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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야마 회장 댄버리 간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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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야마 회장 댄버리 간증[1]

알라스카 코디악

7 20일은 인류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날이다. 아버님은 매스컴이 떠들썩한 가운데 신변이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서 댄버리 형무소에 입감되셨다. 미국을 떠나 재판을 받지 않고 수감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미국에 들어와 재판을 받으신 결과였다. 문제를 피해가는 분이 아니라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시는 분이셨다. 아버님께서 댄버리 입소하시기 직전 형제자매들을 모아 놓고 이스트 가든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리셨다. 어떻게 당시의 기도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 고난 뒤에는 반드시 새로운 섭리가 전개될 것을 확신하시며 당신의 안위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격려하시고 걱정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아버님은 이미 수 차례 감옥 생활에 익숙하신 분이었으나 나로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형무소에 입소하는 날부터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경악 그 자체였다. 특히 메시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들 앞에 입고 있는 옷을 다 벗고 서야 했다. 백인 앞에 알몸으로 서 계신 모습.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국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거늘. 그렇게 미국을 위해 살아 오신 분이 왜 이렇게 되셨단 말인가.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해지고 당혹감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형무소 나가면 이런 무례한 놈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온갖 상상에 사로잡혔다. 마약을 가져 오지 않았는가, 항문 속에 그런 것을 넣고 오지 않았는가 등 말도 안되는 질문과 조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입문절차로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과 벗은 옷가지들을 들고 박스 하나를 골라 그 안에 있는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했다. 다른 죄수가 사용하다 벗어 놓은 것들이었다. 아버님께서 착용하신 팬츠는 얼룩이 져서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운 것이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서 나는 언젠가 세상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아버님께서 처음 착용하신 얼룩진 팬츠를 가지고 나와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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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과 나는

2단 침대가 있는 작은 방을 배정 받았다. 공중전화부스와 청소도구보관창고가 옆에 붙어 있는 제일 시끄러운 곳이었다. 나는 이 역사적인 수난의 공간을 항상 잊지 않기 위해 늘 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있다. 딱딱하고 삐걱거리는 침대, 베개는 물론이고 시트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잠을 주무실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탁소에 가서 시트를 가져다 쓰라고 했다. 그곳에 가 보았더니 세탁해 놓지 않은 것들이 처박혀 있었다. 더운 무더위로 미국인들은 알몸으로 그것들을 깔고 덮고 잠을 잤다. 그러니 완전히 땀에 절어 있었다. 죄송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며 그 시트를 가져와 침대를 만들어 드렸다. 3~4일을 그렇게 지내야 했다. 다시 한 번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님은 ‘괜찮아 괜찮아’ 하시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거려 주셨다. 더 비참한 곳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 인류에게는 부모가 없으므로 형제들이 싸움을 하여 피를 흘리고 있다. 인류 앞에 참부모가 필요한데, 그 참부모로 서기 위해서 가장 비참한 길이라도 감사하면서 통과하지 않고 어떻게 참부모가 되겠는가.” “가미야마 생각해 보라. 남자로서 생식기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몸에 필요 없는 불순물을 배설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도 사용한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강하고 고귀한 보석이지만 연료로 태워 쓰는 석탄과 동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가장 비참한 곳과 가장 고귀한 곳은 통하는 법이니 언제나 감사하며 나가는 것이다.” 이버님은 이러한 말씀을 해 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아버님.”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가미야마.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일본인이다. 일본사람들과 헌병들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는 역사를 선생님은 갖고 있다. 그러나 원수임에도 그들을 원수시 하지 않았다. 원수를 사랑함으로 젊은이들이 뜻을 알고 목숨 걸고 따라오지 않는가. 그러니 미국을 용서하라. 언젠가 이 나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아버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 하시기에 겉으로는 그래야지 하면서도 내부로부터는 여전히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수를 실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인생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다. 일생을 아버님께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시 다졌다. 아버님의 감옥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셨다.

