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벳은 6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수도인 라싸지역 좌측으로 녹색으로 표기된 커다란 땅이 아리지역이다. 그곳에 ‘아리’라고 쓰여진 도시명이 보인다. 아리의 왼쪽아래에 인도의 카슈미르(가섭미라-가라)주가 있고 그 곳의 큰 도시가 스리나가르(스리랑 고개)인데 필자는 2005년경에 그곳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파키스탄 쪽으로 인더스 강이 흐른다. '반공호'라고 써진 호수가 '레'호수이며 이곳이 인도와의 경계이고 그곳에서 라다크로 스리나가르로 이어지고있다.
한국 최초 개최! 국내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시!
현재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베르사이유 궁은 루이 14세 이후 이곳에 머물렀던 프랑스 왕가의 진품 유물들과 작품들을 통하여 그 시대의 찬란하고 화려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입니다.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궁과 협력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은 태양왕 루이 14세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절대 왕정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들을 주된 테마로 하여 유럽 왕실 문화 부흥기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베르사이유의 영광>이라는 주제로 특별히 구성된 본 전시에서 베르사이유 궁의 주인공들이 열렬히 사랑했던 화려한 예술 세계가 눈부시게 펼쳐집니다. 어제 우연히 프랑스사람이 남편인 한국인 부인에게들은 이야기로는 (여자분은 화가이고 남자 분은 미술 평론가입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유물전에 대하여 프랑스왕족이 ‘아리안족’이며 그들이 원래 ‘코리아족’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학술회의의 주제가 되고 있답니다. 프랑스인 그들도 깜짝 놀라고 한국인인 여자분도 매우 놀라운 이야기라고 합니다.
"아리안족은 대체적으로 폴란드에서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커다란 늪지대에서 원래 살았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카스피해 유역과 남 러시아 늪지대에서 살았던 이들이 목초지를 찾아 유럽 소아시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퍼져나갔다."(조킬태 '인도사' 40p)이 아리안족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그 마대 가문이다. 원래 마대(메디아) 사람들은 자그로스 산맥의 우르미아 호수에서 말을 타던 유목 민족이다.(위키 백과) 중앙 아시아에 거주하던 아리안족이 인더스 강 유역으로 넘어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B.C 2000년경부터이다.
그들은 처음에 침략자가 아니라 가축과 가재도구를 가지고 평화적 이주민의 형태로 들어왔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신앙과 생활 습관이 드라비다족과 갈등을 일으켰다. 아리안족은 비록 야벳의 혈통이지만 환웅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문화는 오히려 셈의 전통을 따라서 가부장적인 문화였고 그들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으며 셈의 전통을 따라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여성들은 부정을 탄다고 하여 제사에 참여를 금지하였다. 아리안족에서는 남자에게만 재산 상속권이 있었고 특히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으며 철저하게 일부일처제를 지켰고 간통과 도둑질을 한 죄는 반드시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처음에 유목민으로 들어왔으나 인더스강 유역에 정착하여 차츰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정착 생활에 들어갔으나 드라비다의 음란스럽고 사이비적인 종교와 문명을 증오하여 강력한 기병과 철제 무기로 드라비다를 멸망시키고 갠지스 강에 그들의 세력권을 확고히 잡아 놓고 갠지스 문명을 건설했다. 아리안족은 드라비다의 음란한 종교와 풍습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그것을 영구화하기 위해서 계급 제도(카스트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노아가 '가나안은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한 말씀을 훌륭히 지킨 것이었다. “카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니, 그가 그의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지어다.”(창세기 9장 25절 KJV)
이 카스트 제도를 살펴보면 최고 계급은 제사장이고 아래는 정치적 지도자로 정치가보다 제사장이 우월했음을 알 수 있는데. 왕이 즉위할 때에는 반드시 제사장의 의식을 거쳐야 그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농공 상인의 평민 계급이 있고 그 다음은 최하층으로 수드라(Sudras) 계급인데.이들은 모두 드라비다족이다. 아리아인은 현재의 러시아 남부에서 발생한 민족으로, 푸른눈에 갈색내지 금발 머리를 가진 백인계열 민족입니다. 이 아리아인은 이후 유럽, 팔레스타인, 이란, 인도로 퍼지고 이중 유럽으로 퍼진 아리아인만이 금발에 푸른눈을 유지하게되죠(금발과 푸른눈은 유전적으로 열성입니다. 다른 색을 가진 유전자와 섞이면 후대에 전달되지 않기 쉽죠).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아인, 혹은 게르만인을 위한 제국을 세우겠다며 전쟁을 일으키죠(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치당 수뇌부 중에 저 순수한 아리아인 기준에-금발에 푸른눈에 건장한체격을 가진-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럽이 다 게르만족 후손은 아닙니다. 남부유럽은 라틴족이 주류이지요. 결국 게르만족이나 라틴족이나 둘다 인도어 계열의 아리안 족에서 파생한 것이긴 하지만, 게르만족과 라틴족은 어쨌든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인도·유럽족인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의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로 인한 추위와 주변의 적들 그리고 늘어난 인구로 인해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유럽 아리안족의 조상이 되었고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이란과 인도 아리안족의 선조가 되었다.
