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인용

교또구경과 3 인의 이야기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이웃나라 일본 교토

교토는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재와 유산이 많은 곳

기도 하다. 밤에 도시에 불이 꺼지면 사찰에 불이 켜져 어둠을 밝히기도 한다.

P6305041[1].jpg

다시 귀무덤을 떠나 사슴공원으로 유명한 나라현 동대사로 향한다.

나라현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나라라는 이름 또한 한글이다. 동대사,

동양에서는 제일 큰 절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지은 절이며 입구에

약2키로 정도를 사슴을 방목하여 키우고 있는데 희안하게 사슴에게 먹이를 주면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데 그모습이 신기해 과자를 사서 주는 사람들이 많다.

P6305044.jpg

사찰규모면에서는 크게 보이고 웅장해 보이지만 우리나라 사찰같이 아름다움 같은 모습은

애시당초 찾아 볼수 없었으며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높다랗게 서있는 일주문 같은데도

아름다운 단청이라던지 오밀조밀 꾸민구석은 아예없고 크기만 컸을 뿐이었어요.

P6305045.jpg

손에 무엇이던지 들고만 있으면 몇마리씩 다가와서 달라고 고개를 드는데 일본은 사슴을 신성시

여겨서 그런지 몰라도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손으로 쓰다 듬기 조차 싫었지만 엉겨 붙는데는

도리가 없었지요. 손에 든것 다주고 안으로 들어 가서 씻었습니다.

P6305046.jpg

P6305047.jpg

P6305048.jpg

동대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제자이던 심상대덕이 백제 양변스님의 초청으로 화엄불교를

강설하게 되었고 이에 성무천황은 국가의 평안과 번창을 이루기 위해 747년 부터 동대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당시 동대사 가람의 총책임자는 고구려인 고려 복신이 맡았으며 대불의

주조는 백제인 국중마려가 그리고 대불전 건축은 신라인 저명부백세 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P6305054.jpg

P6305056.jpg

P6305057.jpg

대불전에 있는 부처 대불입니다. 높이는16.21미터 얼굴길이4.8미터.

세계 최대 불상이라고 합니다.중앙에 있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성인 15명이 올라설수 있다고

하는데 축제기간에는 한번씩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aIMG_8014[1].jpg

대불전 입구에 있는 빈주루 존자상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존자상의 몸을

쓰다듬어 자기의 아픈곳에 문지르면 낫는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이들이 무릎등을 쓰다듬어

유난히 반질거립니다.

P6305060.jpg

동대사 법요식이 열리는 모습입니다. 동대사 역시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고

하네요.하루의 긴여정을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마지막 코스로 오사카 성이

예정 되어 있고요.

P7015089.jpg

오사카성을 둘러보기전에 잠깐 일본의 역사적 현장을 잠깐 둘러 보기로 하자. 이야기를

읽어야만 오사카성을 둘러보는데 더욱 재미를 느끼게 될것 같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에 이어 약 30여 년에 이르는 아즈치 모오야마(安土桃山 1568-1600 -쇼쿠후(織豊)

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모오야마(桃山) 시대는 가히 '풍운(風雲)의 시대'라

불릴 만큼 격변기였다.

간단하게나마 이시대의 역사적인 세 사람을 소개한다.

P7015090.jpg

세사람의 성격을 이야기 한다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성격은(카리스마)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목을쳐라" 노부나가는 전국 다이묘(戰國大名)의 선두주자로

1573년 무로마치 바쿠후를 멸망시킨다.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할만한 강렬한 성격을 지닌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그는 1582년 교토의 혼노사(本能寺)에서 자신의 가신(家臣) 아께지 미즈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자살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의 성격은(지략)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어떡하던지 울려라"

히데요시는 비천한 출신(하급 보병 아시가루(足輕)의 아들)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오다노부나가 장군의 밑으로 들어가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는 미즈히데를 죽이고 권력을 계승하여 1590년 전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호방활달(豪放豁達)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크게 인기를 끄는 인물.
하지만 우리에겐 '침략의 원흉'일 뿐이다.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 1598년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 전쟁을
일본에서는 '분로쿠노 에키(文祿의 役-임진왜란)', '

게이쵸노 에키(慶長의 役-정유재란)라고 부른다.
전쟁의 이유는 조선에게 '정명(征明)을 위한 길'을 열라는 것이었다.
하긴 전쟁을 하는데 무슨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냥 쳐들어가면 되는 것이지.
히데요시의 꿈은 '당(唐)', 천축(天竺)까지 정복하고 천황을 북경에서 맞아서
도성 주위의 10개국을 바쳐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히데요시를 호방활달(豪放豁達)하다고 평하는 것이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심계(心計)가 깊고, 변화가 심했다. 참으로 맵고 독했다.
그 심모원려(深謀遠慮)함은 당대 다이묘(大名)들이 감히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쥬라쿠다이(聚樂第-대저택)까지 양도할 정도로
신임했던 양자 히데쓰구(秀次)가 아들 히데요리(豊臣秀賴)의 장래를 방해할까 염려하여
그 가족을 몰살시키는 장면은 인간의 심계가 이를 수 있는 최절정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말 압권이라 할 만하다.