아버님께서는 늘 새벽 3시가 되면 기침하셔서 새우같이 굽은 자세로 몸을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시며 불편하신 침대 위에서 줄곧 기도의 정성을 올리셨다. 감옥에서 우리는 부엌일이 배정되었다. 200명 죄수들의 식사를 수인들이 직접 조리하여 준비하는 일이었다. 막상 부엌에 가도 뭐부터 해야 될지 몰랐다. 그때 아버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일은 가장 더러운 행주를 빠는 것이었다. 큰 후라이팬의 기름찌꺼기를 행주로 훔친 뒤 아무렇게나 통에 담아 놓았는데 누구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손수 이 일을 맡아 하셨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누군가 아버님께서 빨아 놓은 행주로 구두를 닦은 뒤 던져 놓고 가는 게 아닌가. 아버님은 아무 말 없이 이를 깨끗이 씻으셨다. 제가 하겠습니다 했지만 아버님은 내가 하겠다 하시면서 다시 씻어 놓으셨다. 그때 또 다른 죄수 한 명이 아버님이 깨끗이 빨아 놓은 행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번 사용하고 던져 놓고 가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예의라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칠 때면 아버님은 언제나 괜찮다고 하셨다. 그들은 ‘헤이 카미,’ ‘헤이 문’ 하면서 우리에게 이 일 저 일을 시켰다. 아버님은 이러한 지시에 언제나 묵묵히 따라 주셨다. 나는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말 많이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식사 전 식탁을 늘 반듯하게 정리해 놓으셨다. 한 번은 아버님께서 후추는 왼쪽, 소금은 오른쪽에 놓자고 하셨다. 다음날 나는 바쁜 나머지 이것들을 대충 정리해 놓았는데, 아버님은 “가미야마, 후추는 왼쪽 소금은 오른쪽이라고 정하지 않았나?” 하시면서 다시 고쳐 놓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매사에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그때 세세한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이때 아버님으로부터 배운 정신과 자세가 지금도 보트공장을 경영하는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부엌일을 끝내고 시간이 남으면 아버님은 언제나 말씀을 훈독하셨다. 당시 나는 이 참에 평소 원리와 말씀에 대하여 궁금하던 것들을 정확히 배워야겠다는 마음에 많은 말씀자료를 가지고 입감했었다. 일본에서 매월 발행되었던 ‘충효의 원천’이라는 잡지에 소개된 아버님 말씀을 전부 모아 미국에서 발간한 책자들이었다. 한 번은 내가 말씀을 읽고 있자, 아버님은 뭘 읽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아버님 말씀입니다”라고 했더니, 아버님은 당신에게도 읽어달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말씀을 읽었다. 교도소 건물 내에서는 큰 소리로 읽을 수 없으므로 운동장 구석에 있는 소나무 밑에 앉아 읽곤 하였다. 날이 저물어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때까지 훈독은 계속되었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 오면 아버님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뜨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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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내에 언제부터인가 책을 열심히 읽는 자들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 9, 10월이 되자 날씨가 점점 추워졌지만 밖에서 말씀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내 자신도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아버님의 건강이 염려가 되었다. 마침 쓰레기통에 갔더니 페인트를 담아 쓰던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 안에 내용물을 가득 넣고 뚜껑을 닫아 아버님께 가지고 갔다. “아버님 여기 앉으십시오.” 나는 아버님께 그것을 깔고 앉으시도록 권했지만 아버님은 사양하셨다. 날이 빨리 저물어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자 아버님은 화단 옆으로 자리를 옮겨 화단 조명을 위해 설치된 30~40 센티 정도의 낮고 희미한 전등에 의지하여 제한시간까지 말씀을 계속 읽으셨다. 꾸부정 하게 앉은 자세로 조명에 의지하여 책을 읽는 장면을 지나가는 수인들은 희한하게 바라보곤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말씀을 들으시다가 깊이 감동을 받으시고 ‘이 말씀은 전 식구에게 필요하니 당장 다음 일요일에 전 세계의 식구들이 다 읽도록 하라’는 지시를 주시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버님께서 댄버리 형무소에서 직접 고르신 말씀을 모아 펴낸 책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세계」이다.

