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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퇴계와두향. 애절한사랑이야기(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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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퇴계와 두향의 이야기 ♧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은매화(梅花)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다.
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선생이었던 지라
한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을 녹였었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 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그러나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身應是明月幾生修到梅花)
퇴계 선생의 시 한 편이다.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 때 두향이가 퇴계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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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조항삼님의 댓글

퇴계 이황과 기생 두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 넘는 군요.

풍류의 멋도 있어 보이고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애절한 사연은
가슴을 헤집고 있군요.

우리가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깊이도 있어서 배우는 바도 많군요.
이에 비견되는 사랑 이야기는 꽤 있는 줄 압니다.


음악을 감상하며 그 옛날 선비의 사랑에 푹 빠져 봅니다.

박순철님의 댓글

애절한 사랑....
지금도 도산서원 입구에 있다는 매화는
많은 사람들이 꼭 가보아야할 사랑의 증표입니다.

당시의 사회제도와 신분제도가,
처절한 사랑의 엘레지(육친이나 친구 · 연인 등의 죽음이나 불행,
또는 실연당한 슬픔에 잠긴 심정을 읊은 시)를 만들었습니다.

이존형님의 댓글

가슴저려오는 애절하고, 간절한 인간애가 짠히 베어나오는
귀한 사연을 잘 보았습니다.

나와 하나님, 나와 참부모님의 관계를 떠올려보니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드는 이 아침에 오늘 하루를
님에 그리움에 사무치는 그런 날로 살겠습니다.

장원님은 때로는 유쾌하게 웃기기도 하시고,
장원님은 때로는 가슴저민 사연으로 지난날을 잔잔히 돌아보게끔
하시는데 매력이 있습니다. 1800홈에 영원한 장원이 되시옵소서,

정해관님의 댓글

두가지 사실을 밝혀 주는 군요. 동양 최고의 성리학자께서도 佛家의 '인연설'을 믿었던 모양이고, 초대회장님께서 언급한 情에는 지식불문, 나이불문이 아닌가 하는 점 입니다.

(이 기회에 공부좀 더 할까요!)
이황은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한 것을 보고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했는데, 기대승이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단과 칠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善)의 측면으로 발로된 정(情)들만을 가려 뽑은 것인데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립시키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와 기를 따로 떼어 각기 사단과 칠정에 분속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 이황의 이기이원론적 입장을 비판했다. 이러한 기대승의 반론에 따라 이황은 자신의 이론을 몇 차례에 걸쳐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해서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편지들을 성리학 연구의 기본 자료의 하나로 읽게 되고, 이황과 기대승이 논쟁한 사단칠정이기에 대한 지식의 습득을 성리학 연구의 필수적 요건으로 삼게 되었다. 이와 같은 논구로 사단칠정론 중심의 한국 성리학의 심성론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되어 중국 성리학의 수준을 능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단칠정설에서 발생한 이론적 차이가 영남학파(嶺南學派)·기호학파(畿湖學派) 또는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라는 학파의 성립으로 발전했다. 이 책에 수록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기대승의 〈고봉집 高峰集〉에는 〈양선생왕복서 兩先生往復書〉(3권)로, 이황의 〈퇴계전서 退溪全書〉에는 제16~17권에 〈논사단칠정서 論四端七情書〉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김동운님의 댓글

평소에 존경해 마지 않았던 퇴계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의 일편을 보는 기회를 주신 이장원 형제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매화에 얽힌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사람의 삶이란 결국 情을 통할 수 있는 관계 형성 이라는 참부모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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