 협박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고 신하에게 두임금이 없다라고 하여 충의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목숨을 깃털같이 가벼이 여기니 원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감탄하여
충신이라고 하며 원제에게 간청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고 교지(월남)으로 귀양가게 하였다. 그후 원제도 후회하여 사면하고 소환하니 다시 복직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하여 이태조가 여러번 벼슬을 주었으나 두문불출하였다.

2. 문익점선행의 효행

효행에 있어서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효동(孝童)이라 이름이 높았다.

당시에 불교가 대성하여 비록 유명한 사대부라도 부모의 상을 100일만에 벗었는데
선생은 홀로 3년상을 하고 6년동안 묘를 지켰다. 특히 46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를
지킬적에 왜적이 침입하여 지나는 곳마다 살생을 일삼아 모두 피난하였는데 선생은
홀로 여막을 지키고 평시와 같이 곡을 하였다. 이에 무지무도한 왜적들도 감탄하여
참된 효자라 하고 나무를 깍아서 물해효자(효자를 해치지 말라)의 표시를 하여 부하와
후침차로 하여금 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비단 선생의 여막 뿐만 아니라
단성현 일대가 모두 안전하였다.
그후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지휘사로 있을 때 선생을
위문하여 왜적을 섬멸하는 대책을 문의하고 고려 조정에 주청하여 그 마을을 효자리로
명명하고 홍무계해년 선생53세에 효자비를 세웠다.

현재 단성면 배양리 마을앞 목화전시관 내에 효자비가 남아 있다.

3. 학행(學行)과 도학(道學)

학행과 도학에 있어서는 선천적으로 탁월한 자질을 가졌고 당시 유현이신 이곡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아들 목은선생과 도의의 교류를 맺고 정학(正學)을 밝히며
사도를 배척하였다.

또한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박선중 이숭인 선생 등과 함께 성균관을 창서케 하
였다.
당시 석유(碩儒)를 뽑아 관원에게 강의하게 하였는데 대사성 이목은 선생의
론을 제유(諸儒)가 따라가지 못함을 보고 칭찬하기를 문일신(文一新)은 동방 이학
(理學)의 종(宗)이라고 하였다.
또 시무론 8조를 진상하여 안으로 5부에 학당을
건설하고 밖으로 주군에 향교를 설치할 것과 중국제도를 따르고 호속(胡俗)을
폐할것 등을 극간하여 좋지 못한 풍속을 바꾸었다.
고려사에 찬하기를 문익점은 한갓 목면의 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찍 학문에
힘써 정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쳐 사람을 효제(孝悌)와 성리학으로 가르치고
삼한의 나쁜 풍습을 바꾸어 전도(天道)를 밝히고 없어졌던 문풍(文風)을 다시
일어나게 하였으니 가히 동방도학(道學)의 종(宗)이 된다고 하였다.

우암 송시렬 선생은 내 일찍이 남명조식, 퇴계이황, 일두정여창,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모재 김안국 추강 남효온 등의 문집을 보았는 바 충선공의 공로
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의 공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성리
학에도 공이 막중하다고 서술하였다.

세종대왕은 도천서원에 사액하였고 명종대왕은 벽계영당에 사액하여 서원으로 승격
시켰고 인조갑신년에 해서유현(海西儒賢)들이 삼봉서원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다.

영조 임자년에 월천사(강성서원)에 사액하고 봉향하였고 정조 기미년에 운산서원에
봉향하였으며 영호유림(嶺湖儒林)의 사차에 걸친 문묘종향의 소청이 있었다.
이외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사적이 무수히 많으나 여기에 선생의 사적 및 사료를 간략
하게 기록한다.

-1997.2.10.남평문씨충선공파종친회 -

부조묘는 조선에서 3인에게만 내렸는데 매헌 안유선생, 포은 정몽주선생, 사은 문익점
선조이다.
효행은 도행록에 기록되었으며 국가에서 마을 전체를 효자리라고 명명하였다.

충과 효 그리고 진리와 도를 깨닫고 설파하고자 하였던 문익점 선생의 후손에서 바로
애국지사 문윤국 선생이 출생하였으며 참부모님 또한 문익점 선생의 모든 업적을 이어
받고 탄생하신 것이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재배 시효에 이어 14세 정해공(靖惠公) 문영(萊)는 이색 문하에서
성리학을 비롯해 천문 지리 산수 유려에 정통한 학자로 물레(직포기)를 발명하였고,

태조4년 좌찬성이 되고 치사를 거쳐 장연백에 봉해짐 대광보국 승록대부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14세 양민공(襄敏公)문영(英)목은 이색문하에서 수학 1393(태조2) 문과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제 직제학 역임 한 분으로 베짜는 방법을 연구(해사
기 발명)하여 만든 베의 명칭이
문영베에서 무명베로 관용어가 되었다.