아버님은 틈틈이 교도소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셨다. 미국이 책임 못하여 아버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남미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며 시간을 쪼개어 공부하셨다. 소등시간이 되면 희미한 불빛을 발하는 공중전화부스가 당신의 공부장소가 되었다. 교도소 내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곤 하였다. 어느 날 아버님은 숙소에서 몸을 만지시다가 저 창밖의 나무들을 보라고 하셨다. 나무들이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로 보였다. 아버님은 자연을 저렇게 대하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천주절묘의 이날, 조화의 신비”라는 하이구[2]를 만들어 바쳤다. 한 번은 어느 죄수가 나무에 목을 메어 자살을 하였다. 아버님은 저 나무를 잘라 버리면 좋겠다고 하셨다. “저 사람이 아직 거기에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그 사고를 방지하지 못하고 한 생명이 헛되이 사라진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아버님은 죄수들을 대할 때 “Hi, How are you" 하시며 언제나 밝은 표정의 인사를 나누셨다. 누구에게나 신심으로 대하시는 아버님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내 자신의 전도생활에 대하여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한 번은 비가 내려 밖에 나가지 못하고 침대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다. 그때 저스틴이라고 하는 한 죄수가 들어오더니 “또 책을 읽고 있는가? 그게 너희들 성경인가? 내 성경은 바로 이것이다.“ 하면서 잡지 한 권을 아버님 침대 위에 툭 던져 놓고 갔다. 그가 읽는 성경이 대체 뭘까 하고 일어나 봤더니 성경이 아니었다. 허슬러 매거진이라는 아주 난잡한 도색잡지였다. 동성끼리 서로 뒤엉켜 있는 상상할 수 없는 도색잡지를 자신의 바이블(성경)이라고 던져 놓고 간 것이다. 도대체 이분을 어떻게 보고. 나는 분한 마음에 그 잡지를 집어 들고 저스틴을 뒤쫓아가 뒤통수를 향해 던져줄 심산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였다. 그때 아버님께서 ”가미야마 괜찮으니 앉아라“ 하시며 말씀을 계속 읽도록 하셨다. 감정이 격해지니 말씀이 잘 읽혀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계속해서 괜찮으니 진정하라고 하셨다. 2개월이 지났는데 그 자가 나를 다시 보자고 하였다. ”카미(가미야마 회장의 애칭) 나 오늘 정말 열 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가왔다. 그에게는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편지를 내게 전해 주면서 여기에 얽힌 사연을 들려 주었다. 어느날 그는 자신이 애독하던 허슬러 잡지에 실린 아버님 비판 기사를 읽고 분개하였다. 자신이 교도소에서 지켜봤던 레버런 문과는 너무도 다른 내용이 거기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직접 항의편지를 작성하여 잡지사에 발송하였다. 이 잡지의 애독자로서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아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며, 자신이 목격한 문 목사에 대한 소감의 일단을 소개하고 있었다. 어느날 가족을 면회하던 장소에서 문 목사가 찾아온 부인과 가족을 대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분이 얼마나 아내 앞에 훌륭한 남편이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분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에게도 양심은 살아 있었다. 허슬러 매거진 사건 이후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그를 대해 주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통해, 그는 아마도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저런 어른께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내가 그를 쫓아가 항의를 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나는 배웠고,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돌변하여 아버님 편이 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이 내용을 언젠가 세상이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그 편지를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아버님은 형무소에서도 일요일 경배식을 통해 정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예를 올리셨다. 처음에는 종교지도자인 아버님에 대한 교도소 당국의 어떠한 배려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님은 전날 몸을 깨끗이 씻으시고 일요일 새벽 교도소 현관 앞 콘크리트 바닥에서 바깥 정원을 향하여 정성스럽게 경배식을 올리셨다.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을 섬기지만 이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체적으로 모시는 분이 과연 계신가. 나는 과연 부모님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반성하고 또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교도관에게 간청하여 아버님께서 종교적인 예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하였고, 그로 인해 작은 방을 경배식 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이 작은 방에서 의자를 갖다 놓으시고, 정성의 예를 다 갖추어 바닥에 엎드려 경배를 올리셨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경배를 드리셨는지,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한 번은 같이 수감되어 있는 빌 쉐퍼라고 하는 가톨릭 신자가 아버님의 이러한 모습을 목격하고 같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버님께 여쭈었고 괜찮다고 하셔서 그도 경배식에 같이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통일교 기도와 기독교 기도가 조금 다르다고 미리 설명을 하였지만 그가 경배식을 어떻게 이해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본인이 같이 하겠다고 하여, 경배 드리는 자세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서 착석해 계시는 아버님을 향해 같이 경배를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 빌 쉐퍼는 아버님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들려 주었다. 그는 처음에 아버님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댄버리에 입감하시는 날 그는 취재진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하여 쳐 놓은 가이드 라인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 그는 아버님에 대하여 ‘죽어버려’라고 하는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고백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실제 아버님이 교도소에서 생활하시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우리의 경배식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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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댄버리 계셨을 때 200명의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다. 형무소에 매점이 있었다. 복역자들은 매월 허락된 금액 내에서 생활에 필요한 칫솔 치약이나 과자류 등을 살 수가 있다. 겨우 70불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금액이었다. 매주 한 번 매점문이 열렸는데, 그때마다 아버님은 매점에 가셔서 가진 돈을 전부 써서 물건을 구입하시곤 하셨다. 그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미야마, 저쪽에 할아버지가 계시다. 가만 지켜 봤는데 누구도 방문하지 않는구나. 이것을 그분께 갖다 드려라.” 아 그런가.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물건을 가지고 할아버지께 가서 “이거 레버런 문이 가족이 안계신 것 같아 걱정하시면서 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해 드렸다. 이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갖다 주다 보면 금방 사놓은 물건들이 없어진다. 나도 내심 먹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아버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보다 앞서 중간에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되었다. 당시 공산주의자의 위협이 늘 상존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여러 교도소 동료들이 찾아와서 "카미, 걱정하지 마라. 네가 얼마나 레버런 문을 지켜드리려고 했는지 우리는 잘 안다. 이제 우리들이 지켜드릴 것이다."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아버님의 시트를 갈아 주는 자, 아버님 방으로 옮겨 같이 잠을 자 등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아버님을 지켜드리고자 하였다. 아버님과 내가 복역한지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들이 처음에 어땠는가. 경멸하는 표정으로 ‘헤이 문’ 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몇 주가 지나더니 아버님을 ‘미스터 문’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는 ‘레버런 문(문 목사)’으로, 그리고 내가 나갈 무렵에는 ‘파더(아버지) 문’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종에 종의 입장에서부터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려하며 생활하시는 가운데 장자권, 부모권을 복귀해 나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이러한 감옥에서도 목격하였을 때, 나는 "그렇구나, 우리들의 환경도 이러한 자세를 통해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출소하게 될 때 아버님으로부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아버님은 입감하신 이래 다음 신발이 지급될 때까지 다 낡아빠진 신을 신고 생활하셨다. 그리고 신발이 낡자 새로운 신발 두 켤레를 지급 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늘 한 켤레만 사용하시고 나머지는 잘 간직해 두셨다. 내가 신발을 직접 빨아 드릴테니 다른 신발로 갈아 신으시라고 하였지만 아버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나는 그 영문을 출소할 때 비로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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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가미야마

