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22.[부록]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조선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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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22.[부록]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야망의 사나이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하여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난을 일으킴으로써 피아간에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병농분리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 당했거나 그 일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다이묘 가운데도 해외의 영토에 관심을 갖는 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무역상들은 회외무역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히데요시의 무력을 이용하여 해외에 진출하려는 강한 욕망마저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전국시대의 전란이 수습된 후 몰락한 다이묘와 호족. 일반무사 등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그들에게 나눠줄 수 밖에 없다고 생각 하였다. 그 위에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한 후 세계에 그의 위엄을 떨쳐보겠다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 결국 복잡한 국내사정과 그의 과대망상이 조선침략이라는 엄청난 전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다이묘들은 이예야스 같은 조선정벌 계획에 찬동하지 않는 자. 가토처럼 새로운 영토에 희망을 거는 자. 고니시처럼 장래 무역을 위해서는 출병을 하는 것이 득이 될지 몰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일단 결심한 히데요시의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충천한 의기와 강력한 태도 앞에 모든 의견은 물거품 처럼 사라지고, 결국 동원령이 내려지고 이키 섬이나 쓰시마 섬에는 16만의 대군이 집결하여 히데요시의 출격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1592년 4월 12일 고니시와 소 요시모토(宗義智)가 거느리는 제1군은 쓰시마를 떠나 다음날 새벽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부산포를 향해 돌진하였다.
부산성을 지키던 첨사 정발(鄭撥)은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배를 보고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침공이다. 성문을 굳게 잠그고 부산성의 군사 3천명과 민병은 모두 성위로 집결하라.”
군사들이 성위로 집결하는 동안 일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높은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조총을 마구 쏘아대니 그 소리는 마치 콩을 볶는듯 하였다. 조선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맞아도 즉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조총을 맞으면 즉사하니 처음 보는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가고 있었다.
“명나라를 칠 터이니 우리에게 길을 터주오. 만약 불응시에는 모조리 도륙하겠소.” 성 밑에 이른 제1군의 지휘관 고니시가 항복을 권했으나 정발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계속 항전하였다.
고니시는 부산성을 함락하고 아침밥을 먹으려 했으나 부산첨사 정발의 필사적인 항전으로 하루 해가 다 지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날이 저물자 일단 배로 철수 하였다.
4월 14일 일단 철수했던 고니시의 제1군은 바로 근처에 있는 다대포를 쉽게 함락시키고 동래성으로 향했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성 밖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우는 한편 울창한 잡목으로 성을 위장하여 항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날 동래성 아래에 육박한 고니시는 흰 나무 판자에 다음과 같은 큰 글자를 써 남문 밖에 내세웠다.
전즉전(戰則戰) 부전(不戰)가아도(假我道) ‘싸울 테면 나와 싸우고 싸우지 않을 테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
이를 본 송상현의 답은 다음과 같다.
사이(死易) 가도난(假道難)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는 일은 어렵다’
송상현의 결의를 확인한 고니시는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일군은 함성을 지르며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그들의 함성은 점점 높아 갔고 동래성의 동문. 서문. 북문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남문에서 송상현은 덤벼드는 장수들의 목을 치며 독전하였으나 압도적인 병력과 조총의 위력을 당해낼 수 없어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고니시도 송상현의 소식을 듣고 감복해 마지 않았다.
한편 히데요시는 히젠의 나고야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고니시의 제1군에 이어 가토를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를 제3군으로 편성하여 계속 조선에 상륙시켰다.
동래성을 함락시킨 고니시의 1군과 가토의 2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충주에서의 저항도 물리치고 불과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을 함락시켰다. 그 후 일군은 두 패로 갈라져 고니시는 평양방면으로, 가토는 함경도로 진군하였다.
나고야의 총사령부에서 승전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자못 의기충천하여 천황을 중국의 북경으로 모시고 자신은 영파(寧波)로 이동한다는 등 성급하게 중국 정복 후의 꿈과 같은 계획을 발표하는 과대망상적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조선 출병 후 불과 20일에 한양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자 급히 중국 정복 계획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천황은 중국의 수도 북경에 맞이한다.