이란인의 선조들은 코카서스 산맥과 카스피 해를 통해 들어와 초기에는 지역 영주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현지인들과 동화되었고 결국 다수 종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란으로 유입된 아리안족을 구성하는 가장 큰 종족이 바로 메데족 (Medes,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대족)과 페르시아족(Persian, 구약성경의 바사족)이다. 메데족은 자그로스 (Zagros) 산맥의 동부 지역과 타브리즈와 에스파한까지 이어지는 이란의 서부지역에 살았다. 페르시아족은 크게 세 지역에 정작하였는데 우르미예 호수의 남쪽에서 중서부 자그로스 산맥에 이르는 지역, 엘람의 북쪽 국경선 인근지역과 현재 파르스 주에 자리를 잡았다. 마대는 노아의 아들 중 야벳의 7 아들 중 하나이다. ‘노아’는 한웅이던 ‘황제헌원’으로 보이고, ‘함’은 ‘소호금천’씨로 <금문>에는 ‘현효’씨이며 그의 아들 ‘구스’는 원래 기자箕子의 발음인데, ‘고신’의 발음이 구스 기자箕子로 나므로 기자箕子와 제곡고신씨는 동일인물로 보인다. ‘구스’의 아들 중 유명한 인물이 바로 ‘요임금’이며 그가 성경에는 ‘니무롯’ 수메르 기록에는 ‘님루드’로 기록되어있다. <금문>에는 황제헌원의 아들이 세명 기록되어 있는데 ‘창의’가 전욱고양씨의 아버지로서 황제헌원이 뉘조에게서 낳은 큰아들인데 그가 바로 노아의 아들 ‘셈’으로 보인다. 또한 금문에는 한류韓柳라는 아들이 보이는데 이가 바로 ‘야벳’으로 보이며 ‘한류韓柳’ 현제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한韓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호이고, 류柳는 단군은 버들궁전에서 살았으며 버드나무를 숭배했고 또한 ‘유화’는 ‘버들 꽃’이다. 장당경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고, 오시리스의 상징이 버드나무였다. 즉 하백인 ‘아리’의 상징이 바로 ‘버드나무’이다. 하늘의 별자리로는 류수柳宿이다. 오시리스는 하늘의 별로서는 유숙柳宿에 해당되며, 버드나무는 마치 뱀처럼 꼬여서 자라며 유숙柳宿은 바다뱀자리의 알파성 알파르드이다. 고독한 뱀의 별이라는 뜻이다. 유柳 역시 버드나무를 뜻하고 있다. 바다뱀자리 밑에서 사자좌, 처녀좌의 남쪽과 천칭좌의 가까이까지 도달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히드라가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가 성좌가 되었다고 하며 히드라는 마고신인 ‘가이아’이다. 《마등가경》에는 ‘귀신’이라 되어있고, 《사두연경》에는 부천父天 즉 하느님이라고 되어있다. 기는 토요, 그릇에 해당하며 나무에 해당하며 과자며 피가 된다. 동물로는 경이란 짐승인데 범과 비슷하나 어미를 잡아먹는다. 이란이라는 이름은 서기600년 이후로 사용되는데 ‘아리아의 땅’을 뜻한다. ‘아리아’는 ‘아리’인 큰 강의 신 오시리스를 말하고 있다. 즉 ‘압록(아리)’에 대하여 설명할 때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압록(아리)의 어원을 참고 바란다. 즉 ‘아리안’이란 커다란 강의 신인 하백을 뜻하며 큰 강이나 바닷가에서 살던 족속을 부르는 이름이다. 바로 한류의 7아들중 하나가 마대이다. 셈의 아들인 엘람(Elam)과 함께, 마대는 현재 이란사람들의 조상이다. 즉 아리안이란 실제로는 황제헌원의 아들 중에 한류韓柳의 자손과 셈(창의)의 아들인 엘람(전욱고양)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종족이다. 요세푸스는 마대의 자손들이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서 메대(Medes)라 불려졌었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메대가 언급될 때마다, 히브리어로는 마대(Madai(maday))라고 쓰여졌다. 키로스(Cyrus, 페르시아(바사)제국 건설자)시대 이후에, 메대는 (한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페르시아인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법에 의해서 지배받는 하나의 왕국이었다. - ‘메대와 페르시안인의 법 (다니엘 6:8,12,15)’. 이후에 그들은 간단하게 (메대를 생략하고) 페르시아인들(Persians)로 불려졌다. 1935년 이후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이란(Iran) 이라고 불렀다. 메대인들은 또한 ‘인도에도 정착하였다’. 메데라는 이름은 아시리아에서 발견된 점토판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점토판에 따르면 이들은 아리안인들로 현재 아제르바이잔 주에 살았으며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며 살았고 아시리아, 엘람 왕국 등지에도 흩어져 살았다. 지구상에 폭우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아리에서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세계의 곳곳으로 흩어져 들어가게 되고 그들이 바로 인도-아리안 족의 근원이 된 것이다. 아리안의 어원은 ‘아리사람’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귀족’을 뜻한다. 필자는 ‘라사’에서 ‘아리랑阿里嶺’이라는 식당간판을 보고 매우 놀랐었다. ‘라사’의 좌측에 아리고개인 ‘아리랑’이 있다. ‘아리’의 원 뜻은 한국어로 ‘커다란 강’을 말하는 것이다. 한강의 이름은 ‘아리수’이다. 즉 ‘아리안’이란 커다란 강을 끼고 강 근처에서 생활하던 민족을 뜻하고 이들은 물고기 인간인 루루魯魯들이었다. 