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分과 實利 (實理) : 金尙憲과 崔鳴吉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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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分과 實利 (實理) : 金尙憲과 崔鳴吉의 경우
1. 丙子胡亂 당시의 金尙憲과 崔鳴吉
-후금과 명 사이에 중립 외교를 지향하던 광해군이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게 되자 친명배금의 외교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정책은 점차 세력을 강화하고 있던 후금을 자극해 결국 호란을 야기하였다.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쟁할 뜻을 밝혔지만 점차 전세가 불리해지자 내부에서 주전론과 주화론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때 청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을 주장한 대표 인물이 김상헌이며, 항복을 하여 전쟁을 중단시키자고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 최명길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에 항복 문서를 보내고 국왕인 인조가 청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며 항복하였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모두 서인 계열로 광해군 때부터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성향은 이 때부터 차이가 나 최명길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김상헌은 명분과 의리라는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하였다. 그래서 인조반정이 일어날 당시에도 최명길은 반정에 적극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김상헌은 의리를 중요시하여 가담하지 않았다. 이들의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은 결국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격렬한 대립을 맞게 되었다. 청과의 계속된 전쟁이냐, 항복하여 전쟁을 중단시키느냐는 선택에서 김상헌이 선택한 것은 명분과 의리를 지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랑캐가 세운 국가인 청에 항복하는 것이나 끝까지 싸우는 것이나 어차피 조선이 망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명을 배신하고 청에 항복하는 것은 예의와 삼강을 다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미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상헌의 주장은 힘든 상황일수록 명분과 의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당시로써의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국력은 쇠약해졌고 백성들은 지쳐 있었다. 여기에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민생은 파탄나게 되었으며, 청의 압도적인 군대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결국 김상헌의 주장은 자신의 신념을 지킨 개인으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으나, 국가 전체나 백성들의 상황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었다.
한편 최명길은 청군에 대한 대응책은 오직 강화와 싸움 둘뿐인데 싸우자니 힘이 미치지 않으므로 가장 유리한 조건일 때 강화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도 유교적 명분과 의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이를 굽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과의 강화 이후 최명길은 김상헌과 같은 뜻을 가진 선비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패전국이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히 해결해 나갔으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전후 복구에 힘썼다. 이렇듯 개인적인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를 위해 명분에 사로잡히지 않은 최명길의 주장은 국가와 민생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blog.daum.net/ymkwon57/651에서)
♣ 명길이 처음에는 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되자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하였다. 상헌도 처음에는 또한 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집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상헌이 시를 짓기를,
양대의 우정을 찾고 / 從㝷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 / 頓釋百年疑
라고 하고, 명길이 시를 짓기를,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 / 吾道如環信所隨
김상헌은 모함(?)에 의해, 최명길은 명나라와 간첩을 주고받은 일 때문에 청나라에 의해서 심양의 감옥에 수감생활을 하였다. 두 사람은 벽 하나를 두고 맞은 편에 수감된 모양인데, 그 때 위와 같이 두 사람이 서로의 참뜻을 알고 화해하고 양 집안도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절개와 실용주의가 서로의 가치를 서로 알아본 대표적인 미담으로 오늘날에도 널리 이야기된다.
2. 國難. 法難(종교 내에서의 위기 혹은 변화)에 처한 자세
개인이든 나라든 종교든 항상 변화와 위기를 겪게 마련이다. 이 때 위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대처의 방법 중에서 名分을 택할 것인가? 實利 혹은 實理(實體的 眞實로서의 뜻으로 새김)를 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망설이게 된다. 一擧兩得. ‘도랑치고 가재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그렇게야 된다면 또 그런 길이 보인다면 망설이고 고민할 일이 없겠지만, 세상만사는 반드시 어느 한 길을 택해야 하고 따라서 어느 한 편은 포기하고 희생해야 된다.
그런 까닭에 危機 혹은 變化의 시기에는 고도의 智慧를 필요로 한다.
명분 혹은 實理가 당사자와 가족, 후손은 물론 더 나아가 국가와 종단의 명운이 갈리기 때문이다. 이때 곤혹스러운 사실 하나는 두 길 중에서 다수가 따르는 큰 길이 있고, 반면 소수가 용기를 내어야 가능한 소수의 길이 있는데(위 호란 당시에도 명분을 따르는 김상헌의 척화론이 다수였고 최명길의 주화론은 소수였음), 여기서 우리는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를 두고 또 한번 망설이고 고민하게 된다.
최근 국가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정책에서, 종단적으로도 혼란스러운 갈림길에서 내가 택할 길이 名分이어야 할까 實理이어야 할까를 두고서 생각의 일단을 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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