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5. 정중부의 난 [鄭仲夫 ― 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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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時代의 最高權力 追求慾과 展開樣相-5. 정중부의 난 [鄭仲夫 ― 亂]
경인년(庚寅年)에 일어났다고 해서 '경인의 난'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 문반과 무반은 모두 1~9품에 이르는 단일 관계체제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되어 양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문반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했다. 이에 반해 무반은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지는 등 외면적으로 문반에 비해 경시되고 훨씬 세력이 미약했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배경 외에 10~11세기 이래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발생되는 부가 대부분 문반귀족층에게 독점되고 있었다. 즉 문반귀족층은 고리대와 토지개간·토지탈점, 대외무역 등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갔다. 이러한 사회·경제 상황으로 인해 민의 대규모 유망현상이 일어났으며, 군인들은 군인전(軍人田)조차 문반정권에 탈점되어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제18대 毅宗(의종)은 문신들과 함께 유락으로 세월을 보냄에 따라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국가재정이 낭비되었으며, 백성들로부터의 착취가 가중되었고, 무인들에 대한 천대도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1170년 8월 무인인 대장군 정중부는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가게 되었을 때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와 함께 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왕이 보현원에 가는 도중 5문(五文) 앞에서 시신(侍臣)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무인으로 하여금 오병수박(五兵手博)의 놀이를 하게 했는데, 이때 문신 한뢰(韓賴)가 놀이에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는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정중부는 얼마 전에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자신의 수염을 촛불로 태웠던 일을 생각하고는 분노하여, "이소응은 비록 무인이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찌 그리 욕을 보일 수 있느냐"며 한뢰를 나무랐다. 그리고 저녁 때 왕의 가마가 보현원에 가까워지자, 이고·이의방과 함께 거짓 왕지(王旨)로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왕을 호종한 한뢰를 비롯한 문관 및 대소신료(大小臣僚)·환관(宦官)을 몰살했다. 무인들은 다시 개경으로 군졸을 보내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많은 문신이 화를 입었다. 무인들의 무자비한 학살에 당황한 의종은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고, 그밖의 무인들도 상장군은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 대장군은 상장군에 가하여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왕을 환궁(還宮)시켜 군기감(軍器監)에 옮기더니, 마침내 거제도(巨濟島)로 내쫓고 대신 왕제(王弟) 익양공(翼陽公) 호(晧 : 명종)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새로 즉위한 명종에 의해 벽상공신으로 봉해지고, 정사를 좌우했다.
※ 거제현으로 떠난 의종은 1173.8까지 그곳에서 머물다가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일어난 김보당에 의해 경주로 옮겨갔다. 그러나 김보당이 거병에 실패하자 2월 뒤인 10월 경신일에 이의민에 의해서 곤원사 북쪽 연못가에서 살해됨으로써 향년 4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난으로 많은 문신이 살육되고 대신 무인이 집권하여 군사권은 물론이고 문인의 직능이었던 정치권·행정권까지 독점했으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문신인 문극겸(文克謙)·이공승(李公升)·서공(徐恭) 등을 기용하여 국정에 관하여 자문을 구했다. 정중부의 난을 계기로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무인정권시대가 지속되었다.→ 武人政權
♣武人政權 : 고려시대 무인들이 집권하여 이끌었던 정치체제.
1170년(의종 24)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1270년(원종 11)까지 약 1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무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이전과 같이 국왕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외형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실제로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은 무인정권기를 특징지어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무인집권기에 이르면서 국가의 공병(公兵) 조직이 제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그 대신 도방(都房)·서방(書房)과 같은 기구들을 통하여 사병(私兵) 조직이나 가신(家臣) 집단이 당시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고, 그것이 무인정권을 지탱해주는 물리적·인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면서 이전의 재추(宰樞) 체제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중방 (重房)·교정도감 (敎定都監) 등과 같은 무인들의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통하여 국가의 주요한 정책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도장치를 통하여 무인집권자들은 1명의 국왕(의종)을 살해하고 2명의 국왕(명종·희종)을 폐위시키는 등 당시 정치적 실권을 독점했다. 한편 고려 초기 이래 관료들의 물적 기반이 되었던 전시과체제가 붕괴되고, 농장의 발달 등 대토지소유 현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토지탈점과 겸병이 횡행했다. 이러한 변화는 무인정권이 성립한 직후부터 나타난 대표적인 현상들로, 한국사에서 12세기말에서 13세기말의 1세기 간을 무인정권기로 구분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현상이었다.
♣ 고려 4대 광종대 이후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고려사회는 통일전쟁의 과도기적 관료체계에서 벗어나 문신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한다. 이 같은 관료체제는 무신의 최고 품계를 정 3품 상장군에 한정시켰고, 이 때문에 전쟁 상황 속에서도 무신은 언제나 문신 출신 상원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소손녕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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