티벳이나 네팔쪽의 사람들은 그들의 강에는 물고기가 많이 살고 있지만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가장 높은 산악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갔는데 이들은 모두 커다란 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이들 중 지도자들은 원래 공부를 매우 많이 한 도통한 사람들이었고, 특히 하늘의 별의 움직임에 매우 밝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500년 주기로 찾아오는 파괴자혜성 나비루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 행성의 주기가 찾아올 즈음 목숨을 걸고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플레이야데스 사명》의 증언으로는 당시에 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는 데 모두 아르메니아와 티벳 등 고산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신장공로新藏公路는 세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며, 이 일대는 한랭 건조한 기후에 공기도 희박하며, 기압도 낮다. 최고점인 계산대판界山大板은 해발 6,700m은 산소가 60% 정도 밖에 안 되므로, 그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산반응을 보이고 고산병으로 인해 길에서 쓰러져 죽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아리는 북극 다음으로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아남기에 힘든 지역이라고 한다. 아리阿里는 강당岡塘고원에 속한 지역으로, 티벳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 국토에서 가장 황폐한 지대이다. 아리진阿里鎭은 사천강獅泉河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발 4,300m정도 되는데, 히말라야산喜馬拉雅山, 강디스산岡底斯山과 캐라코룸산喀喇崑崙山의 거대한 세 산에 둘러싸여 있다. 사천하獅泉河는 아리 4대 하천 중 하나로써, 국경지역을 벗어나면 인도의 인더스 강印度河. Indus이 된다. 나머지 세 강은 마천하馬泉河. 브라마푸트라강Brahmaputra, 상천하象泉河 수트레지강Sutrej과 공작하孔雀河 갠지즈강Ganges이다. 이곳 아리지역에 있는 수미산은 불교의 성지로서 불교에서 오랫동안 전설로서 내려오던 지역이다. 수미(카일라스)산은 지구의 중심이 되는 산이라는 뜻인데, 6,638미터의 산으로서 거대한 설산이다. 이 설산은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이 설산으로부터 녹는 눈이 4대강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이 산을 일주하며 참배하기위하여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이 지역을 순례하고 있으며, 이 산은 불교 뿐 아니라, 본교, 인도교, 티벳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곳으로부터 발원되는 인더스강을 따라서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으로 들어갔던 민족이 인도-아리안족이 되고, 서남 아시아쪽으로도 갈리어졌으며 서남아시아에서 터키와 그리스를 통하여 ‘에게 해’로 건너갔고 그들은 유럽인인 아리안족이 되었다. 헬레나 노르벨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에서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라다크는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고장이다. 무엇보다도 깊은 생태적 지혜를 통하여 1,000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왔다.’라고 썼다. 우리문화 중 두레문화와 라다크의 공동체문화는 일치하고 있다. 두레가 있던 시절 신농유업 神農遺業이라고 쓴 두레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농사일을 했다. 길다란 두레 깃발이 바로 사래였으며, 신농유업이란 신농씨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이라는 뜻이다. 라다크는 인도북부 티벳과 국경을 마주하는 도시다. 이곳에서 서쪽에 레 호수가 있는데 이 호수는 티벳과의 국경을 이룬다. 한민족은 아리에서 대 전쟁으로 대홍수가 일어나고 아리고개를 넘어서 레를 통하여 라다크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스리나가르(스리랑 고개)를 통하여 인더스강을 타고 인도양으로 내려오게 된다. 인도, 티벳 파키스탄 국경지역인 카슈미르는 예전에 가섭미라국이었고 줄여서 가라국迦羅國이라 했고 가미라迦彌羅 역시 북천축국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옮겨간 가야국의 이름과 동일하다.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자그로스 산맥에 숨어 살았던 이들이 점차 연합체를 이루며 성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였다. 숨어 지내던 많은 아리아 부족들이 이 연합체에 참여하였다. ‘만나이(Mannai)’라는 이 연합체는 점점 강성해 져서 주변의 적들을 물리쳤고 마침내 기원전 8세기 메디아 왕조(The Medes, BC 750~ BC 550)를 세웠다.
