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列傳'에 대한 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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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의 『史記』‘列傳’에 대한 理解
『사기』의 구성은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으로 되어 있다.
본기는 제왕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표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시간적 통일성·연계성을 주로 한 연표(年表)이고 서는 특정한 사회 현상을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이며, 세가는 정치 질서에 있어 제왕의 다음 가는 위치에 있는 제후(諸侯)의 행적을, 그리고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둘러싸고 역사를 이끌어 나는‘개인’(및 이민족)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치사, 특수 분류사(경제사·사상사 따위)라고 부르는 체제는 이미 다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로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의 역사학 부문에 정확하게 해당되지 않는 것은 열전이 있을 뿐인데,이 점이 사실은 문제이다.
사마천의 문장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곧 이 열전이요, 시대 정신 또는 그 시대의 인간상의 상징적 인물을 부각시켜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인간을 탐구하게 하는 것이 곧 이 열전이기 때문이다.
열전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과의 싸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고, 거기에서 공감 또는 위화감을 느껴 가면서 역사의 세계를 자기의 세계와 오버랩 시킬 수 있으며 역사를 읽는 효용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사기』에서는 우선 열전의 대상을 선정하는 데서부터 사가로서의 사안(史眼)이 작용하고,선정 후의 서술에서 인간 탐구자로서의 지혜와 예술가로서의 문장이 힘을 나타낸다.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들에게 『사기』가 단순히 역사서 로서뿐 아니라 문학으로서도 높이 평가되었던 것은 이렇게 볼 때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 인물이 결코 사마천 자신을 말하거나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학과 다르고 허구를 가미한 역사 소설하고도 물론 다르다.
열전은 실재했던 상징적 인간형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게 서술되었다는 데서 문학이며 예술인 것이다.
70권의 열전에는 위로는 재상·장군, 아래로는 시정(市井)의 협객(俠客)·상인에 이르기까지 200명에 달하는 상징적 인간이 제 나름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 하면서 굴곡진 역사의 계곡을 유영(游泳)하고 있다.
한 인간을 보는 사마천의 눈은 때로는 잔혹 무비(殘酷無比)하리만큼 냉정하고 때로는 음흉하다 할만큼 풍자적이다. 이렇게 격동된 음영에 찬 개인의 이야기는 그러나 사마천의 창작물이 물론 아니다.스스로 채집한 고전이나 사료에 거의 충실하게 의거하고 있으되, 원래의 자료를 잘라 옮기고 배열한 묘(妙)가 그의 문장을 생동케 해 주고 있다.여기에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사가로서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만약 그에게서 기술 대상의 운명에 대한 착실한 애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가 써 놓은 인물의 전기에서 한낱 문자의 배열 이외의 것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집요하게 추구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깊을 애정이 행간에 스며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그려 낸 인물과 공감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고, 그것이 곧 나의 경험이 됨을 깨닫는다. 인간에 대한 끈덕진 애정―그것이야말로 이 불후의 사가로 하여금 진정한 사가이게 한 제 1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이 애정이란 물론 사가로서의 객관성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애정은 곧 그 인간이 엮어 내는 역사에 대한 애정 바로 그 것이다.
『사기』130권 중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열전의 맨 앞에는 백이 열전(伯夷列傳)이 놓여 있다.
폭(暴)을 폭(暴)으로써 대하려는 주 무왕(周武王)을 말리다가 뜻이 이루어 지지 않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불의(不義)의 땅에 안주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뫼풀로 연명하다가 죽는다는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백이 열전의 의도는 아니다.
의(義)가 현실에서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인간 세계의 오랜 숙제를 놓고 백이 형제의 그 어진, 그러면서도 연약한 운명에 대하여 무언가 지불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백이와 같은 인간을 기록에 남김으로써 현실보다 더 깊을 차원에서의 가치를 그에게 부여하려 했다는 데서 열전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백이 열전이 그의 열전 전체(全體)의 총론이라고 지목된 까닭도 그것이 열전 전체를 꿰뚫어 흐르는 바를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왕조의 폭정, 왕조의 교체, 시대의 변화, 통치 구조의 형성과 발전, 경제 생활의 양상, 이 모든 것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역사 서술의 주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엄청난 격류에 항거하다가 원 (怨)을 품고 사라진 백이, 숙제 같은 일개 인간의 그 '하찮은' 선의를 누구라서, 그 어떤 사가라서 사마천처럼 진지하게 다룬 일이 있는가.
