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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31. 한나라 건국 공신 장량(張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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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31. 한나라 건국 공신 장량(張良)

장량(張良, ? ~ 기원전 189)은 중국 한나라의 정치가이자, 건국 공신이다.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로 불린다.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劉邦)이 한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고 유방으로부터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1. 생애

장량의 할아버지인 장개지(張開地)전국시대 한()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3대에 걸치는 군주 아래서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張平)도 희왕(釐王), 환혜왕을 섬기며 재상을 맡았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아예 장량의 조상은 한의 왕족이고 주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이었지만 진의 통일 이후 장씨(張氏)로 성을 바꿨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20년 뒤인 기원전 230년에 한이 진에 멸망하여 집안은 몰락했고, 그때 아직 관직을 얻지는 못한 채였다.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 비용을 대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난 장량은 창해공(滄海君)이라는 자를 얻어 대화를 나눠보고, 창해공으로 하여금 기원전 218년경, 박랑사(현재의 허난 성 양장)를 지나는 시황제의 행차를 노리고 무게가 120(30kg)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시황제가 탄 수레를 부수어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하고 장량 등은 도망쳤다. 이름까지 바꾸고 하비에 숨은 그는 황석공이라는 인물로부터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기에 실린 관련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장량이 다리를 건너는데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는 장량더러 가서 주워오라고 했다. 장량은 화를 참고 가서 주워다 공손하게 바쳤지만, 노인은 다시 자신의 발을 내밀며 신겨달라고 했다. 장량은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는데, 노인은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노인은 다시 돌아와 장량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닷새 뒤 아침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닷새 뒤 아침에 장량은 약속 장소로 갔지만, 이미 노인은 그곳에 와있었고 어른과 약속해놓고 그것을 어겼다며 장량에게 핀잔을 주고는 닷새 뒤에 다시 오라고 하고 가버렸다. 닷새가 지나서 장량은 다시 해가 뜨기 전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려 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장량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면서 다시 닷새 뒤에 오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장량은 다시, 이번에는 아예 밤부터 약속 장소에 나가 노인을 기다렸고, 잠시 후에 나타난 노인은 장량을 칭찬하며 그에게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를 전해주며 "13년 뒤에 산기슭에서 네가 마주치게 될 노란 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훗날 장량은 이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전했으며, 사후 장량의 무덤에도 함께 부장되었다고 한다.

 

황석공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지만, 장량이 누군가 스승을 두고 병법을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황석공이 장량에게 주었다는, 소위 태공망의 병법서라는 것이 현존하는 육도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육도는 위, 진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므로 적어도 장량이 읽은 것은 현존하는 육도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하비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항우(項羽)의 숙부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온 것을 숨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백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가, 항량(項梁)에게 옛 한나라 공자 횡양군 성을 한왕(韓王)에 옹립하도록 했으며 한의 사도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죽자 다시 유방에게 귀순하고 이때부터 유방의 중요 참모가 되어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한신을 천거하는 등, 그는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이 한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도록 도와주었다.

 

고조 6(기원전 201), 공신들에게 포상할 때 고조에게 책략으로써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제나라에서 3만 호를 마음대로 택하라는 말을 받았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고조를 처음 만난 유() 땅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유후에 봉해졌다. 고조의 공신 중에서는 62위에 불과했지만, 봉읍은 1만 호로 유택(12천 호), 조참(16백 호)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 한이 세워진 후에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후계자 문제로 여후에게 자문을 해줬다고 한다.

<이상 위키백과에서>

 

2. 토사구팽(兎死狗烹)과 장량의 지혜

1) 토사구팽(兎死狗烹)

1) 의미 :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必要)할 때 요긴(要緊)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苛酷)하게 버린다는 뜻일이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정(世情)을 비유(比喩譬喩)해 이르는 말

2) 유래

범려(范蠡)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구천(句踐)을 보좌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을 믿을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나라에 은거한 범려(范蠡)는 문종(文種)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다. 문종(文種)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句踐)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故事)에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유래되었다.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초패왕 항우를 멸하고 한나라의 고조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 장량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삼걸의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에 봉했다.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이었던 종리매(鐘離眛)가 한신(韓信)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는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韓信)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鐘離眛)와 오랜 친구(親舊)인 한신(韓信)은 고조의 명령(命令)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진노한 고조는 한신(韓信)을 주살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韓信)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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