메데 부족 출신의 다여코(그리스어로 ‘데이오케스’, Deioces)는 왕이 되어(BC 728) 많은 부족들이 이 왕조에 참여하도록 부족 회의를 개최한다. 그러나 산악지대로 접근이 어렵다는 이유로 많은 수가 참석하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아시리아와 인접해 살고 있던 부족들로 아시리아의 보복이 두려워 이 왕조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시리아가 건재하던 시기에 시작된 메디아 왕조는 다여코가 50년 동안 (BC 728~ BC 675) 왕으로 메디아를 다스렸고, 그의 후계자 프라바르티쉬(Phrartes, 그리스어로 ‘프라오르테스’)는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다른 적인 스키타이 (Scythians)에 패하게 된다.
프라바르티쉬가 스키타이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후에 메디아는 약 28년 동안 스키타이의 지배를 받는다, 메디아의 새로운 계승자인 호바흐샤트라(Cyaxares, 그리스어로 ‘키약사레스, 재위 BC 628~ BC 585)를 중심으로 스키타이의 지배를 물리치고 이란 고원에서 살던 크고 작은 부족들을 다시 연합하여 아시리아와의 전쟁을 치른다. 바빌로니아도 아시리아와 적대 관계에 있었으므로 메디아 편에 합세하여 기원전 621년에 아시리아를 함락시킨다. BC 20세기 기후 변화와 아리안족의 이동 아리안족이 문명을 이뤘던 지역이 정확히 중앙아시아 어느 지역이며 언제쯤 어떤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30세기 무렵에는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지방, 황화 유역에 관개 농업을 바탕으로 선진 문명권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청동기 제작 기술과 관개 농업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들 문명권과 철기 문명과 기마술을 바탕으로 형성된 아리안족 문명이 각각 어떤 지리적 환경적 조건에 의해 필연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인과관계는 아직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청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이 각기 다른 종족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두 문명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아리안족의 유적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의 유적이 최고(最古)의 것인데 이 유적으로 아리안족의 철기 문명이 다른 농경 문명에 비해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세련된 기마술을 바탕으로 수레와 전차를 만들고 다루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명확한 유적이나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 역사학의 한 줄기로 자리잡지는 못 했지만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관개 농경지역의 정착 문명권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스텝 지역에서는 관개농업 지역의 문명과 다른 문명이 형성되어 두 문명권대가 교류 충돌하면서 고대 이전 역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스텝지역은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목축이라는 생산양식에서 기인한 강력한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북위 50° 지역을 유럽과 아시아를 걸쳐 동서로 길게 뻗은 지역으로 북위 30° 지역의 농경 문화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이질적인 문명대는 고대사회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에도 역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문명 충돌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유라시아 지역의 스텝
아리안족이 BC 20세기 경에 큰 도시 문명을 이룬 투르크메니스탄 카라쿰 사막 지역은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쪽 지방으로 스텝 지방과 몬순 지방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리안족 문명은 북쪽 유목 문명과 남쪽의 정착농경 문명이 교접한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리안족은 유목 문명의 이동성과 정착농경 문명의 체계성을 융합시킬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어 문명 전파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시대 변화의 파장을 일으킨 진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에도 기록된 바빌론 왕국은 아리안족의 일파인 아모리족이 남하하여 세운 통일 왕국으로 대략 BC 17세기 무렵의 아리안족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의 아리안족 남하로 요르단강 서안 지방의 통합이 촉발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으로 구약성서의 설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구약성서는 이집트 왕국을 이룬 햄족과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셈족이 이집트를 벗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이주해 들어갔다가 아리안족의 남하로 핍박을 받으며 다시 정착지에서 쫓겨났던 다이스포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안족의 이동으로 인한 근동지방의 혼란과 격변은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러 