문익점(목화씨 도입)-문래(물레 발명)-문영(무명베 기술 확립)의 3대를 통한 의생
활 혁신
으로 귀족부터 서민에 이르기 까지 쉽게 의복을 지어 입을 수 있게 되었으
며 일본에도 이 기술을 전래 하였다.
- 이전 글, 2080번에 자세히 소개 됨-

-고려와 조선의 대 명문 귀족,

청주(淸州) 한(韓)씨-

그런데 고려시대 대 명문 가문이요, 고려 건국의 기틀을 확립한 문文씨와 한韓씨의 인연도 특별하다. 청주 한韓씨는 참어머님의 본관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청주(淸州) 한(韓)씨의 시조 또한 고려개국 공신으로 태조11년(928)에는 태조가 후백제 견훤(顆萱)을 정벌하려 남행할때 한란(韓蘭)이 방정리(方井里)에서 왕건태조를 영접하고 10만 군사에게 하루동안 휴식하는데 필요한 모든 주육급식(酒肉給食)을 베풀었으며 후삼국 통합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태조13년(930) 12월 겨울에는 신흥사(新興孝)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巨堂)을 설치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동서벽에 도화하였는데(壁上公臣) 29명의 개국공신 중에,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과 청주한씨 한란韓蘭,이 들어 있다. 한(韓)씨는 한국에서 제일
오랜 역사를 지닌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특히 조선 때에는 많은 공을 세운
신와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쥔 가문이다.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유금필(庾금弼),김선궁(金宣弓),이총언(李悤言),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 ;
안동 권씨 시조),윤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 남평 문씨 시조),이능희(李能希),이도(李棹),허선문(許宣文 ; 양천
허씨 시조),구존유(具存裕 ; 능성 구씨 시조),원극유(元克猷 ; 원주 원씨 시조), 금용식(琴容式 ; 봉화 금씨 시조),김훤술(金萱術),강여청
(姜餘淸 ; 금천 강씨 시조)
한란(韓蘭, 청주 한씨 시조), 손긍훈(孫兢訓 ; 밀양 손씨 시조),방계홍(房係弘 ; 남양 방씨 시조),나총례(羅聰禮 ; 금천 나씨 시조),이희목(李希穆 ; 부평 이씨 시조),염나명(廉那明 ; 서원 염씨 시조),최필달(崔必達 ; 강릉 최씨 시조),김홍술(金弘述) 등이다.

한씨의 시조는 멀리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의 후손으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삼형제가 있어, 각각 기(奇)씨, 선우(鮮于)씨, 한(韓)씨가 되었다고 한다. 즉, 청주 한씨의 시조 난(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友諒)의 자손이 되는데, 기자(箕子)는 원래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아니고 우리나라 땅에서 태어난
기(箕)씨가 아닌 한(韓)씨라는 것이다.

역사학자의 학설에 따르면 箕(韓) 시조인 마지막 왕 준(準)이 위만에서 쫓겨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진국(辰國)에 들어가 조그만 나라를 건설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일컬은 것만 보더라도 그의 성이 기(箕)씨가 아니고 한(韓)씨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한씨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많은 명신(名臣)과 명
상(名相)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큰 세력을 가진 명벌(名閥)로서 오랫
동안 정치권좌를 주물렀다.

청주 한씨는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여 내려오는 동안 봉군(封君)과 지역 분적(分籍)으로 인해 30여파로 나뉘는 데 그 중 후손이 많기로는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 左議政)파와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左贊成)파, 충간공(忠簡公) 한리(韓理, 吏部尙書)파, 몽계
공(夢溪公) 한철충(韓哲沖, 禮部尙書)파, 한연(韓漣)의 관북(關北)파, 충성공(忠成公) 한명
회(韓明澮)파 등 6파가 청주 한씨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청주 한씨의 인물
가운데 여러모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이다. 그는 단종

을 내몰고 세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으며, 그를 맨 윗
조상으로 삼는 충성공(忠成公)파가 성립되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써 단종
위년 계유정란(癸酉靖亂)에 가담하여 성공을 하자 정란공신(靖亂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다시 2년 뒤에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며, 성종 때에는 귀성군(龜君)을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오르기도 했다.
한명회는 이러한 삼대에 걸친 공훈과 권좌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과
좌의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대대로 임금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
하다. 모두
12명의 왕비가 한씨 가문을 통해 배출되었다.

