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7. 최씨 무인정권의 展開와 沒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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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7. 최씨 무인정권의 展開와 沒落
1. 최씨정권의 수립과 지배기구
이의민 정권까지와는 달리 최충헌이 등장하면서 최씨정권은 독자적인 권력기구를 바탕으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한 전형적인 무인정권으로서의 면모를 지녔다.
그는 정치 경륜이 없이 탐학을 일삼던 이의민 일파를 제거한 다음, 왕에게 10개조의 개혁상소를 올려 의종 이후 무너진 정치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등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최충헌은 사원세력을 억압하는 한편 농민과 노비 그리고 향․소․부곡의 주민들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관작을 주기도 하고 자유민으로 해방시켜 주기도 하였다. 또 무신 난 이후 크게 위축된 문신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이규보,진화 등과 같은 문신을 우대하였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무신,농민,노비 등의 반항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이를 진압할 필요에서 강력한 독재적 통치기구를 만들고 무단정치를 펴갔다.
최충헌 정권의 중심기관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이라는 막부였다. 그는 인사․재정․감찰권을 지닌 이 기구의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권력을 틀어 쥐고 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명종과 신종을 쫓아내고 희종과 강종,고종을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형식상으로는 왕권을 유지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은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
최충헌은 독재권력을 뒷받침하는 무력기반으로서 경대승이 만들었던 도방을 더욱 확대하여 수천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세력을 위한 경제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가 진강후라는 벼슬을 받고 흥녕부(興寧府)라는 기구를 개인 집에 설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토지가 비옥한 진주지방에 대한 경제권을 장악하였는데, 이러한 경제력은 뒷날 몽고침략군과 대항하는 데 중요한 물적 기반이 되었다.
1219년 20여 년간 집권하던 최충헌이 죽자 권력은 그의 아들 최이에게로 돌아갔다.
최이는 도방의 무력기반 이외에 경찰 기능을 맡은 야별초를 설치하고, 뒤에 몽고와의 항쟁 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 온 이들을 신의군으로 조직하여 이른바 '삼별초(三別抄)' 라는 또 다른 무력기반을 만들었다. 최이는 또한 교정도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으로 최충헌보다도 더 한층 문사를 우대하고, 자신의 집에 정방이라는 인사기구와 서방이라고 불리는 문인숙위소를 만들어 많은 문신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문무양반의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한편, 최이는 마침 몽고의 침략이 시작되던 무렵에 집권하였으므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껴 삼별초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최이는 강화된 통치기반과 국방력을 바탕으로 몽고와의 43년 항쟁을 벌이다가 1249년 집권 30년 만에 죽고, 정권은 다시 그의 아들 최항, 최의에게로 차례로 이어졌다.
2. 무신정권 때의 사병양성
무신집권기에 무신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여러차례 계속되면서 무신들은 국가의 공적 군사 외에도 사병을 필요로 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사병의 강약이 정권장악에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런데 무신정권기에는 사병과 공적 군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가의 공적 군사조직에 속해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무신개인에 종속되어 그 명령을 받고 행동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무신란 이후에 무인들은 저마다 문객(門客)과 가동(家僮)을 무장하여 이를 사병화 하였다. 문객은 권신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봉건적 가신에 흡사한 무리들이며, 이들은 주인인 권신의 후원을 얻어서 관리로도 출세하였다. 가동은 사병의 성격이 가장 강한 집단으로,이들은 때로 주인의 위세를 믿고서 불법을 저질렀고 이 때문에 많은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존재했던 이유는 가동이 무신집권자 개인의 권력유지에 가장 중요한 사병집단이었기 때문이다.이렇게 문객을 상층으로 하고 가동을 하층으로 하는 사병집단은 경대승의 도방에 이르러 조직화되었고, 그것이 최충헌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이 외에도 최이는 마별초를 두었다. 마별초는 최우가 무력장비역할로 설치한 기병대였다. 그렇다면 같은 사병으로 그와 상대되는 입장에 있던 도방은 보병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해 진다. 결국 최우는 종래의 보병부대인 도방에다가 기병인 마별초를 추가 설치하여 자기의 두 날개를 삼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그의 무력장비가 한층 강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도방과 아울러 군사적 배경을 이룬 것은 삼별초(三別抄)이다. 삼별초는 1219년 최우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우별초로 나누고, 몽고병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 이를좌,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인 요소도 있었으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고병을 괴롭혔고,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3.무인정권의 대몽항쟁
1231년 고려 고종 18년에 1차 침입하였고, 살례탑(撒禮塔)의 약탈과 살인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굴욕적인 화친으로 많은 물자를 주었다. '다루가치(총독)'라는 몽고 관리 72명을 12곳의 큰 고을에 배치하였다. 1232년 몽고가 물에 약함을 알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에 살례탑이 2차 공격하였고,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한강이남으로 남하하다가 용인의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에 살리타이가 죽음으로 급히 퇴군하였다.