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유대인의 수난사를 기록한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서와 인도의 불교, 이슬람의 코란은 아리안족의 종교와 설화가 토착화한 것으로 많은 설화가 이들 성서에 중복되어 수록되어 있거나 사유체계가 유사한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카라쿰 사막의 아리안족 유적지에서 페르시아 지역의 조로아스트교 유물과 동일한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페르시아가 아리안족이 페르시아만 인근 지역으로 남하하여 세운 고대 국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고 인도의 성서 [리그베다]가 산스크리트어로 구전되고 있는 것 또한 인도인이 아리안족이 이동하여 토착민과 융합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로서 서구 정신 문화의 근간은 이미 이 시기에 기초를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지역의 사유체계와 유대교, 이슬람교, 더 나아가 인도 불교의 사유체계와 희랍의 사유체계가 알고 보면 아리안족의 사유체계가 이동 경로에 따라 각각 다른 양태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는 한 뿌리에서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단순화한다고 볼 수 있으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각각 정착농경 문화와 유목 문화를 대표하고 있으며 서구 문화는 중근동 지방의 아리안족 이동에 의한 문화 접변에 의해 그 기초가 놓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유물 유적과 구전 설화를 근거로 고대 시대의 문명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지방, 인더스강 갠지즈강 유역에서 농경문화가 정착한 것은 대략 BC 25세기쯤이며 농경문화는 청동기 제작 기술과 치수(治水) 관개(灌漑)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착 농경문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사회 시스템이 발전한 것이 국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 농경문화는 사회 발전에 기여한 점이 크지만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낳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BC 20세기경 스텝 지역에서 발생한 유목 문화는 철기 제작 기술과 기마 기술을 바탕으로 이동성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강력한 문명을 일으키게 된다. 아리안족은 철기 문명에 의해 성장한 대표적인 족속으로 이들의 이동에 의해 중동지방은 엄청난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아리안족의 이동은 대략 BC 17세기 경에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 몬순 기후의 변화로 인해 중앙 아시아는 인간이 상주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모(사막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기후의 변화가 아리안족의 대이동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의 정설이다. 아리안족은 유목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동성과 개방성으로 인해 정착 농경문화를 쉽게 정복해 들어갔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기후의 변화에 의한 종족의 이동이 세계적 규모의 문화 파동을 일으킨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문화 파동을 살펴보면 한 문명권의 정체성과 역동성이 어떤 원리로 사회 문화 전반을 전화(轉化)시키는지 알 수 있다. 어떤 문명권이 탄생하고 성장한 뒤 쇠퇴해 가는 과정을 살펴 보면 초창기 역동성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에 의해 형성되고 이 역동성이 문명 진보의 원동력이 되었다가 차츰 역동성을 상실하고 체계성과 자기 완결성이 강화되면서 문명이 점진적으로 사멸해 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집트 문명의 발생과 쇠퇴, 페르시아의 성장과 분열, 로마의 성장과 사멸은 이런 경향성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리안족 그리고 게르만족 한반도에 갇힌 승냥이 독일 제3제국 아돌프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이자 아리안 민족주의를 앞세워 유태인들을 학살한 악인이었다. 그러기에 독일인들에게 아리안이라는 민족명은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강하게 각인 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직접적 피해자인 이스라엘 그리고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미국도 독일과 아리안이 연결되어 생각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기에 독일 즉 게르만과 아리안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바라보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아리안은 다들 알 듯이 현재 인도인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또한 이란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란과도 관련이 깊다. 이란은 아리안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앙아시아에서 존재했던 유목민족들을 이란계로 분류한다는 것은 그 들을 아리안으로 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독일인을 아리안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히틀러의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을까? 