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소중한 삶의 지혜!!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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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강인한 의지를 가져라!!
요청하는곳에 얻음이 있고,
구하는 곳에 찾음이 있으며,
두드리는 곳에 문이 열린다.
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과 열정이 있을때
값진 보물을 발견할수 있다,,,
타키투스는
#신은 보다 강한 의지의 소유자 편에 선다#고 했다.
신념은 곧 마술이다,,
실천과 검소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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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개
정해관님의 댓글
타키투스 (로마 역사가)
정식 이름은 Publius (Gaius) Cornelius Tacitus.
56경~120경.
로마의 웅변가, 공직자, 라틴어로 글을 쓴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산문 작가, 역사가.
저서로는 게르만족에 관한 〈게르마니아 Germania〉, 69~96년의 로마 제국을 서술한 〈역사 Historiae〉, 14~68년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 Annals〉가 있다.
초기 생애와 활동
타키투스는 이탈리아 북부(갈리아키살피나) 또는 갈리아 남부(갈리아나르보넨시스:지금의 프랑스 남동부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코르넬리우스는 로마 귀족 가문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로마 귀족의 후예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속주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총독의 이름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교육받고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타키투스는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여기에는 작문 연습을 비롯한 일반적인 문학 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훈련은 행정관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이었다. 타키투스는 일류 웅변가인 마르쿠스 아페르와 율리우스 세쿤두스 밑에서 변호사 수업을 받았다. 그후 그는 '비르긴티비라테'(하급 행정관으로 임명된 20명 가운데 하나)와 군사 호민관(군단 참모)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77년에 타키투스는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딸과 결혼했다. 아그리콜라는 77년(또는 78년)에 로마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훗날 브리튼 섬 총독으로 명성을 높였다. 타키투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는데, 장인인 아그리콜라의 정치적 연줄이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정상적인 단계를 거쳐 81년경에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고, 88년에는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으며, 예언서인 〈시빌레의 책 Sibylline Books〉을 보관하고 외래 종파의 예배 의식을 감독하는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군단을 지휘하는 속주의 고위직을 4년 동안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귀족을 억압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년을 직접 목격했다. 93년에 아그리콜라가 죽었지만, 이때쯤에는 타키투스도 독립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네르바 황제시대인 97년에 그는 콘술이 되었고, 네로가 죽은 뒤 68~69년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유명한 군인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의 장례식에서 추도연설을 했다. 이런 명예는 그가 웅변가로서 얻은 명성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의 도덕적 권위와 공적인 지위도 반영했다.
초기 문학작품
98년에 타키투스는 2권의 작품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생애 De vita Julii Agricolae〉와 〈게르마니아〉라고도 부르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환경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을 썼는데, 둘 다 그의 개인적 관심을 반영했다. 〈아그리콜라〉는 장인의 생애를 전기 형식으로 저술한 책으로, 브리튼 총독 시절(78~84)과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말년을 특히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아그리콜라를 찬양하는 한편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편견없는 정치적 판단을 보여준다. 〈게르마니아〉는 라인 강 연안의 로마 국경 지방을 서술한 책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원시적 악덕만이 아니라 소박한 미덕도 당시 로마 도덕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던 사실과 대비해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 부족이 힘을 합하면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의 글은 지리학의 범위를 넘어서 정치적 민족지학으로 발전했다. 이 저서는 게르만족의 상황에 대한 행정관의 평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게르만족에 대한 역사적 입문서 구실을 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여전히 법정 변호사로 일했지만 당시 웅변은 정치적 기백을 많이 잃어버렸고 웅변가들의 솜씨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웅변의 이러한 쇠퇴는 그가 쓴 〈웅변에 관한 대화 Dialogus de oratoribus〉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것 같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신의 젊은시절을 언급하면서, 스승인 아페르와 세쿤두스를 소개하고 있다. 〈웅변에 관한 대화〉는 8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로 그의 다른 저서들보다 문체가 더 키케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서의 문체는 형식과 주제에서 나온 결과일 뿐, 문체의 발달과정에서 초기 단계에 씌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주제를 가지고 추측하면 타키투스가 이 저서를 쓴 연대는 98~102년이 분명하다. 타키투스는 웅변을 문학생활의 한 방법으로서 시와 비교하고, 공공생활에서 웅변이 차츰 쇠퇴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로마 공화국은 진정한 웅변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로마 제국은 웅변술에 대한 창조적 자극을 제한했다. 이 저서는 그가 웅변에서 역사로 관심을 돌린 시기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반영하고 있다.
