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3대 詩人, 杜 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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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3대 詩人, 杜 甫
(후세인이 그린 두보 초상)
(712 河南省 鞏縣~770 湖南省. 자는 子美.)
李白(: 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 杜陵의 布衣 또는 少陵의 野老라고 자칭한 것은 長安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杜보의 선조가 살았기 때문. 만년에 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杜工部라고 불리기도. 당 玄宗이 즉위한 해 先天 1년(712)에 허난 성 궁 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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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45년간의 치세중 그 전반부인 開元年間 (713~741)은 당의 전성기. 初唐 이름 높은 시인 杜審言 손자.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洛陽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의 시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뤄양의 명사들에게 인정. 젊었을 때부터 술을 좋아했고 강직한 성품 연장자들과 교류를 즐겼다. 20세 전후 8,9년간 각 지방을 유람했는데, 처음에 江蘇省과 浙江省을 여행하고 24세에 일단 뤄양으로 돌아왔으나 進士 시험에 낙제, 다시 여행길에 나서 山東省과 河北省을 유랑. 이때 명산대천을 보고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이 시기의 시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29세 때 당시 산둥 성 兗州에서 관리로 있던 아버지 杜閑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는 두보 시 중 가장 초기 것. 다음해 산둥 성에서 돌아와 평생의 반려자였던 부인 楊씨를 맞아들였다. 安史의 난(755~763) 후에 지극히 궁핍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도 두보는 늘 부인과 함께 다녔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항상 처자의 신상을 염려하는 애정이 넘치는 시를 짓곤 했다. 이즈음 그는 벌써 30세나 되었는데도 전도가 열리지 않은 탓인지, 억압당하고 있던 정신이 때로는 대상을 찾아 날카로운 어조의 시로 표현되었다. 그는 전대의 시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빈약하고 엉성한 내용을 수식어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참모습을 충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天寶 3년(744), 장안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 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만났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梁宋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高適· 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江南으로 향했고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夢李白二首>이다. 천보 5년(746)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장안에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 명사·고관의 집에도 드나들고 추천을 희망하는 시들을 짓기도 했고 몇 번인가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천보 10년(751) 三大禮賦를 바쳐 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集賢院待制의 명을 받고 관리로 뽑힐 순서를 기다렸으나 결국 임용되지 못했다. 당대의 시인은 대체로 官界에의 진출을 원하고 정치참여를 구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이는 시대적인 분위기이기도 했고 또 임용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 經世濟民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 이 경세제민의 이상은 예로부터 중국 지식인의 공통된 희망. 두보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天子가 옛날 堯舜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되어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해가는 것이 첫째이고 그것이 백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 다만 실제로 두보에게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史家들은 두보를 "즐겨 천하의 대사를 논했지만 이상이 높고 실제적이지 못했다"고 평. 그러나 그로서는 정치가로서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기고 또 초조해했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불우하고 궁핍한 것이었다.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의 시는 사회의 불합리한 실정을 여실히 그려냈다. 당은 초기부터 끊임없이 국경에 군대를 보내 戰功을 거두어 변경에서 위세를 떨쳤으나, 천보연간(742~755)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정치적 파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보 10년 南詔·大食·거란에게 크게 패하자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는 더욱 무겁게 부과. 쓸데없는 전쟁에 내몰려가는 병사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하소연한 시 兵車行(병거행)은 이 해에 쓴 작품. 개원연간에는 풍년이 계속되었으나 천보 연간에 들어오면서는 기근이 잇달았다. 천보 13년에는 장마가 심하게 계속되어 기근으로 점점 더 생활이 어려워지자 두보는 한때 처자를 奉先縣의 친척집 농가에 맡겼다. 다음해 처음으로 右衛率府의 胄曹參軍, 즉 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로 正八品 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일단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서둘러 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안을 출발해서 도중에 驪山 기슭에 다다르니 그곳 온천에는 정치에 싫증난 현종이 楊貴妃와 함께 조정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추위를 피해 와서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고 하며 빈부 차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 봉선현에 겨우 당도해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어린 자식은 굶어 죽어 있었다. 비분강개 울분과 마음 무겁게 덮쳐 누르는 서글픔 강렬 호소한 장편 시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다.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들을 데리고 陝西省 白水縣 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羌村에 남겨두고, 자신은 寧夏省 靈武에서 즉위한 肅宗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도로 끌려갔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나날을 보내면서 망국 비애를 애도 가족 안부 염려. 이 무렵 春望· 月夜· 哀王孫· 哀江頭 등 많은 유명한 시를 지었다. 지덕(至德) 2년(757) 반란군에 내분이 일어나서 안녹산이 살해. 숙종은 링우로부터 장안에서 가까운 鳳翔으로 行在所를 옮겼다. 두보는 4월에 장안을 탈출해서 펑샹으로 급히 달려갔다. 황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두보를 5월에 左拾遺에 임명. 이무렵 휴가 얻어 부주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길에서 두보는 많은 걸작시 九成宮· 玉華宮. 行次昭陵· 江村三首 및 장편의 北征 를 남겼다. 특히 〈북정〉은 앞에서 예를 든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와 더불어 두보 시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 나라와 군주에 대한 충성, 가족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것으로 비장미가 넘친다. 그 해도 저물어 장안은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上皇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아직도 중원의 각지를 황폐시키고 시국은 여전히 불안. 정치의 결함을 보완한다는 좌습유라는 諫職에 있던 두보의 의견은 하나도 중시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지덕 2년 11월부터 다음해인 乾元 1년(758) 5월까지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6월에 華州의 司功參軍이라는 지방관으로 좌천.
건원 1년(758)의 가을에서 겨울 무렵 관군의 세력이 한때 커져서 뤄양으로 가는 길도 뚫렸으므로 오랫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史思明이 안녹산의 아들 顔慶緖를 도와 대적하는 바람에, 관군은 크게 패하고 뤄양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어 두보는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화주로 돌아오는 길은 가던 길과 달리 짙어진 전란의 기운으로 어디나 어수선했고 백성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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