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뿌리의 세 종교(유대교) 이야기⑥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교 생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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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의 세 종교(유대교) 이야기⑥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교 생존전략(敎育)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교 생존전략(敎育)
1) 1차 유대-로마 전쟁
전쟁의 발발은 66년 카이사레아에서 지역 시나고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리스인들과의 다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어를 할 줄 하는 로마 주둔군이 중재를 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한 대제사장의 아들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에게 기도하는 것과 희생을 바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이어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급습하였다는 것이다.
유대 속주의 장관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한 데서 비롯된 폭동은 마침내 66년 6월에 로마 세력을 완전히 유대에서 몰아냈다. 로마 수비대는 폭도들을 피해 왕궁으로 달아났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유대 내부의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다. 유대 북부를 다스리던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에서 가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퍼져 나가서,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유대의 항구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평소 유대에 감정이 좋지 않던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쟁 초기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자 군단장이었던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진압을 위해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데 실패하고 마침 11월이라 케스티우스는 안티오키아로 있는 총독 관저로 돌아왔고 그 직후 병으로 죽었다.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유대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당시 3개 군단에 6만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베스파시아누스 대군은 유대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유대 반군과는 달리,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할 로마군은 각지에서 이동해오는 군단과 동맹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사령관에 임명되고 반년이 지난 67년 5월에야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이 공략하면서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쪽으로 예루살렘으로 접근하여 반란을 진압해 들어갔다. 47일에 걸친 공방 끝에 7월 20일,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었는데(이때 사망자는 4만 명에 포로는 1,2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투항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 장로와 병사들은 로마군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자결하는 쪽을 택했고, 훗날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게 되는 요세푸스를 포함한 두 명만이 자발적으로 로마군에게 나와서 항복했다. 갈릴리 지역을 진압한 로마군은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겨 68년까지는 거의 모든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이 진압되고,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중단된다.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유대 쪽에서는 시설 보강이나 식량 비축 같은 방어 대책에 전념하면서도, 다가오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할 작정인 사람들에게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으며(오히려 예년처럼 유월절은 예루살렘에서 보내라고 장려하기도 했다) '유일신' 여호와가 지켜주는 예루살렘이 '이교도' 로마의 손에 떨어질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전쟁 재개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69년 7월 이후, 예루살렘 공략은 재개되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했으며, 재개될 유대 전쟁의 모든 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고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유대계)가 그 옆에서 도왔다. 또한 기존의 3개 군단에 앞서 유대에 패하기도 했던 제12군단이 더 추가되고, 아그리파 2세도 직접 참전했다. 한편 예루살렘 안에서는 열심당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결사항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잔인한 내전이 반란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열심당과 시카리오이들은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암살하였고 거의 모든 반란군 지도자들이 로마인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예루살렘 함락
전쟁 초기부터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이고,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벅 곳곳에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마군은 공격에 앞서 관례에 따라 '숫양(아리에스)'이 성벽과 부딪치기 전에('숫양'이란 공성무기, 성벽을 깨부술 때 쓰는 추를 가리키는 로마군의 은어이다) 항복한 자는 용서하겠다며 항복을 권고했지만 유대인은 듣지 않았다. 한편 도시 안에서는 공성전에서 평화협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웠는데 그로 인해 많은 도시거주인과 군인들이 굶어죽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공략을 위해 영구진지를 도시 주위에 구축하고 성벽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다. 누구든지 도시를 탈출하려고 하면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만 명이 도시 주위를 둘러싸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했다.
70년 8월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성 안으로 돌입한 로마군에 의해 불탔으며, 9월 8일에 시내에서의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 저항은 모두 끝났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는 유대 전쟁 모든 기간을 통틀어 9만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고 한다. 현재 로마에 서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당시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사다 항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예루살렘 서남쪽 30km 지점의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의 마카이로스,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마사다의 세 요새에서 급진파들은 항전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대 반란 진압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했던 군단 가운데 3게 군단을 시리아와 도나우 강 연안의 원래 주둔지로 돌려보냈는데, 71년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수습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남은 유대인 저항군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병사하고 그의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했다. 기원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요새가 함락되고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재의 참상은 처절하고 비참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 240만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110만명이 살육되거나 굶주려 죽었다. 엄청난 살상이었다. 당시 잡혀간 전쟁포로 노예만도 10만명이었다. 이들 노예들이 8년간 건설한게 그 유명한 콜로세움이다.
2. 敎育의 重要性을 認識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견한 사람은, 유명한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바리새파였던 그는 유대전쟁이 결국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임을 예견했다. 그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유대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평화를 얻기위해 항복하지고 주장했으나, 거절당하자 유대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 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포위되어 있던 예루살렘은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천명씩 사망했으나,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확신을 토로하고 함께 탈출계획을 짰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가 옷을 찢으며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존경하는 랍비의 시체를 도심 외곽에 매장해 도시에 전염병이 돌지 않게해 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결국 제자들은 랍비가 든 관을 메고 예루살렘을 나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관에서 나온 랍비는 장군에게 “귀하는 얼마 안 있어 황제에 등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평화롭게 유대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랍비의 예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반면 요청은 소박한 것이었다. 놀란 장군은 예언이 사실이 되면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했다.
그 뒤 네로 황제가 자실하고 뒤 이은 황제들이 살해되자 베스파시아누스가 69년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랍비의 예언이 성취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약속을 지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야부네에 유대학교 ‘에시바’를 허락했다. 이로써 유대교와 유대인들이 소멸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전쟁으로 바리새파를 제외한 다른 유대교 종파가 모두 전멸했다. 1차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 제사장, 대지주, 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되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제 유대교에서 사두개파의 전멸로 예배를 이끌 제사장 곧 사제가 없어진 것이다.
요하난은 바리새파를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20Km 지점의 야브네로 가서,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고 율법학교를 개설했다. 여기서 <토라>를 가르쳐 매년 소수의 랍비를 길러내 유럽 각지의 유대인 마을에 보냈다. 그들은 거기서 시너고구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며 유대인들에게 <토라>를 가르쳤다. 이것이 전쟁으로 패망한 유대인들의 생존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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