셋째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의 성격은(인내)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때 까지 기다려라"

P7015091.jpg

히데요시는 죽음에 임박하자 이에야스에게 후사를 당부한다.
히데요시 사후 18년 뒤인 1615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눈물을 흘리며 보호를
부탁한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를 죽이고 도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P7015094.jpg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기전에 도꾸가와이에아스에게 사후를 부탁하며 히데요리가

장성하면 모든걸물려주길 부탁하고 죽지만 결국은 믿었던 도꾸가와 이에아스에 의해

도요토미라는 성은 2대에서 끊어 졌으며 지금 일본에는 도요토미라는 성은 없다. 이에아스에

의해 메꾸어진 해자지만 다시 복원시킨 것도 도꾸가와 이에아스였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한 후 1600년 세키가하라(關ガ原)
싸움에서 이겨 천하의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614년에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장악한 오사카성 공략에 나섰고 20만의 대군을 동원하고도 6개월만에야
겨우 함락시켰다. 오사카성의 함락은 휴전을 틈타 소토보리와 우치보리를 메우는 술책을 통해서야
가능하였고, 지금도 '소토보리, 우치보리가 다 메워졌다'는 말은 모든 사전 준비가 끝났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고 한다.

P7015098.jpg

바깥쪽의 해자를 '소토보리'(外堀), 안쪽의 해자를 '우치보리'(內堀)라고 부른다.

P7015099.jpg

P7015100.jpg

P7015101.jpg

성벽의 구조는 각진 부분은 큰돌 작은돌을 번갈아 쌓으며 피라미드 형식으로 지어져

지금도 완벽한 건축물로 인정 받고 있다.

P7015109.jpg

P7015110.jpg

오사카성은 규모로만 보면 일본 제일이다. 히데요시는 자기 권력의 절대성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해 3년이라는 세월 동안 10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이 성을 건설하였다. 축성 당시 규모는
현재의 5배정도로 추정된다. 오사카성은 일본을 통일하고 명나라 정벌을 꿈꾸던 히데요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듯 모든 것은 변화하였다. 1537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1598년 조선전쟁의 혼란 속에서 병사한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에는
일점혈육인 5살의 어린아들 히데요리(秀賴)의 후계자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호랑이 같은 영주들의 충성
서약까지 받아내는 나약한 부정(父情)을 보이기도 하였다. P7015116.jpg

P7015111.jpg

P7015114.jpg

비록 히데요시의 친아들 히데요리는애첩 요도기미 (淀君)가 그녀의 정부와 사통해 낳은 자식이라

는 설이 있으나 본처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한 히데요시는 이 늦동이 외아들을 끔직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히데요리도 히데요시 사후 17년이 지난 1615년, 도쿠카와 이에야스에

의해 생모인 요도기미와 함께 할복하게 됨으로서, 도요토미 일족은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오사카 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확장되었다. 지금 남은 성곽과 망루 등은

모두 도쿠가와 가문이 재건한 것이며,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콘크리트로 다시 복원했다.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은 땅속에 묻혀있다.

P7015123.jpg

P7015113.jpg

P7015108.jpg

P7015105.jpg

P7015106.jpg

P7015107.jpg

모자이크를 한듯 아름답게 쌓은 성벽과 거대한 바위로 이룬 성벽들...

P7015122.jpg

P7015132.jpg

성의 안쪽 부분 조총등을 쏘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P7015117.jpg

오사카 성 안쪽까지 타고 갈수있는 미니 기차

P7015119.jpg

P7015120.jpg

P7015124.jpg

P7015130.jpg

옛날에는 망루 였으나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를 해 8층 전관을 유물전시,

전장관등으로 꾸며 놓았다.오름은 엘리베이트를 이용하나 사람이 많이 밀려 걸어

올라 가는게 빨랐다. 맨위층 전망대는 한바퀴를

돌수 있게 만들어 놓아 오사카 시내를 전부 돌아 볼수 있다.

P7015141.jpg

P7015142.jpg

오사카성 미니어쳐, 역시 사진은 촬영금지 되어 있다. 보기전에 한컷...

안쪽 해자를 소토보리, 바깥쪽 해자를 우치보리라 부른다. 도꾸가와 이에아스의 꾐에 빠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이 해자를 메워 버려

난공 불락이던 성이 함락 되었고 결국 생모인 요도기미와 할복 자살했다.

P7015144.jpg

P7015145.jpg

- 김홍일 평화대사 제공 -

지금 우리모두는 일본에서보는 3리더(?) 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가까운현실을 볼필요도 있다고 생각 되어진다.

관련자료

댓글 8

정해관님의 댓글

김홍일 대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바쁘다는 핑게로 정기 모임도 주선하지 못해 죄송 합니다.
정권....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실감나는 중세 일본의 얘기군요.

金 明烈님의 댓글

나역시 1985년 1월경에 외국 첫탐방때 직원들과 함께 갔었지요,
여러가지로 놀랬습니다. 그큰돌들로 성벽을 쌓아놓는것 등등 .........

이판기님의 댓글

90년 일본어 연수차 일본에 가서 30명의 선교사들이 지바로부터 오사카까지 여행햇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일본에서의 우공의 임지가 오까자끼였습니다 곧 이에야스의 고향이지요. 난공불락의 요세도 훌륭한 성벽도 시간과 섭리앞에 폐허가 되어 남겨진 현장일 뿐이지요. 새삼 겸허해집니다.

parksinja님의 댓글

와~ 내용에 충실한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여유있는 시간대에 다시 들어어 자세히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일본의 역사를 재정비하는 느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