다소 위험해 보이지만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감히 접근해 본다. 훈족의 유럽침략의 첫 번째 희생자였던 고트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고트족은 동게르만 으로 분류되곤 한다. 다음의 글은 이 정희가 지은 '동유럽사' 27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한편, 최초의 거주지가 동부 스웨덴 지역이었던 고트(Goths)족들이 1세기경에 발트 해 안과 비슬라 강 유역으로 옮겨왔다. 이들은 슬라브 인과 바르타네 인들의 뒤를 따라서 로마 제국의 변경에까지 다다랐다. 다뉴브 강 하류 흑해 쪽으로 향하는, 원시 부족들의 끊이지 않는 이동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옛날 사가들은 유럽 의 진화 발전을 로마인의 관점에서 보아, 카르파티아 산맥을 꿰뚫을 수 없는 장벽처럼 여겼으나, 반유목 반농경적 집단의 이동에는 오히려 유리하기도 했던 지리적 특성을 고 려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특성은 러시아인과 발트해 연안인과의 상업적 교류가 가 능했던 러시아 평원의 수로였으며, 그리스 식민지들은 이 교역의 중개 상인이었던 것이 다. 그리스인들은 러시아 땅에서 활발히 상행위를 전개하여 러시아 수로를 따라 올라가 발트해까지 침투하였다. 저자가 지은 '동유럽사'가 슬라브 민족의 역사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고트족보다는 슬 라브족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트족이 북유럽에서 이동해온 민족이라는 점이다. 발트해와 흑해의 오래된 상업적 교통로를 따라 고트족이 이동해온 것으 로 저자는 보고 있다.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분명 흥미로운 분석이다. 이 책을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하자. 아래의 글은 이 정희가 지은 '동유럽사' 27 페이지 하단에 나오는 글이다. 슬라브 인들이 계속 남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강력한 고트 인들은 흑해 쪽으 로 내려와 세력을 팽창시켜, 마침내 3세기경 아조프(Azov)해 연안에까지 남러시아를 포 함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평화롭게 이 지역으로 침투해온 슬라브 부족들은 다시 이 지역의 새 정복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슬라브 인들이 사르마티아 인의 영향을 고트 인의 영향보다 먼저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은 6세기경의 저술가 조르다 네스(Jorbanes)와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증명에 따라 확인할 수 있다. 고트의 역 사가인 조르다네스는 이 나라의 일부가 드니에프르 강을 건너 키예프 지역 근방에서 당 시 도네츠(Donets)강 유역에 살고 있던 스팔리(Spali)를 공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들을 굴복시킨 후 고트인은 다시 아조프 해를 향해 크리미아 반도을 뚫고 갔다고 전 한다. 북유럽에서 출발한 고트인들이 크리마아 반도를 지나 아조프 까지 다달았다는 것은 우리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들은 과거 스키타이의 주 활동영역까지 진출한 것이다. 고트인 들이 오기 전에 사르마트에게 멸망당한 스키타이는 이후 동쪽으로 이동해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해 사카족이 되어 인도사에 등장하고 일부는 북으로 이동해 사하족이 된 것으로 보여진 다. 고트족의 이러한 이동은 결코 어느 한 순간 우연히 일어났던 것을 아닌 것 같다. 비슷한 예를 러시아의 역사에도 다시 볼 수 있다. 바로 '러시아 논쟁'이 그 것이다. 아래의 글은 김 학준이 지은 '러시아사' 29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노르만 학설 동슬라브족이 민족 이동을 끝내고 정착한 무렵인 9세기께, 대체로 오늘날 우리가 스칸 디나비아(Scandinavia)라고 부르는 북유럽에 근거지를 마련한 해양 민족인 노르만 사람 들이 유럽을 활발히 침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흔히 바이킹(Viking)으로 불린 만인(蠻 人)들이었다. 그들은 노스맨(Norseman) 또는 바랑지안(Varangian)으로 불리기도 했는 데, 러시아어로는 바랴그라고 했다. 유럽의 많은 곳들을 정복한 이 해양 민족은 곧 동슬라브족도 그들의 지배아래 두었다. 그 때가 대체로 우리 역사의 후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 중엽이었다. 바랴그의 수장 (首長)으로 이미 덴마크를 지배한 루리크(Rurik 또는 Riurik, 슬라브표기로는 Norse Hr rekr)가 862년께 북방의 노브고로드에, 그의 부하인 아스콜리드(Askolid)와 디르(Dir) 는 남방의 키예프에, 각각 자리를 잡고 슬라브족을 괴롭혀 온 하자르족의 약탈을 막아 주면서 슬라브족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루리크가 죽은 뒤 그를 계승한 올레그(Oleg)는 882년에 아스콜리드와 디르를 죽이고 키 예프를 장악함과 동시에, 자신도 키예프로 옮겨 스스로 키예프 공후(公侯)라고 불렀다. 그는 키예프를 '루시의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이 곳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 의 슬라브족들을 정복했다. 이 키예프 루시가 바로 러시아 국가의 시작이다. 여기서 말 하는 루시라는 이름은 15세기 후반까지 쓰였고, 그 뒤로는 러시아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면 루시 또는 러시아라는 말의 근원, 곧 어원(語源)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 답은 여럿이 있다. 