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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화17. 한국과 이슬람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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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화17. 한국과 이슬람

1. 처용의 아랍인 가능성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서기 880년경 동해바다에 나타난 처용은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여 누가 보더라도 외지인에 틀림없는데, 이를 두고 그 동안 아랍인일 가능성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가능성은 무엇보다 당시 통일신라기에 배를 타고 신라의 개운포(지금의 울산항)까지 올 수 있었던 해상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아랍상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론’에 근거한다.

845년경에 편찬된 아랍지리서 <왕국과 도로총람>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신라의 무슬림들에 대해 특징적이고 유의할만한 내용을 담고 잇ㄴ느 것은 디마쉬키, 알-누와이리, 알-마크리지 등의 저서인데, 이들은 놀랍게도 우마이야 왕조(661~750)의 박해를 피한 일부 알라위족들이 한반도에 망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2. 통일신라 시대의 이슬람문화

신라는 매년 1회이상 사절단을 장안에 파견하였으며, 703~738년에는 46회 이상의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해 당 조정의 각종 행사에 신라를 대표했다. 동시에 중국 기록에는 651~798년에 최소한 37회의 아랍 사절단이 장안에 당도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일본서기>753년의 기록에 의하면 장안에서의 궁중하례에 신라, 일본의 사절단 이외에도 아랍사절의 참석을 전하고 있어, 당 조정에서의 신라- 이슬람제국 사절 간의 접촉을 짐작케하고 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국에서 활동한 신라 불교승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인도를 내왕하면서 이슬람화되어 있던 서역 및 아라비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당나라 승려 의정이 쓴 <대당서역고법구승전>에는 인도와 서역 기행을 한 7명의 신라 구도승의 전기를 담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혜초는 인도에서의 순례를 마치고, 귀로에 이란, 아라비아, 서역 일대를 거쳐 727년에 장안에 당도했다. 특히 일부 불교 승려들이 해로를 통한 인도 순례시, 남방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슬림 상인들의 교역선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불교승들과 무슬림들의 종교적 접촉을 시사한다.

3. 고려 개성의 이슬람 성원

아랍 상인들의 고려 진출을 적고 있는 <고려사> 현종 15년(1024)에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열라자 등 100명이 와서 왕을 만나 토산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게 하였다. 또 그들이 돌아갈 때, 금, 은, 옷감 등을 선물로 주었다.”

1025년에도 “대식이라는 오랑캐 나라에서 하선과 라자를 중심으로 100명이 와서 토산품을 바쳤다.” 1047년에는 “대식국 상인 보나가 등이 와서 수은, 용치, 점성향, 몰약, 소목 등 귀한 물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한 뒤 돌아갈 때 비단 옷을 선물하였다.”

이슬람계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고려에 건너와서 정착해 살았던 것은 고려가 원나라 간섭을 받게 된 고려 말부터였다. 두 차례의 원. 고려의 합동군의 공격을 잘 막아서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일본에 비해, 같은 시기에 원나라 간섭 하의 고려에서는 무슬림의 대량 유입과 이슬람문화의 전래가 두드러졌다. 중앙아시아 위구르-터키계로 추정되는 무슬림들은 몽고의 고려 침공시에는 몽고군의 일원으로서, 후일 고려의 원 지배하에서는 몽고 관리, 역관, 서기, 시종문관 등의 직책을 가진 지배세력으로서 한반도에 유입, 정착하였다. 그들은 고려 조정의 벼슬을 얻거나, 몽고 공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점차 고려 여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동화의 과정을 거쳐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온 삼가라는 회회인이다. 그의 부친 경은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를 섬겨 서기가 되었고, 삼가는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고려에 귀화하였다. 그는 왕으로부터 장순룡이라는 이름을 받고, 벼슬이 장군에 이르렀다. 현재 덕수 장씨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위구르-터키계 출신의 무슬림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에 거주하던 회회인들은 몽골의 비호를 받아 왕실과 특수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체득한 국제경제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고려사회에 기여했으며,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4. 세종과 꾸란경

“세종대왕께서 정초 경복궁의 경회루 앞 뜰에서 좌우로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지긋이 눈을 감고 한 이슬람 원로가 낭송하는 꾸란 소리에 빠져 계시더라.” 어느 역사 소설에나 나오는 대목 같지만, <조선왕조실록> 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기록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한반도에 정착해 살고 잇던 이슬람 지도자들은 궁중 하례의식에도 초청을 받아 정례적으로 참석하였다. 이를 ‘회회조회’라 불렀다. 그들은 궁중조회에 참석하여 꾸란 낭송이나 이슬람식 기도를 통해 국가의 안녕이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했으니, 이를 ‘회회송축’이라 했다.