2. 북경 주위에 천황의 직할지를 만든다.
3. 일본은 황족이 다스리게 한다.
4. 일본과 중국에 각각 관백을 둔다.
5. 조선 국왕을 일본에 이동시킨다.
6. 모든 다이묘에게는 포상으로 많은 토지를 하사한다.
7. 히데요시는 영파에 주거를 마련한다.
8. 인도 정복에 착수 한다.
한양을 함락시킨 일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1군의 고니시는 평양을 함락시키고, 2군의 가토는 함흥을 거쳐 회령까지 진출하여 조선의 두 왕자를 포로로 하는 등 호남을 제외한 조선 강토가 일군의 발굽 아래 유린되었다. 선조임금은 의주까지 몽진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육지에서는 연전연승하여 파죽지세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해상에서는 연전연패하였다. 조선의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뛰어난 작전과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의 위력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 수군은 일군의 해상활동을 완전 봉쇄하였다.
조선수군은 1차는 옥포. 2차는 사천. 당포. 당항포. 3차는 한산도 앞바다. 4차는 부산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모조리 쳐부수어 치명타를 주었다.
특히 한산도에서는 일본수군 60여척, 부산 해전에서는 100여척이 섬멸됨으로써 제해권은 완전히 조선 수군의 수중으로 넘어 왔다. 그 후 일본 수군은 여실히 싸울 기세를 잃었으며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순신의 군대에게 승리한 일이 없었다.
한편 국내 각지에서는 일본군의 침략행위에 분노를 느낀 애국지사들이 군사를 모아 일군에 대항하였다. 유생 조헌은 금산에서,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령. 창녕 등지에서, 김시민은 진주싸움에서, 호남에서는 고경명. 김천일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묘향산의 노승 서산대사는 제자 사명당과 함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 전투에서 일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원병요청을 받아들여 이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 삼아 구원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그가 구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것은 1592년 12월 25일이었고 평양탈환 작전에 나선 것은 1593년 1월 8일이었다.
이여송은 대포와 화전으로 무장한 부대를 전방에 내세워 총공격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친히 진중으로 말을 달려 직접 지휘에 나섰다.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군은 조총을 쏘아대며 완강히 저항 했으나 명군이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 앞에 맥을 쓰지 못하고, 대동강을 건너 한양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 했다.
이여송은 평양을 탈환 한 후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수복하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원군을 이끌고 내려 갔다. 그가 거느린 원군은 직속부대인 요동병과 남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남방병은 대포와 화전 등 강력한 무기로 무장된 부대였다.
그런데 한양탈환 작전에서 이여송은 직속부대인 요동병만을 거느리고 갔는데, 공을 탐하다가 예기치 못한 패전을 맛보게 되었다.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이여송 자신도 위급한 상황에 몰리는 순간 부장의 육탄방어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벽제관에서 패배를 맛본 이여송은 주력부대를 개성까지 후퇴시키고 이 난을 강화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 무렵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거느리는 1만여 명의 군사가 명군과 힘을 합쳐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에 이르렀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일군은 10만의 병력을 좌우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권율은 배수진을 치고 일당백의 용기로 맞서 수적으로 압도하는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일군은 계속해서 제2대를 공격에 투입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고 용병 고바야카와(小早川)를 다시 투입하였다. 권율은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아 어깨를 정통으로 맞히니 일본군은 할 수 없이 고바야카와를 떠메고 후퇴하였다.
계속되는 패전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한양에 있던 우키타(宇喜多)가 급히 군사를 몰고 행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죽음을 무릅쓴 권율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 행주산성의 승리는 이순신의 한산도 싸움, 김시민의 진주 싸움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빛낸 큰 승리였다.
한편 강화의 길을 모색한 이여송은 유격장군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고니시. 가토 등과 강화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여송은 궁지에 몰린 고니시. 가토 등과 담판을 짓고 일본군을 한양에서 철수시킬 속셈이었다.
사실 이 강화문제는 근본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군량의 현지 조달이 어려워지고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의 길마저 막혔으며 한양주둔 일군의 사상자가 37%에 달하였다. 그 위에 일군 내부에서 전쟁을 기피하는 풍조마저 일고 있었다. 휴전을 전제로 한 강화교섭이 진전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여기서 양측 수뇌부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히데요시가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삼는다.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앞으로 일본에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명나라 요구 조건은 아래와 같은 3가지 였다.