서방 학계가 제시한 해답들 가운데 하나는, 러스(Rus)라는 말이 핀란 드어로 '노를 젓는 사람(those who rowed)'을 뜻하는 루오치(routsi)에서 나왔고 그것 은 해양 민족인 바이킹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바이킹들이 붉은 머리에 붉은 수염의 차림이어서 라틴어로 '붉다'라는 뜻의 러서스(russus)로 불리었다는 해석이 다. 두 해석 모두 러시아가 바이킹이 세운 나라라는 뜻을 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키예프 루시가 북유럽으로부터 온 노르만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설명을 노르만 학설이라고 부르고, 그 학설을 제시하거나 옹호하는 학자들 을 노르만 학파라고 부른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바이에르(Gottlieb Siegfried Bayer)와 역시 독일의 역사학자인 슐뢰제(August Ludwig von Schl zer)등이 이 학파의 창시자 들로, 그들은 18세기에 이 이론을 내놓았다. 그들의 뒤를 이어 약 200년에 걸쳐 이 이론 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킨 학자들이 나타났으며, 그리하여 이 이론은 학계에서 통설로 받 아들여졌다. 반(反)노르만 학설 그러나 노르만 학설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특히 소련이 건국된 뒤에, 러시아 학자 들에 의해 강력히 부인됐다. 이들을 반(反)노르만 학파 또는 슬라브 학파라고 부른다. 러시아의 기원에 대한 노르만 학설의 주장은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 공국이 바이킹에 의해서 건국되었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러시아에 진출한 바이킹은 노르만족이었다 노르만 족은 북방 게르만족이다. 다시 말해서 노르만 학설은 러시아의 기원을 게르만족이 건국한 키예프 공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주장은 러시아의 주류인 슬라브인 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학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 반노 르만 학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노르만 학설이 통설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키예프 공국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지역 즉 흑해 북부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발트해의 노르만족 바이 킹이 키예프에 공국을 건국했다는 것은 그들이 흑해 북부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수세기 이전의 고트족처럼 이들도 발트해 연안에서 흑해 북부 연안으로 이동 진출 한 것이다. 이처럼 북유럽의 게르만족이 흑해 북부 연안 지역까지 진출한 예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만도 두 차례나 있다.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족을 이란계, 터어키계, 몽골계로 구분하곤 한다. 이러한 기 준으로 구분할 때 스키타이는 주로 이란계로 분류된다. 스키타이가 이란계로 분류된다는 것 은 그들을 유럽인 즉 인도유럽어족으로 본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이란이라는 의미가 아 리안의 나라라는 뜻이기에 이란계로 분류된다는 것의 의미는 스키타이가 아리안이라는 의미 도 될 것이다. 만약 스키타이가 아리안이었다면 과연 그들은 어디에서 이주해온 민족이었을 까? 처음부터 흑해 북부 지역에 살고 있었던 민족이었을까? 아니면 고트족이나 노르만족처 럼 북유럽에서 이주해온 민족이었을까? 아무도 그 답을 모르기에 더 더욱 궁금할 뿐이다. 고트족이 과거 스키타이의 영역이었던 아조프해 연안까지 진출했었다는 사실은 그러기에 더 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래의 글은 정 병조가 지은 '인도사' 35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아리안(Aryan)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원래 그들은 시베리아 남북과 투르케스탄(Turkestan)등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다. 기원전 17,8세기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13세기경 에는 인도 대륙에 침입한 것으로 보인다. 유목 생활이기 때문에 목초지를 따라 끝없는 방랑을 거듭했던 것인데, 그 진로는 주로 서부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일대를 관통했던 것이다. 아리안은 오늘날 서양인의 선조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서 슬라브에 이르기까 지 유럽을 지배한 서양인의 선조가 바로 이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이 서양인의 선조라는 가설을 정형화시킨 이는 비교 종교학자였던 막스 뮐러(Max M ller)였다. 그는 고대 인 도의 언어였던 산스크리트(Sanskrit)가 영어의 어원임을 입증하였다. 종래 그리스 (Greek), 라틴 등의 어원에 대한 연원을 밝힌 셈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의 최고신인 천 신은 드야우스(Dyaus)라고 한다. 그리스의 제일신인 제우스(Jeus)와 동의어이다. 즉, 그 들은 동일한 민족이었으나, 신에 대한 견해의 차이 등으로 말미암아 둘로 나뉘게 되었 다. 그 일파는 중동,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일파는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대륙으로 침입해 온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리안은 피부가 희고 코가 높으며, 키가 큰 골격이다. 인도의 원주 민인 드라비다 인과의 혼혈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 다. 실제로 현재 쓰고 있는 영어라는 문자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산스크리트적 영향을 들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제 산스크리트가 영어의 어원이라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 이고 있다. 