한편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슬람권과의 접촉으로 부분적인 이슬람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즈라력으로 알려진 이슬람 역법의 도입이다. 세종 때 편찬된 <칠정산외편>은 역법의 기원과 성격, 계산법에서 이슬람 역법인 회회역법의 원리에 따라 우리나라에 도입, 정착된 역법이었다. 그 외에도 조선 초에 집중적으로 개발된 과학기기나 의학 분야에 있어서도 당시 중국에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던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과 의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흔적들이 있다. 이슬람문화는 음악, 미술, 도자기 제조에서 회청의 사용과 창화백자 개발 등 예술 분야와 위구르 문자와 말의 교습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에 폭넓게 전파 되었다.

5. 오스만 터키 제국 밀사의 조선 보고서

조선왕조가 중국화와 유교사상을 강조하며 폐쇄적 보수주의로 흐르고,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은 서구의 해상세력이 이슬람세력을 누르고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이슬람문화의 한반도 접촉은 19세기 말까지 기나긴 단절기에 들어간다.

기나긴 동면기를 끝낸 첫 접촉은 1909년 압둘 라시드 이브라힘의 조선 방문이다. 1909년의 조선 사회상을 담은 오스만어로 된 <아시아여행 보고서>가 1913~‘14년에 걸쳐 이스탄불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오스만제국의 술탄인 압둘 하미드 2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터키인 지도자 압둘 라쉬드 이브라힘 공이 일본을 거쳐 1909. 6월에 조선을 방문, 약 10여일 간에 걸친 정보수집과 정세판단을 담은 활동기록이다. 그는 아시아 강점하의 투르키스탄의 자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 운동가였다.

30여 페이지에 달하는 <조선여행보고서>에서, 압둘라쉬드 공은 한일합방 직전의 조선이 처한 현실과 일본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국권을 빼앗겨 가는 안타까운 상황을 통해 우리 민중의 통한의 후회와 각성, 정치 지도자들의 친일 국가관 등을 비교적 소상히 적고 있다. 이 책은 차원을 달리하던 제3세계 무슬림의 눈에 비친 조선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나아가 당시 조선의 실상이 처음으로 오스만터키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에 널리 인식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조선 방문은 15세기 중엽 이후 단절되었던 한반도에서의 한-무슬림 접촉의 재개라는 측면과 조선의 실상이 제국 및 아랍세계에 널리 알려졌다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이스탄불에서 발간되었던 일간지에서는 한국 관련 사건 기사들이 상당한 비중으로 소개되기 시작 하였다.

6. 오늘날, 한국에서의 이슬람

현대 한국의 이슬람은 6.25전쟁으로 시작된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을 통해 처음으로 조직적인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한국 이슬람공동체의 바탕이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중동 산유국으로의 건설시장 진출과 석유의 자원화로 인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집중되었다.

지난 25년간 이슬람권에서 근로자나 주재원으로 1년 이상 장기 체류한 한국인의 연인원이 100만을 넘어섰고, 현재 서울에만 이슬람권 상주대사관의 숫자가 20여개 국에 달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슬람권을 보는 시각과 태도는 여전히 서구적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슬람에 대한 일반 연구물도 본질과 객관적인 사실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상황이라 한다. 특히 요즈음은 급성장한 한국 경제에 많은 이슬람권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어 많은 갈등을 야기시키는 것이 한국 노동시장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세계화 전략과 맞물려 계속 증가될 추세에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도 이 세계화가 21세기 세계사 특징 중의 하나로 언급될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어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급진전될 상황이다.

한국사회는 이제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 담론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제적 전략 차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다양한 목적과 문화를 가진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문화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문화적 담론으로 이어져야할 것이다.