백이 형제의 그 '하찮은 선의'야말로 역사를 읽고자 하는 대다수의 사람이 갖고 있고, 깊이 간직하고 싶은 소망인데도…….
항우와 유방
사마천이 기술한 개인의 전기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공감과 감동을 주는 곳을 고르라고 말한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항우 본기 (項羽本紀)를 들 것이다.
원래 본기는 제왕의 치적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항목이지만 항우 본기를 비롯하여 고조 본기 (高祖本紀)와 여후 본기 (呂后本紀)의 3개는 열전의 성격과 다름없는 개인으로서의 기술을 볼 수 있다.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서의 제왕의 행적을 기술하기 위해 마련한 본기에 제왕이 아닌 항우를, 그의 행동이 제왕과 같은 위치를 한때 점하였다는 이유만으로 해서 수록한 것 자체가 사마천의 아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안목의 발로이다. 따라서 제왕으로서의 치적이 없는 항우의 경우는 천하의 쟁탈을 위한 유방 (劉邦)과의 싸움 을 중심으로 그 사람됨이 주로 묘사되어 있다.
냉철하고 타산적이고 음흉한 승자 유방에 비하여, 정열적이고 직선적이고, 그래서 빈 구석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패자 (敗者) 항우. 그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갖기 쉬운 인간적 약점을 유방에 비하여 더 많이 가진 사람이었고, 그 인간적 약점 때문에 패한 사람이었다.
항우가 인간적 약점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유방의 강인하고 끈덕진 성격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은연중에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관심이 될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 내재한 두 개의 성향이 숨막히는 대결을 벌이는 곳이 바로 향우 본기이다. 진 (秦)의 시황제 (始皇帝)를 멀리서 바라보고 '저놈의 천하를 엎어놓고야 말겠다'고 내뿜는 것은 항우였고, '사내란 저쯤 되어야지' 하고 차갑게 말한 것은 유방이었다는 이야기를 사마천의 본기의 머리 부분에 실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제왕 (帝王)에의 집념과 그 방향과 차이를 이로써 암시해 주고 있다.
항우와 유방의 극적인 대결의 절정으로 유명한 홍문 (鴻門)의 잔치의 숨막히는 장면은 수세에 몰린 유방의 전전긍긍한 계략과, 우위에 있으면서도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항우가 대조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반진군 (反秦軍)의 총사령관으로서 진의 수도를 점령·약탈·파괴하고 난 다음, 전하를 지배하기 위한 포석보다는 우선 고향에 가서 오늘의 영광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치기 어린 항우의 행동에서 우리는 더욱 보통 사람들과 통하는 '인정'을 발견하는 한편, 먼저 입성하여 그것을 마음껏 노략하고 싶었으나 장량 (張良)의 계략으로 그것을 참고 진나라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유방에게서 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넘어선 인간의 의지를 볼 수 있다.
'비단옷은 남에게 보이고자 입는 터인데 그걸 밤길에 걸치고 가겠는가'라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항우의 태도에서 이미 천하의 지배권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암시한 사마천은 그 뒤부터는 싸울 때마다 승세에 있으면서도 끝내는 패배하고 자결까지 해야 했던 항우의 전략의 만가(挽歌)를 조용하면서도 따뜻하게 서술하고 있다.
감히 자기에게 맞서고자 나선 자에겐 한 번 눈을 흘기기만 해도 멀리 도망가게 만들었다는 항우는 유방에게 일대일의 대결을 호소하는 '어리석은' 자이기도 하였다.
우리 두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항우에게 '난 지략으로 싸울지언정 힘으로는 싸우지 않겠다.'고 차갑게 답하는 유방은, 부모를 가마에 넣어 끓여 죽이겠다는 항우의 협박을 받고도 그 국물이나 한 그릇 달라고 받아넘기는 위인이었고, 위급한 도망길에는 한 수레에 탄 처자를 수레 밖으로 밀어 내는 비정한 권력 추구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사태가 불리함을 천명 (天命)으로 돌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다시 일어나기를 권하는 촌로 (村老)의 따뜻한 권유를 ' 무슨 낯으로…'라고 사양한다.