위의 글을 보면 작가가 많이 고민하고 쓴 글이라는 것이 보인다. 아리안족의 출발지를 시베 리아 남북과 투르케스탄으로 본 것은 아마도 아파나시예보(Afanas'evo, B.C. 2500∼1700) 문화와 안드로노보(Andronovo, B.C. 1700∼1200)문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투 르케스탄이라고 본 이유는 기원논쟁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러한 설명은 다소 모호하며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도 북쪽 어 디에선가 이주해온 아리안의 민족이동을 이해할 때 우리가 꼭 고려해야 할 두가지 있다. 바 로 우랄산맥과 카스피해이다. 우랄산맥은 오랜 기간 동서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었다. 만약 아리안족에게서 서양인의 흔적이 보인다면 그 들은 아마도 우랄산맥 서쪽에서 이주해왔을 것이다. 또한 카스피해의 서안(西岸)보다는 동안(東岸)을 거쳐 이주해왔을 가능성이 더 크 다. 만약 카스피해 서안을 거쳐 이주해왔다면 티그리스, 유프라스테스 강 상류를 거쳐 이동 해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접촉했을 것이고 그 들의 역사에 일 부라도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은 다소 인도 중심적이다. 어느 역사서나 자국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결코 잘잘못을 탓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상식을 가지고 봤 을 때 약간의 빈틈이 보이기에 이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작가는 아리안이 모든 유럽인의 기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2000년이 되어서야 인류 사에 등장하는 민족이다. 이 민족이 유럽인의 조상이라면 기원전 2000년 이전에는 유럽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서술했음이 분명해 보이지만 다소는 허술한 점도 엿보인다. 문화적 기원과 혈연적 기원을 다소 구분했 으면 한다. 다른 하나는 영어의 기원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찾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부정하 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약간의 빈틈이 있다. 바로 문자와 언어의 구 분이다.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나 영어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해서 유럽의 언어가 아리안 의 언어에서 파생되었다는 논리는 다소 빈약해 보인다. 양쪽의 상관관계를 부정하기는 어렵 지만 양쪽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보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아마도 히틀러가 게르만족 의 기원을 아리안에 찾은 근거도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유럽에서 출발하여 흑해 연안을 거쳐 카스피해 북부를 지나 왔나 아니면 시베리아 남부에 서 기원하여 인도로 그리고 유럽으로 이주했는지 아리안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게르만족에게서 아리안족이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아리안족에게서 게르만족이 비 롯되었는지 하는 다소 유치한 이분법적 구분의 해답이 될 것이다. 참고가 될 것으로 보여 아래의 글을 옮긴다. 다음의 글은 세계사신문 편찬위원회가 지은 '세 계사신문 1권' 27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20세기 아리안인 원조 논쟁 <1935년 독일, 이란> 아리아인이 유라시아를 휩쓴 지 4천년이 지난 지금 유럽과 이란 사이에 난데없는 아리아인 원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반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벌어지고 있어 한층 뜨겁다. 양측의 주장을 소개한다. ●히틀러(독일 총통): "아리아인이란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백인종을 말하며 그 중 가장 순수한 혈통은 우리 게르만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지 니고 있다. 반면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인 유대인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 육을 실시해도 그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이 개선되지 않는다. 가장 순수한 아리아인 인 우리 독일의 게르만인은 열등민족의 해악에 전염되는 해악에 전염되는 걸 막기 위해 서라도 그들을 격리하거나 절멸할 권리가 있다." ●레자 샤(이란 왕): "우리 아리아인이 고대문명을 재편하고 있을 때 변두리 야만인이던 게르만인은 순수 아리아인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생떼쓰는 그들이 가엽기도 하지만 그 저의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지금 유대인을 겨냥한 인종주의의 정체는 제국주의이 며 그 칼끝은 우리 서아시아를 포함한 비유럽세계를 난도질해왔다. 위대한 아리아인의 정통성은 우리 이란('아리아인의 나라')에 있으며 우리는 서아시아인들과 합심하여 사이 비 아리아 우월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음모를 분쇄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 주: 이란은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로 부르지 말도록 세계에 요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