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8. 이성계의 위화도 回軍과 朝鮮의 建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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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8. 이성계의 위화도 回軍과 朝鮮의 建國
1. 과정
우왕은 서경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24일(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6월 11일(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과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6월 26일(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평양에서 송도(松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반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7월 4일(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 고양)에 귀양 보내졌으며,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당하였다.[1][2]
2. 결과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는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 중에서 급진 개혁 세력이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적 계단이 확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4세기 말엽에 있었던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탈을 격퇴시킨 이성계 등의 무장들을 주축으로 하는 신흥 무인 세력들은 친원 권문세족과 온건개혁파에 대항하기 위해 성리학, 신유학을 수입하여 학식을 연마해 중앙 정계로 진출한, 급진 개혁의 성향을 띈, 친명 신진 사대부들과 연계하여 기존의 정치 세력(우왕, 최영)을 숙청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기반을 공고히 한 이후에, 과전법을 실시하여 후에 개국공신이 되는 신진사대부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며, 1392년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를 요구하여 조선을 개국을 하게 되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사건에 대해서는 후대에 나온 평가로 찾아 볼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자 문신이고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신돈이 나와 왕실의 맥을 끊은 것은 불교 때문이었고 고려가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하였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강원도 간성(杆城)에 있는 공양왕의 무덤을 본 감회를 「간성릉을 지나며」에 남겼는데 이런 구절이 시가 전해진다.
주나라 여불위가 제위를 바꿔쳐서(奏家不韋移神器) / 함곡관 천하를 자영에게 주었지(函谷山川付子嬰)
신돈의 자손이 고려의 거짓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불위(呂不韋)가 자기 아이를 밴 애첩을 진왕(秦王) 자초(子楚)에게 넘겼고 그 아들 자영(自嬰)이 진시황(秦始皇)이 되었다는 고사에 견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와 정몽주 등이 신씨(辛氏)를 몰아내고 왕씨(王氏)를 세운다는 일명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은 창왕(昌王)을 내쳐 정창군(定昌君)을 공양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데 남효온은 정창군까지 신돈의 내림으로 보았던 것이다. 조선의 『동국통감』은 '고려의 정통은 공민왕 23년(1374)에 끊겼다'고 전하고 있다.
3. 요동정벌 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4. 논란
느린 진군 속도는 고의적이었는가?
당시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19일이 걸렸고, 위화도에서 14일 체류하였으나 회군에 9일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들어 이성계는 출병 때부터 고의로 병력을 느리게 진군시켰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회군 시에는 “사냥을 하면서 속도를 늦췄다.”고 하는데 전해지듯 2배 이상 빠르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논란이 되었다. 죽고 사는 급박한 상황에 사냥을 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과연 고의적이었을까?
회군은 우발적인가? 계획적인가?
현재도 위화도 회군이 우발적이다와 계획적이다로 주장이 나뉘어 있다. 당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한 쪽에서는 당시 고려 말, 민중들의 생각과 사회 정서를 반영한 것이 위화도 회군이었다고 정황을 이해하는 반면,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측의 권력을 잡기 위한 계획적인 행보로 보는 것이다.
요동정벌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당시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은 '10만명', '5만명', '3만8천명' 학자들의 주장이 각각 다르다. 실록에는 5만명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를 기준으로 가정해본다.
학자들은 논한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명나라와 한판 붙어 생사를 걸자는 뜻이 아니라 '요동의 주인은 고려이다'라는 의지를 보여주자는 결의, 즉 당초 명나라에 고려의 생각을 전해주고 철군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만리장성 밖의 땅은 원래 고려의 땅이었으며 남경에 근거지를 확보한 명나라가 요동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에서였다. 이는 증원군을 준비하지 않은 것에 여실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요동정벌이 됐다면 고려는 중국의 관할에서 벗어나 이후는 동북아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학자들은 논한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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