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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 제 몸 추듯”과 굴원의 [이소, 離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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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 제 몸 추듯”과 굴원의 [이소, 離騷]

--자살, 하산자, 사미인곡이 연상되어...---

1.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을 빗대어 말할 때 ‘구렁이 제 몸 추듯’이라는 속담을 쓴다. 그런데 구렁이가 제 몸을 추는 동작을 한다는 게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일을 분명하고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고 슬그머니 얼버무릴 때 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는 속담에서 보듯, 구렁이는 배를 깔고 땅이나 담 같은 곳을 스르륵 감아 돌아가는 의뭉스러운 동작이 먼저 연상이 된다. 열대지방에 사는 코브라 같은 종류는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지만, 구렁이가 그러는 걸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 속담은 다른 속담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속담의 본래 형태는 ‘굴원이 제 몸 추듯’이었다고 한다. 굴원을 구렁이로 잘못 발음하여 퍼뜨린 것이 지금처럼 굳어졌다는 것이다. 굴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의 시인보다는 구렁이가 일반 백성들의 귀에 훨씬 친숙하고 낯익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굴원이 구렁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2.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다. 초나라 회왕(懷王)의 신임을 얻어 요직에 진출한 뒤 많은 정치적 활약을 했으나 나중에는 정적(政敵)들의 중상모략에 의해 왕의 곁에서 멀어지게 된다. 당시에 초나라를 둘러싼 세력관계 속에서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으나, 반대 입장에 섰던 자들에 의해 뜻이 꺾이고 말았다. 그 뒤로도 번번이 왕에게 올린 그의 견해는 묵살되었고, 결국에는 양쯔강 이남의 땅으로 추방당하고 만다. 뛰어난 시인이었던 굴원이 이때의 정치적 좌절감과 몰락해가는 초나라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바탕으로 해서 써낸 시가 그 유명한 「이소(離騷)」라는 작품이니다. 훗날 당나라의 두보와 이백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굴원은 중국 최고의 비극 시인이자 애국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왕이 아첨하는 자만 좋아하고 충신은 몰라주는 데 따른 울분을 토로하며 10여 년을 유랑하다 끝내 복권되지 못한 굴원은 스스로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만다.

3. 굴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썩었건만 나 혼자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건만 나 홀로 깨어 있다. 그로 인해 내가 추방을 당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굴원이 제 몸 추듯’이라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틀렸고,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굴원의 태도를 빗대어 만든 말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그럼에도 군주로부터 버림받은 데서 오는 자괴심에서 나온 표현이겠지만, 사람들은 굴원이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문학적인 성취에서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시인이 정치적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커다란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한편, 이 날이 음력으로 5월5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굴원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들은 즉시 멱라수로 달려가 모든 배에 나눠 타고서

그날 종일 강을 오르내리며 굴원의 시체나마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굴원의 시체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채색 비단 줄에 음식을 메어 강물에 던지고

굴원의 수중 고혼을 제사 지냈다.

그 후로 동내 사람들은 5월5일이 되면 각기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기를 했다.

즉, 누가 먼저 굴원의 시체를 건져낼 수 있느냐는 데서 이러한 경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굴원이 나락을 심어 놓은 논에서 그 해 가을 백옥 같은 쌀이 소출됐다.

그래서 동내 사람들은 그 논을 玉米田이라고 命名했다고 한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 西浦漫筆〉에서,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을 평가하면서,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 離騷〉에 비길 만한 것으로, 자고로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이 셋뿐이다"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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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이판기님의 댓글

屈原... 일설에는 물에 빠진 그의 시신을 물고기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고기밥으로 대나무 잎으로 싼 밥을 강물에 던지고 배를 타고 북을치고 함성을 지르며 고기를 쫒았다고 합니다. 그 때의 대나무 잎으로 싼 밥이 棕子(쫑즈)로 지금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중국인들의 사랑받는 먹거리이며 龍船比賽(롱촨비싸이:배젖기 경주)는 유럽의 축구처럼 중화문화권의 인기 스포츠가 되었습니다.
굴원의 문장이 뛰어나지 못 했다면 아마 그의 죽음도 한낮 아웃사이더의 이름없는 사라짐이었겠지요. 새삼 문학이 문화와 역사에 미치는 파워를 생각하게 됩니다. 참부모님의 자서전도 굴원의 시 못지않게 중화문화권이 아닌 인류문화사에 경천동지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아주

parksinja님의 댓글

일부로 찾아 읽기도 어려운 고문을 이렇게 쉽게 접할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구렁이 제 몸 추듯은 되지 말아야 겠다고....

조항삼님의 댓글

고전에 나타난 내용이 시대를 뛰어 넘어 금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까지
시사하는 바가 크군요.

우리도 역사 속의 인물을 관조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아침입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굴원의 '이소(離騷)'는 후세에 '經'으로까지 추앙되는 바,
고대 중국 남방 문학의 비조격에 해당하는 글이다. 북방문학의 대표인 '시경'과 더불어 고대 중국 시가를 대표한다.

"전국시대의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작품. 이소란 조우(遭憂), 즉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며 초나라의 회왕(懷王)과 충돌하여 물러나야 했던 실망과 우국(憂國)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자서전식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가계(家系)의 고귀함과 재능의 우수함을 말하고, 이어 역사상의 인물 ·신화 ·전설 ·초목 ·조수 등을 비유로 들어 자신의 결백함을 노래하며, “세속은 틀리고, 내가 옳다”고 주장한다. 후반은 천계편력(天界遍歷)으로 도가적(道家的) 색채가 짙은 미사여구가 이어지며 낭만적이다. 이러한 정열적인 자기주장과 낭만성은 북방문학인 《시경(詩經)》에는 없고, 남방문학인 《초사(楚辭)》의 이 시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전국시대의 설득문학의 대표작이며, 한대(漢代) 이후의 시부(詩賦)에 영향을 끼쳤다."

