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인용

오늘 알아야할 상식:세종의 한글창제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흔히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이해되거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고 세종이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거의 홀로 만든 것이다. 아니 홀로 만들수밖에 없었다.

당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공식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까닭에 창제 작업에 집현전 학자들을 투입할 수 없었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 중 일부가 세종에게 도움을 줬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종의 질문에 답하는 정도의 조력자 위치에 불과 했다. 정확하게 말해서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이 무슨 의도로 운학(언어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몰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공식적으로 공표할 때까지 그들은 왕이 스스로 문자를 만들어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종의 창제작업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만약세종이 홀로 비밀리에 창제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 적어도 실록에 그것에 관한 언급이 한 마디라도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세종이 훈민정을을 반포할 때까지 문자 창제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임금의 공식적인 행동과 말을 모두 기록되던 당시에 공식적인 사안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록에 무기 제작과 같은 극비 사항마저 기록된 것을 감안한다면 훈민정음 창제는 극비리에 진행된 국가 사업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즉, 훈민정음은 그야말로 세종이 홀로 극비리에 진행한 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왜 이 일을 홀로 극비리에 진행했을까? 그 답은 훈민정음 공표에 반대했던 최만리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요약하자면 첫째는 새문자를 만들어 단독으로 쓴다는 말이 중국에 흘러가들어가면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화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하여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 셋째는 설총의 이두로써 가능한 일을 굳이 훈민정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는 창제취지 중 하나로 훈민정음 보급이 억울한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가 옳지 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 내용의 골자는 "사대'와 '권위'였다.

당시 대개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동시에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원칙을 국가를 유지시키는 철칙으로 여겼으며, 이러한 철칙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들의 내면엔 학자 또는 선비로서 갖는 권위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적어도 문자는 자기들만이 아는 것이고 학문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사고에 빠져있었다. 그들의 학문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유학과 한자였다. 그들에게 평민은 그저 이두 정도나 알고 있는 무식쟁이였고, 천민은 그것조차도 모르는 짐승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런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있었고, 그 자부심의 밑천이 한자였다. 그들 양반들은 사실 문자와 학문을 권력의 기반으로 사모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평민이나 천민이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의 등장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많은 학문 서적들이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어 평민들에게 쉽게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그때까지 누리던 학문적 권위를 잃게 될 것이고, 그 연장선에서 권력의 상당부분을 잃게 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세종의 훈민정음을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세종은 그런 현실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위해 공식적인 회의를 거쳐 진행한다면, 그것은 시작도 되기 전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힐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만약 세종이 그 일을 강하게 추진한다면 대신들은 중국 사신들의 힘을 빌려 세종을 협박했을 게 분명했다.

세종이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훈민정음 창제동기에서도 잘 드러나듯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종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훈민정음 창제를 결심했지만 당시 양반사회는 결코 그의 결심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법의 내용을 아는 것이나, 또 학정을 일삼은 관리를 고발하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세종은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직접, 그것도 비밀리에 창제 작업을 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한 근거는 또 있다. 세종대에 쓰인 모든 책엔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열거되어 있고, 또 당대에 만들어진 모든 과학적 산물에 대해서도 제작자와 참여 인사들의 이름이 거명되어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만 유독 "임금이 친히 언문 28글자를 만들었다"고 실록은 쓰고 있다.(세종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의 창제 취지와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훈민정음]에도 '세종어제'라고 표현하고 있어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만들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는 단순히 세종 대에 만들어졌다는 표현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세종 대에 만들어 졌다는 표현이라면 당대에 편찬된 모든 책과 과학 기기도 같은 표현을 써야 옿다. 그러나 '친제'와 '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예는 훈민정음 밖에 없다. 이는 훈민정음을 세종이 직접 홀로 만들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세종이 정말 문자를 창제할 만한 언어학적 소양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세종의 언어학에 대한 깊이는 대단했다. 당대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은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읽고 그르 불러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되느냐?"며 최만리의 운학에 대한 무식함을 꼬집었다. 또 최만리의 언어 가치관에 대한 논리적 결함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설총이 만든 이두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세종이 설총의 이두에 대한 깊은 연구를 했음은 물론이고, 언어학 서적도 두루 섭렵했음을 의미한다. 또 최만리에게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는 말에서도 언어학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홍무정운역해]와 [동국정운], [훈민정음] 등의 서문에 세종의 언어학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정인지르 위시한 당대의 언어학자들이 모두 세종의 영향을 받았다는 뜨인데, 이런 사실은 세종이 당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 1436년에 정부구조를 위정부서사제로 바꿔 업무량을 대폭 줄였고,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 1437년에 세자(문종)에게 서무 결재권까지 넘겼다. 물론 이 과정은 세종의 소갈(당뇨)등의 이유였지만 최만리에게 말할 땐 병 때문이라는 말은 없었고 "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다"고 말하고 있따. 하지만 세종의 나이 41세였고 세자에게 임금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서무결재권을 넘겨줬다는 것은 서득력이 없다. 즉 세종이 서무 결재권을 넘겨준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는 뜻이다.