정식 이름은 Publius (Gaius) Cornelius Tacitus.
56경~120경.
로마의 웅변가, 공직자, 라틴어로 글을 쓴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산문 작가, 역사가.
저서로는 게르만족에 관한 〈게르마니아 Germania〉, 69~96년의 로마 제국을 서술한 〈역사 Historiae〉, 14~68년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 Annals〉가 있다.
초기 생애와 활동
타키투스는 이탈리아 북부(갈리아키살피나) 또는 갈리아 남부(갈리아나르보넨시스:지금의 프랑스 남동부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코르넬리우스는 로마 귀족 가문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로마 귀족의 후예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속주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총독의 이름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교육받고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타키투스는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여기에는 작문 연습을 비롯한 일반적인 문학 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훈련은 행정관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이었다. 타키투스는 일류 웅변가인 마르쿠스 아페르와 율리우스 세쿤두스 밑에서 변호사 수업을 받았다. 그후 그는 '비르긴티비라테'(하급 행정관으로 임명된 20명 가운데 하나)와 군사 호민관(군단 참모)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77년에 타키투스는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딸과 결혼했다. 아그리콜라는 77년(또는 78년)에 로마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훗날 브리튼 섬 총독으로 명성을 높였다. 타키투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는데, 장인인 아그리콜라의 정치적 연줄이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정상적인 단계를 거쳐 81년경에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고, 88년에는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으며, 예언서인 〈시빌레의 책 Sibylline Books〉을 보관하고 외래 종파의 예배 의식을 감독하는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군단을 지휘하는 속주의 고위직을 4년 동안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귀족을 억압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년을 직접 목격했다. 93년에 아그리콜라가 죽었지만, 이때쯤에는 타키투스도 독립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네르바 황제시대인 97년에 그는 콘술이 되었고, 네로가 죽은 뒤 68~69년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유명한 군인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의 장례식에서 추도연설을 했다. 이런 명예는 그가 웅변가로서 얻은 명성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의 도덕적 권위와 공적인 지위도 반영했다.
초기 문학작품
98년에 타키투스는 2권의 작품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생애 De vita Julii Agricolae〉와 〈게르마니아〉라고도 부르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환경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을 썼는데, 둘 다 그의 개인적 관심을 반영했다. 〈아그리콜라〉는 장인의 생애를 전기 형식으로 저술한 책으로, 브리튼 총독 시절(78~84)과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말년을 특히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아그리콜라를 찬양하는 한편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편견없는 정치적 판단을 보여준다. 〈게르마니아〉는 라인 강 연안의 로마 국경 지방을 서술한 책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원시적 악덕만이 아니라 소박한 미덕도 당시 로마 도덕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던 사실과 대비해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 부족이 힘을 합하면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의 글은 지리학의 범위를 넘어서 정치적 민족지학으로 발전했다. 이 저서는 게르만족의 상황에 대한 행정관의 평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게르만족에 대한 역사적 입문서 구실을 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여전히 법정 변호사로 일했지만 당시 웅변은 정치적 기백을 많이 잃어버렸고 웅변가들의 솜씨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웅변의 이러한 쇠퇴는 그가 쓴 〈웅변에 관한 대화 Dialogus de oratoribus〉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것 같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신의 젊은시절을 언급하면서, 스승인 아페르와 세쿤두스를 소개하고 있다. 〈웅변에 관한 대화〉는 8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로 그의 다른 저서들보다 문체가 더 키케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서의 문체는 형식과 주제에서 나온 결과일 뿐, 문체의 발달과정에서 초기 단계에 씌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주제를 가지고 추측하면 타키투스가 이 저서를 쓴 연대는 98~102년이 분명하다. 타키투스는 웅변을 문학생활의 한 방법으로서 시와 비교하고, 공공생활에서 웅변이 차츰 쇠퇴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로마 공화국은 진정한 웅변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로마 제국은 웅변술에 대한 창조적 자극을 제한했다. 이 저서는 그가 웅변에서 역사로 관심을 돌린 시기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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