굴원(BC 339 ? ~ BC 278 ?)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그에 대한 사적은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대략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굴원은 초나라의 왕족과 동성(同姓)으로 몰락한 귀족 출신이며,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이라 한다. 그는 일찍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매우 풍부한 학식과 큰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때는 좌도(左徒)를 역임하여 안으로는 국사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응대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초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외교적으로는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초나라의 부패한 귀족과 진나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던 초나라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尙), 자란(子蘭) 등과 진(秦)나라의 첩자 장의(張儀)의 참소와 농간으로 끝내 회왕(懷王)의 버림을 받아 추방당했다.
회왕 말년에 군사 외교적으로 실패한 후에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였다. 그후 굴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왕은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경양왕(頃襄王) 때 굴원은 다시 간신들의 모함으로 강남으로 추방되었다. 이렇게 간신 무리에 의해 궁지로 내몰린 굴원은 초나라의 앞날과 임금을 생각하며 자신의 불운을 한없이 한탄하다가 결국 호남(湖南)의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약 200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위대한 애국시인 굴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五節)에 용주(龍舟)를 젓고 쫑즈를 먹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굴원에 대한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離騷의 일부]

悔相道之不察兮, 延佇乎吾將反.
회상도지불찰혜, 연저호오장반.
갈 길을 잘못 고른 것을 후회하면서 머뭇거리며 나는 돌아가리라.
回朕車以復路兮, 及行迷之未遠.
회짐거이복로혜, 급행미지미원.
나의 수레를 돌려 오던 길로 돌아가리니, 길이 어긋난 것이 멀지는 않구나.
步余馬於蘭皐兮, 馳椒丘且焉止息.
보여마어란고혜, 치초구차언지식.
난초가 있는 연못가로 나의 말을 몰아서 향초가 있는 언덕으로 말을 달려 거기에서 쉬겠노라.
進不入以離尤兮, 退將復修吾初服.
진불입이이우혜, 퇴장복수언초복.
들어가서 뽑히지 못하고 고난만을 당하니, 물러나서 나의 처음 지녔던 뜻을 다듬겠노라.
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
제기하이위의혜, 집부용이위상.
마름과 연꽃을 다듬어서 저고리를 만들고 연꽃을 모아서 치마를 만들리니,
不吾知其亦已兮, 苟余情其信芳.
불오지기역이혜, 구여정기신방.
나의 마음 알아주지 않아도 그만일 뿐, 오직 나의 마음 진실하고 꽃답기만 하면 되네.
高余冠之岌岌兮, 長余佩之陸離.
고여관지급급혜, 장여패지육리.
높다랗게 나의 관을 높이 쓰고 부드럽고 빛나는 나의 패물을 길게 늘어뜨리리니,
芳與澤其雜糅兮, 唯昭質其猶未虧.
방여택기잡유혜, 유소질기유미휴.
향기와 윤기로 어울려 놓으니 이 결백한 바탕은 결코 덜어지지 않으리.
忽反顧以遊目兮, 將往觀乎四荒.
홀반고이유목혜, 장왕관호사황.
문득 돌아보아 두루 살피고 사방으로 다니며 구경하리라.
佩繽紛其繁飾兮, 芳菲菲其彌章.
패빈분기번식혜, 방비비기미장.
패물이 화려하고 잘 꾸며져 있으며, 향내가 멀리 가고 더욱 밝도다.
民生各有所樂兮, 余獨好修以爲常.
민생각유소락혜, 여독호수이위상.
소인, 그네들 서로 좋아하는 바가 있으나 나 홀로 선으로써 법도를 삼으리라.
雖體解吾猶未變兮, 非余心之可懲.
수체해오유미변혜, 비여심지가징.
몸이 일그러져도 나의 뜻 불변하니, 어찌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으리요?
女嬃之嬋媛兮, 申申其詈余.
여수지선원혜, 신신기리여.
여수는 애타게 잡으며 거듭 나를 나무라서 이르기를,
曰 : ‘鮌婞直以亡身兮, 終然殀乎羽之野.
왈 : ‘곤행직이망신혜, 종연요호우지야.
‘요임금의 신하인 곤은 강직하여 일신의 안위를 잊어서 끝내 들에서 죽었도다.
汝何博謇而好修兮, 紛獨有此姱節.
여하박건이호수혜, 분독유차과절.
그대는 어째서 충직하며 착하기만 하여 홀로 이러한 아름다운 절개만을 지키는가?
薋菉葹以盈室兮, 判獨離而不服.
자녹시이영실혜, 판독이이불복.
녹두와 창이를 쌓아 방에 채우니, 골라내어 버려서 쓸데가 없네.
衆不可戶說兮, 孰云察余之中情.
중불가호설혜, 숙운찰여지중정.
뭇 사람 외지게 말하지 말게나, 뉘 우리 속마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리?
世並擧而好朋兮, 夫何煢獨而不余聽.
세병거이호붕혜, 부하경독이불여청.
세상 모두 무리 짓기 좋아하는데 어찌하여 홀로 외로이 내 말을 듣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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