, 네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신발을 신고 나가라. 새로운 기분으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시며, 당신이 지급받아 쓰지 않고 보관해 두셨던 그 신발을 신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새 신발을 사 신겠다고 했지만, 아버님께서 너무도 권하시기에 신발 속에 가미야마라고 싸인을 직접 해 주신 그 신으로 갈아 신게 되었다. 신을 신고 끈을 매고 있는데, 아버님은 “가미야마, 아직도 신발끈 하나 제대로 못 매는가?” 하시면서 직접 끈을 매 주려 하셨다. 나는 “괜찮습니다.” 하며 한 발 물러 났는데 아버님은 다가 오셔서 직접 신발끈을 매 주셨다.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증거처럼, 아버님의 신발끈을 매드릴 자격조차 없는 나를 놓고 오히려 아버님께서 내 신발끈을 고쳐 매주신 것이다. 사실 끈을 묶는 방식이 아버님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횡으로 끈을 매듭지었는데 아버님은 수직으로 해 놓으셨다. 나는 출감하자마자 이것을 있는 그대로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댄버리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하나님을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기준으로 모시고 생활하시는 아버님을 직접 피부로 접하고 느끼면서 많은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어떻게 저렇게까지 가장 밑창에서부터 죄수들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시며 주위 환경을 바꾸어 나가시는 아버님의 실생활을 통하여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밖에 없었고, 진정으로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7 20, 이날은 진실로 만민이 기억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신앙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1] 칠일절 행사를 전후로 하여 6 29일과 7 2일 두 차례에 걸쳐 아버님께서는 가미야마 회장을 세워 세계주요 지도자들 앞에서 댄버리 간증을 시키셨다. 당시 본인은 이 간증을 직접 듣고 기록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주요 내용을 흐름에 맞게 재편집하여 정리하였다.

[2]일본의 전통적인 짧은 시 형식(번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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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이존형님의 댓글

가미야마회장은 참효자이시다.
미리서부터 준비된 자이시며
야쿠자세계 근성의 본고장인 일본인의 활복을 하는 정신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참이 무엇인지를
회원님들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장차 큰일을 해결하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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