묘하게도 세종이 운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점부터였다. [세종실록]22년 6월 22일의 다음기록은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경연에 보관되어 있는 [국어]와 [음의] 1책은 탈락된 곳이 몹시 많아 중국에서 딴 판본 한책을 구해왔는데, 빠지고 없어진 곳이 많았으면, 주해도 역시 소략하였다. 일본에서 또 상세한 거솨 소략한 것 두본, 보음 세 권을 구해왔으나 또 완전하지 못했다. 이에 집현전에 명하여 경연에 간직하고 있는 구본을 중심으로 여러 판본들을 참고해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탈락된 곳은 보충하게 하였다. 동시에 음의와 보음에 번잡한 것은 정리해서 해당 절목아래에 나눠 넣고 그래도 완전치 못한 것은 운서로 보충하라고 하였다. 뒤이어 주자소에 지시하여 그대로 찍어서 널리 배포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세종은 언서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시점으로 보아 세자(문종)에게 일을 넘길 시점부터 훈민정음을 준비했던걸로 보인다.

관련자료

댓글 3

이무환님의 댓글

세종 대왕님의 한글 창제 너무나 우수한 한글의 내력과 역사적 고찰등 긴긴 시간 주신 글월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여 합장 축원 아주,,,

문정현님의 댓글

얼마전 뉴스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거의 방치 상태로
보수가 시급하다는 내용이 보도 되었습니다.
뉴스에 크게 한방 맞으면 바로 직효 처방이 되는가
궁금하네요.

어느 시대에도 보수 권력층은 이해타산이 빠르고
우주의 중심이 기득권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글을 깨우쳐 주고 싶은 나랏님의 깊은 마음을 새기면서
아름다운 꿈나라로 갑니더.

정해관님의 댓글

한글날의 유래
한글날 기념식을 처음으로 거행한 것은 1926년이다. 이 해는 1446년 한글이 반포된 이후 8회갑(480돌)이 되는 해였다. 기념식은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와 신민사의 공동 주최로 식도원이라는 요리집에서 거행하였는데 수백 명이 참석하여 당시로서는 성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26년에 기념식을 거행한 날은 10월 9일이 아니라 11월 4일이었다. 이 날이 음력으로 9월 29일이었기 때문이다.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을 책자로 완성했다는 실록의 기록에 근거하여 9월 29일을 반포한 날로 보고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다.

기념식을 거행하는 중에 이 날을 부를 명칭이 있어야 하겠다는 의논이 나왔고 ‘가갸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에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 하면서 배웠기 때문에 ‘가갸날’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아직 ‘한글’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신문 지상 등에서는 ‘가갸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차차 ‘한글날’로 부르게 되면서 ‘한글날’로 굳어지었다.

이처럼 음력 9월 29일에 기념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는 날이 바뀌었다. 1931년에 들어 와서 모든 생활이 양력을 중심으로 삼는 데 비해 한글날은 음력으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1446년 음력 9월 29일이 양력으로는 어느 날에 해당하는가를 계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온 날이 10월 29일이다.

양력으로 지내기 시작한 해는 1931~1932년 무렵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이희승과 이극로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양력 계산 방법은 이미 1931년에 신문 기사로 소개되었고 또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내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런데 한글날의 양력 계산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져, 전문가와 전문 기관에 문의한 결과 양력 계산은 맞지만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는 게 좋겠다는 일치된 의견이 나왔다.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10월 29일이지만, 양력은 1582년 이후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으므로 양력 계산을 그레고리력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날짜가 10월 28일이다. 그래서 1934년부터는 10월 28일에 한글날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극로]의 기록에 따르면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는 기념식을 거행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념식을 주관할 사람들이 모두 감옥에 잡혀갔다.

10월 9일에 공개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인 1945년부터이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된 것은 1940년 7월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에 나오는 기록에 의한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 9월 상한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따라 9월 상한, 즉 상순에 반포된 것으로 보고 9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다시 계산한 것이다. 공휴일로 지정된 것도 이 무렵인데,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