그는 절대 절명의 궁지에서도 '보라! 내가 싸움에 약해서 진 것이 아님을 보라! 나를 추격 해 오는 저들 수천 기병을 우리 이십여 명 기병으로 분쇄해 놓겠다. 내가 진 것이 나 자신의 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천명인 것을 보여 주마. '고 소리치며 미친 듯 적군을 파괴하는 연약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싸움의 소용돌이를 담담하게 기술해 가는 사마천의 문장은, 그러한 담담한 기술 가운데에도 전류와도 같은 짜릿한 자극을 줌으로 써 비극의 마지막 장면을 기막히게 처리하고 있다. 유방군에게 쫓기다 길을 잃은 항우가 한 농부에게 길을 물을 때, 농부는 길 아닌 커다란 수렁 쪽으로 거짓으로 가르쳐 줌으로 써 항우를 곤경에 빠뜨린다.
여기서 사마천은 이야기의 전개에만 정신을 팔지 않고 그 이야기가 여사의 무대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 쟁란(爭亂)에 대한 민중의 태도의 한 단면을 그려 주고 있다.
이 구절은 '길을 잃어서 한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는 왼쪽으로 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큰 연못에 빠지게 되었다 (迷大道 問一田父 田父 砠曰 左左乃陷大澤中)'란 지극히 간결한 몇 마디뿐이다. 이 중 특히 '左左'라는 표현은 이미 선인도 그 묘미를 지적한 바 있는 명구로서 '왼편으로 가라' 응 左를 두 개 연이어 놓은 그것만으로도 이 농부의 격한 감정과 이 농부에게 길을 묻는 정경이 남김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왼편으로 가라'는 한 마디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정경이 '左' 한 자(字)를 첨가함으로써 생동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재기를 권하는 촌로 한 사람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말을 내어 주며, 차마 그것까지 죽일 수 없다고 한 이 '여자 같은 호용'의 사나이. 그는 몸에 10여 군데의 상처를 입은 채 자기를 뒤쫓는 한 (漢)나라 병사를 뒤돌아보고서 는 '넌 내 부하였던 자가 아니냐. 이왕이면 너에게 덕이나 입혀 주마' 하고 자결하여 일생을 마치고 만다.
실로 항우군을 쫓는 한나라 병사의 상당수는 한때 모두 항우의 부하였으나 유방과는 달리 개인적 자신감에 충만한 반면 사람을 기르고 거느리는 능력이 없던 항우 밑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넌 내 부하가 아니었더냐' 하는 한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항우가 패배하게 된 근본 원인을 총괄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은 사마천 아니고서는 어려운 문장 구조의 묘라 할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자기 아버지에게 "전에 아버님께서, 형은 착실히 농사일을 보지만 저는 할 일 없이 돌아다닌다 해서 꾸짖으셨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가 더 벌이를 많이 했습니까?"라고 유방은 묻는다.
이렇게 물음으로써 아버지의 입을 틀어 막아 옹졸한 쾌감을 얻으려 했던 유방의 졸부적 천박성이 상기될 때마다 느끼는 메스꺼운 입맛은 항우의 전기에서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다.
쉽게 선악으로 따져 나눌 수 없는 두 사람의 상대적인 성격이 한데 엉클어져 엮어 내는 인간의 비극 ― 철저한 비극임으로 하여 더 철저한 희극인 ― 을 역사의 장에 올려 놓고 차분히 빛나는 표현으로 이끌어 나가는 예술가적 역사가로서의 사마천의 재능, 그것은 후세인이 감히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천부의 재능인지 모른다.
그러나 천부의 능력이 없다 하여 역사가가 그를 본받으려는 노력까지 단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낱 인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 그것은 문학의 영역이다. ― 그 인간을 하나의 역사적인 전형 (典型) 으로써, 역사의 의미 표현으로서 파악하고, 탁월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 서술이 인간을 나타내려 할 때 당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것은『사기』를 들출 때마다 느끼는 바이다.
그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이 제 괴테에게 역사가 생동하는 인간의 기록이지 쓰레기통이나 폐품 창고가 아님을 과시 할 수 있을 것이고, 역사가 독자를 사이비 사가의 손에서 되찾을 수 있다. 그래야만 역사학이 가져야 할 정당한 영향력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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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예수님보다 100여년 앞선 인물로, 그로부터 2,000여년 전후의 중국 역사를 상상을 초월한 대작으로 남긴 역사가이자 문필가 입니다.
좋은 말도 몇번 반복해 들으면 '식상'하기 마련 입니다만, '시작햇으니 어찌 합니까?'
우리들은 지금 지극히 작은 '우리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우리 <가정회의 史記>로 만들어 보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메아리 없는? 웨침'을 듣고 계십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사마천 같은 불굴의 의지와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의인이자 선각자를 오늘날 기대하는 일은 가이 '緣木求魚'라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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