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7대 불가사의(각론) :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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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7대 불가사의(각론) : 만리장성
① 중국 만리장성 (Great Wall of China)
② 페루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Machu Picchu)
③ 브라질 거대 예수상 (Christ the Redeemer statue)
④ 멕시코 치첸 이차의 마야 유적지 (Chichen Itza)
⑤ 로마 콜로세움 (Colosseum)
⑥ 인도 타지마할 (Taj Mahal)
⑦ 요르단 고대도시 페트라 (Pe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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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만리장성 (Great Wall of China)
1) 개요
<만리장성 (2004년 여름)>
만리장성 (팔달령에서 본 만리장성)
줄여서 장성이라고 하며, 중국인들도 만리장성이라 부르지 않고 장성이라 부른다. 현재 남아 있는 장성의 유적은 허베이 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에서부터 간쑤 성(甘肅省) 자위관에 이르며 지도 상의 연장은 약 2,700km이지만, 기복이 있거나 중첩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총 길이 6,351km에 달한다. 그 거대함 때문에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고 거론되었으나 2004년 12월 8일 중국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 스포츠 국가대표팀의 별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 역사
시대별 만리장성의 축조도
3) 진한(秦漢)대의 장성
장성의 기원은 춘추 시대의 제(齊)에서 시작되어 전국 시대에 들어오면 초(楚)·위(魏)·연(燕)·조(趙)·진 (秦) 등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중원(中原)의 제국(諸國)이 모두 국경에 북방의 방어를 위해 이를 세웠다. 한, 제 등의 국가는 다른 국가를 막기 위해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22년에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중국 안에 있던 장성은 파괴하고 흉노를 방어하기 위하여 북쪽에 만들어졌던 여러 성들을 보수하고 서로 연결시켜 장성을 쌓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몽염 장군에게 장성을 쌓도록 명하여 기원전 214년 경에 완성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요동(현재의 랴오닝 성)에 이르렀고 서쪽은 임조(臨洮, 현재의 간쑤 성 민 현)에 이르렀다고 한다. 최근에 발견된 츠펑 시 등지의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장성은 현재보다는 북방에 위치하였다. 이후 한나라의 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시켰다. 후한 시기에는 흉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이후 수백년 동안 장성의 개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장성은 현존하는 장성과는 위치도 전혀 다르고 쌓는 방법도 달랐다. 현재의 장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며, 대부분 흙으로 쌓은 것이기에 현재의 만리장성과 달리 높이도 낮았다. 이 당시의 만리장성은 긴 장벽 형태의 성벽뿐 아니라, 국경 초소나 보루, 요새 등으로만 이루어진 구간도 다수 존재했으며, 성벽이 끊긴 곳도 있었다. 북방민족과의 경계가 아닌 요동 남부 등에 설치된 만리장성은 본격적인 성벽이라기보다는 전진기지 성격의 요새가 대부분이다.
4) 장성의 개축
남북조 시대에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북방의 유연을 방어하기 위해 원래 장성의 위치보다 남쪽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의 기초가 되었다. 수나라는 통일 이후에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지방 남쪽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당대에는 북방을 경영하고 북방의 이민족을 지배하면서 만리장성은 유명무실해졌다. 이후에는 반대로 이민족인 거란, 여진, 몽골 등이 지속적으로 공격해와 장성 너머에 영토를 가지게 되면서 만리장성은 무력화되고 방치되었다. 그러나 거란의 요나 여진의 금은 다른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싱안링 산맥 등지에 새롭게 장성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원을 몰아내고 명이 세워진 뒤 원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강화하고 신축하여 지금 형태의 장성이 되었다. 영락제 때부터 건설을 시작한 만리장성은 북위 및 북제의 장성이 기초가 되었으며, 오르도스 남쪽 수나라의 장성도 활용되었다. 주로 북경 인근의 동단을 중심으로 축성된 명나라의 만리장성은 가정제 연간에 몽골의 침입이 가속화되면서 더욱 견고하게 건설되었으며, 서쪽의 장성들도 지속적으로 개축되어 16세기 말에 비로소 지금의 장성이 모두 완성되었다.[3] 이때의 장성 역시 성벽뿐 아니라, 목책이나 거점 형식의 요새도 포함하고 있는 개념으로, 산하이관 동쪽 랴오닝 성 지역의 장성은 대부분이 목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5) 연혁
♣ 전국 시대 당시에 조, 연, 진 3국이 장성을 쌓음
♣기원전 221년에 진 시황제가 연과 조의 장성을 연결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 해 서쪽으로 더 연장시킴
♣ 한대에 무제가 우웨이와 주취안에 장성을 연장시켜 쌓음
♣ 남북조 시대 때 북주와 북제가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함
♣ 수의 양제가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음
♣ 금이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에 대규모로 장성을 쌓음
♣ 명의 영락제가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고 동쪽 산해관을 설치함
♣ 명의 정통제가 북경 정면 부분의 2중으로 장성을 쌓음
♣ 명의 가정제가 대대적으로 장성을 개축함
♣ 이후에 16세기에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됨.
6) 의의
농경 민족과 유목 민족의 경계선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초원에 건설된 것이다. 중국인의 북방 민족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보여준 것이지만, 몽골계 민족은 명대에도 장성을 넘어 침입하기를 되풀이하였고, 명나라 말에 만주족(여진)이 발흥해 후금을 건국하면서, 명나라와 사이에 장성의 동단을 둘러싸고 사투가 반복되었다. 후금은 명나라와 유리한 싸움을 진행하면서도 명장 원숭환의 방해로 장성의 동단의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후금의 계략으로 명의 숭정제에게 주살 당했다. 그 후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멸망되고 후금으로 개명했던 청나라는 명나라 신하였던 오삼계의 안내로 산해관을 넘어 청나라의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7) 현황
현재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을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서 보호하고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시켰다. 세계 유수의 관광 명소로 이름이 높았으나, 지역 주민이 집의 재료나 관광객에 판매하기 위해 장성의 벽돌을 갖고 돌아갔기에 파괴가 지속되었다. 또한 댐 공사로 인해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장성 주변의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은 중국에서도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당국은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6년 4월에 열린 중국의 학술단체 중국장성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지역은 전체의 20% 이하이고, 일부 현재 존재하는 지역도 30%이고, 남은 50% 이상은 모습이 사라졌다"라고 보고되었다.
8) 논란
중국은 2009년 진장성과 명장성으로 대표되는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와 위치를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는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발표한 단둥 시의 ‘호산산성’이 고구려의 박작성이라는 사실에 언론이 주목하여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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