고려가 신하의 예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1235년에 3차 침입하였으나 고려의 정벌이 어려움을 알고 철수하였다. 실권자 최이의 아들 최항이 왕과 함께 개경으로 나오지 않고 항명한다는 이유로 1252년에 4차 원정하였다. 고종이 적장 야굴을 만나 화의를 맺었고 몽고의 내분으로 급히 돌아갔다. 1254년 몽고에 항거한 관리와 가족을 죽이지 않는다고 몽고의 원수 차라대가 5차 침입하여 왕이 개경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듣지 않아 충북과 경북 방향으로 남하를 계속하면서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몽고군은 어느 때보다 잔인하게 백성을 죽이고 남녀 20만 명을 잡아갔다. 강화의 조정은 피해가 없는 대신 백성들이 그 고통을 당하였다. 몽고의 친정을 받아 드리지 않아 차라대가 1255년에 재침하여 호남 방면으로 남하하다가 되돌아가고 1257년에 다시 쳐들어 왔으나 친정은 계속 거절하였다. 문신들이 난을 일으켜 최충현의 무신세력인 4대 최의를 죽여 60년의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 왕이 정권을 다시 잡게 되어 이것을 '왕정 복구'라고 한다. 1259년 고종은 아들 태자를 쿠빌라이에게 보내어 화의 청하였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외교파견이다. 태자가 떠난 뒤에 고종은 죽어 몽고에서 돌아와 강화도에서 왕위에 올라 24대 현종이 되었다. 1264년 고려 현종이 쿠빌라이를 만나 간청으로 몽고는 다루가치를 철수하여 평화가 찾아왔다. 1270년부터는 자비령(황해도)이북은 '동녕부'을 두어 몽고가 직접 다스렸다. 몽고는 제주도 '탐라 총관부'를 두어 그들에게 말을 키우게 하였다. 이것이 제주도 말이 많은 원인이 되었다. 1274년 고려 충렬왕 1년 몽고의 명령으로 준비한 일본원정은 김방경장군과 몽고 연합군 2만5천명으로 구성하여 1차로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왜구에 대한 보복심으로 열심히 싸워 몽고군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하카타만에 머물다가 태풍으로 1만3천이 죽고 철수하였다. 2차 정벌은 1281년 고려에서 4만 명에 배 900척, 남송에서 10만 대군과 배 3500척이 출발하였다. 하카타만에서 태풍을 만나 싸워보지도 못하고 2만 명 정도만 살아왔다. 섬나라 정벌의 어려움을 알게 된 원 세조는 3차 원정은 포기하였다. 이 때에 일본을 지켜준 태풍을 '가미카제'라고 한다. 명나라가 원을 멸망시킴으로 고려가 98년만에 몽고지배에 벗어났다.
4. 삼별초의 대몽항쟁
1258년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고와의 강화로, 이를 주장한 국왕과 문신관료들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후에도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서, 몽고와 재대결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하여 원종을 폐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왕실의 외교 활동과 몽고의 압력으로 실패하였고, 원종은 몽고군의 지원하에 개경환도를 단행하였다(1270). 이리하여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기에 이르렀지만, 이번에는 무인과 연결되어 있던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기치를 들고 봉기하였다.
대몽항쟁에서 삼별초는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1270년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를 단행하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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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선님의 댓글
좋은 내용 열심히 보았습니다.
고려멸망과 원나라지배를 자초했던 최씨무신들의 권력무상이 덧없음을 새삼 느껴봅니다.
고향이 진도이다보니 삼별초사건은 좀 많이 알고 있지요.
유명한 진도개도 그 당시 몽고에서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고.....
진도에도 제주처럼 말을 대량으로 방목 사육했던 곳이기도 하구요.
당시 진도는 허명무실한 고려조정보다는 몽골에 과감히 맞섰던 또하나의 고려가
자리잡고 있던 역사적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답니다.
왕궁으로 지은 용장산성과 말을 길렀던 관마리,그리고 왕온이 묻혀있는 왕무덤과
왕의 목숨을 논하던 논수골이며...남도석성유적등....
제주에 항몽유적비가 있지만 진도에 그 유적비가 세워졌어야 마땅한일인데....
당시 고려조정이 삼별초와 하나되어 몽고군을 제압했더라면 고려역사는 위대한
역사를 쓰지않았을까 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느껴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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