사람들이 교류한다는 것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도 교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은 서로 다른 문화의 접촉을 뜻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이 문화적 교류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문화적 변동과정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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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문정현님의 댓글

6번 오늘날의 이슬람만 기억하고 살아도
식자층에 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려도
시급한 문제겠지요.

대숲님의 댓글

이슬람자료를 마저 분봉왕카페 '중동대륙'방에 지루하지 않게 사진을 첨부해서 마무리했습니다. 사무총장 이름 석자를 댓글에 올렸습니다.

parksinja님의 댓글

회원논단에 올려진 글을 프린터해서 모아두면 훌륭한 자료집이 만들어 질것 같습니다.
바쁘다는 팽개로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훌륭한 내용들입니다.
일일이 발취하는 일이..사실 엄청 힘든 일인데도 그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방을 지켜주신
정총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방을 지켜주십샤~~하는 간청을 드립니다.

이판기님의 댓글

말도마이소~ 내장산에 현지답사 가서 식당까지 예약 해 놓고 食言이 되어버려서리 식당 쥔 아줌마에게 욕 바가지로 먹었소이다. 준비한 음식재료를 사용치 못해 다 버렸다나 어쨌다나... 금년엔 무딘 칼을 함 갈아 보겠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획린 (獲麟)은 절필을 의미한답니다. . .

노나라 애공 14년 봄에 노나라의 서쪽지방인 대야에서 사냥했는데
숙손씨의 차부[車夫]서상이 기린을 잡았다.

상서롭지 않은 동물이라 해서 우인[사냥터 관리인]에게 주었다.
공자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기린이다"고 했으므로,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

기린이란 聖王의 시대에 나타나는 동물인데,
나타난 것이 적당한 시기가 아닐 뿐 아니라,또 우인이 이를 죽였다
공자는 개탄해 마지않았으며 [춘추]를 정리하던 붓을 놓았다.

그래서 절필 . . . . . . . .

선조의 공적이 훌륭하신 양성 이씨! 이판 도사 대감님! 새로운 단어를 익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거짓말 하나 섞지 않고, 이 나이에(성님들께는 죄송) 이 더운 여름에 졸업 논문 하나 써야 하고요, 또 기가 막힌 교육사업을 새로 공부해야 하는 때라서 시간이 좀 필요햇는데, 감사하게도 어느 분이 짬을 낼 수 있는 명분과 기회를 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필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저에게 등 떠밀거나 이 사랑방에 오면 뭐라도 생겨서 시작한 길이 아니었지요.

제가 좋아서 그리고 미쳐서 출발햇던 길인데, 누가 시비한다고 삐지고 뜻을 꺾는 그런 사람이라면, 버얼써 뜻길마저 그만둘 그런 사람들 아니던가요? 제가 좀 '정치적 안목'이 아주 꽝은 아닌 까닭에 명분과 기회를 잘 이용하려는 그런 위인이기도 함을 느끼실 겝니다. 자주 크신 가르침을 청해 듣겠습니다.

올 가을 쯤에는 옛날에 食言이 되어버린, 내장산 단풍 귀경 좀 시켜 주시기를 '별 부담없이 기대'하겠습니다. 07-06 *

정해관님의 댓글

지금까지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눈길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역시 이슬람은 우리들에게 머나먼 나라요 역사 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중세 유럽과 서아시아를 기독교와 양분한, 무시할수 없는 엄연한 실체의 역사였음을 보게 됩니다.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근세에 서양문물을 먼저 도입함으로써 오랜기간 우리의 신세를 졌던 저들이 먼저 근대화되어 국가 문명이 역전되었던 바와 같이, 기독교와 이슬람도 서로가 문명의 우위를 차지했던 역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원하시는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이슬람권은 가장 정성들여야 할 대상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록 상식적인 차원의 간단한 소개였지만, 아라비아 사막과 석유 자원 외에는 그 문화와 역사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우리 세대로서 지구촌 에덴의 한 구석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섭렵해 주시었기를 소망해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형제들 가운데 이슬람권에 국가메시아 혹은 분봉왕으로 부임하시게 된 분들이 계셔서, 앞으로 더욱 실감나는 저들의 역사와 문화가 소개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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