1. 위숙왕후(威肅王后)

고려태조(918-943) 왕권의 모후

선계부전(先系不傳)

2.용신왕후(容信王后)

고려정종(1035-1046)의 비

증문하시중 조(贈門下侍中 祚)

3.용의왕후(容懿王后)

고려정종(1035-1046) 용신왕후의 동생

증문하시중 조(贈門下侍中 祚)

4.순정왕후(順靜王后)

고려 공민왕(1351-1374) 비

선계부전(先系不傳)

5.신의왕후(神毅王后)

조선 태조(1392-1398)의 원비(元妃) 신의 고 왕후(神懿高皇后)

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

6.려비(麗妃)

명(중국) 성조 영락제(1402-1424), 공신부인의 언니

서성부원군 영정(西成府院君 永矴)

7.공신부인(恭愼夫人)

명(중국) 선종 선덕제(1425-1435)

서성부원군 영정(西成府院君 永矴)

8.소혜왕후(昭惠王后)-인수대비

조선추존왕 덕종의 비로 조선여인들의 풍속과 예절교육에 힘씀

서원부원군 확(西原府院君 確)

9.장순왕후(章順王后)

조선예종(1468-1469) 의 비

상당부원군 명회(上黨府院君 明澮)

10.안순왕후(安順王后)

조선예종(1468-1469)의 계비

청천부원군 백륜(淸川府院君 伯倫)

11.공혜왕후(恭惠王后)

조선성종(1469-1494)의 원비, 장순왕후 동생

상당부원군 명회(上黨府院君 明澮)

12.인열왕후(仁烈王后)

조선인조(1623-1649)의 비

서평부원군 준겸(西平府院君 浚謙) -청주한씨 대종회-

왕후 최다 배출 성씨인 한씨는 고려시대부터 문씨와 인연이 깊다.

남평문씨의 2세인 경정공(敬靖公) 공유(公裕)의 장인한안인韓安仁 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3세 문충숙공어머니는 장단한씨(長端韓氏)-청주한씨로 통합로서 평장사
렬공(文烈公) 안인(安仁)의 따님이다. 9세 판서공파 파조인 소부감공(少府監公)
세린(世麟) 의 어머니 역시
청주 한씨(韓氏)는 예의판서(禮儀判書) 희적(希迪)의
따님으로 알려져 있다.

문씨와 한씨의 인연은 이러한 혼인관계 이외에도 한씨가 문씨를 도와 주기도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내려 왔다.
도부서(都府署) 한충(韓冲)은 벼슬이
참지정사,서북 병마사를 지낸 문관(冠)에 대해
문관이 선채로 절을 받고 한 마디도
말을주고받지 아니하니 한충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진정 원수(元帥)다운 기상이
있다.”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46권 江原道 旌善郡 人物 高麗≫

문관(文瓘)≪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慶尙道 安陰縣 新增 名宦 本朝≫

3세 문극겸(文克謙)이 판예부사가 되었을 때 한문준(韓文俊)은 극겸을 위해 벼슬 양
보를 거듭하였다.

“문관으로는 석차(席次)가 제2위이고 그 다음은 극겸 이었으며, 그 다음은 최세보
(崔世輔)였다. 한문준이 맨 윗자리의 재상으로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됨에, 극겸은
응당 상(亞相)이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세보의 윗자리에 있으려 하지않고,
선수를써서 자진해 후퇴하고 사양하며 최세보로 하여금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아
아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그 다음 자리를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자 최세보
또한 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문공(文公)에게 은혜를 받았음이 실로 많았었는데,
감히 문공의 윗자리에 있으리오." 하였다. 왕은 예부가 병부의 위가 된다는 이유로써,
겸에게 판예부사를 제수하여 아상으로 삼고 최세보를 그 다음 지위로 삼음에, 아는
이들이 그 양보심을 칭송하였다.
문헌으로 만 보더라도 문씨와 한씨는 둘 다 고려개국공신을 시조로 하여 가문
의 인물들이 나라의 안녕과 번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위치에 있던 가문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문씨와 한씨는 선조(先祖)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어져 오늘의 참부모님
가문을 탄생 하게 하는 배경을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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