1. 조선에서 완전 철병할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관백 히데요시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강화의 주역인 심유경과 고니시는 이같은 양측의 주장이 피차 상대국에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명백하므로 자국에는 모두 숨기고 있었다.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에게 사죄문을 위조하여 바쳤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되는 일이며 그리되면 신하로서 영구히 조공을 바치겠다 하옵니다’
이 사죄문이 위조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명나라 조정에서는 검토 끝에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에서는 책봉정사와 부사를 임명하여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국서와 일본 국왕지인이라 새긴 금인, 그리고 명나라의 관복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명나라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자 히데요시는 강화조건을 명나라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명나라 사절단을 접견하였다.
히데요시를 속여 강화를 성립시키기 위한 고니시와 심유경의 계획은 이때까지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그러나 ‘특봉이위일본국왕’ (特封爾爲日本國王)이라는 국서를 본 히데요시는 그가 제시한 7개 조항이 무시되었음을 직감하고 크게 노하여 제2차 출병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른바 1597년에 있었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히데요시의 제2차 출병 때에는 이미 명나라 정복의 꿈은 포기하고 오로지 조선 남부의 영유가 그 목적 이었다. 그러나 그의 2차 조선침공은 1차 때와는 그 상황이 아주 달랐다. 의병과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 군사의 재출동으로 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결국 다음해인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하여 전군이 철수함으로써 전후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1592년에 시작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일본역사에서는 분로쿠(文祿). 게이쵸(慶長)의 전쟁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7년에 걸친 이 전쟁은 조선인에게 무한한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대일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으며 조선왕조의 쇠퇴, 청국의 발흥, 명나라의 쇠미를 몰고 왔다. 그리고 침략자 일본에게도 이렇다 할 직접적 소득이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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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노나라 애공 14년 봄에 노나라의 서쪽지방인 대야에서 사냥했는데
숙손씨의 차부[車夫]서상이 기린을 잡았다.
상서롭지 않은 동물이라 해서 우인[사냥터 관리인]에게 주었다.
공자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기린이다"고 했으므로,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
기린이란 聖王의 시대에 나타나는 동물인데,
나타난 것이 적당한 시기가 아닐 뿐 아니라,또 우인이 이를 죽였다
공자는 개탄해 마지않았으며 [춘추]를 정리하던 붓을 놓았다.
그래서 절필 . . . . . . . .
선조의 공적이 훌륭하신 양성 이씨! 이판 도사 대감님! 새로운 단어를 익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거짓말 하나 섞지 않고, 이 나이에(성님들께는 죄송) 이 더운 여름에 졸업 논문 하나 써야 하고요, 또 기가 막힌 교육사업을 새로 공부해야 하는 때라서 시간이 좀 필요햇는데, 감사하게도 어느 분이 짬을 낼 수 있는 명분과 기회를 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필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저에게 등 떠밀거나 이 사랑방에 오면 뭐라도 생겨서 시작한 길이 아니었지요.
제가 좋아서 그리고 미쳐서 출발햇던 길인데, 누가 시비한다고 삐지고 뜻을 꺾는 그런 사람이라면, 버얼써 뜻길마저 그만둘 그런 사람들 아니던가요? 제가 좀 '정치적 안목'이 아주 꽝은 아닌 까닭에 명분과 기회를 잘 이용하려는 그런 위인이기도 함을 느끼실 겝니다. 자주 크신 가르침을 청해 듣겠습니다.
올 가을 쯤에는 옛날에 食言이 되어버린, 내장산 단풍 귀경 좀 시켜 주시기를 '별 부담없이 기대'하겠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서두에서 언급한바 있거니와 우리 세대는 일본이 말 그대로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정학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근세사의 특수성 때문에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거나 접해 볼 기회가 쉽지 아니한 세대였지요. 특히나 섭리를 아는 우리들은 먼 나라가 결코 아닌데도 '몰랐던 점이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관심의 필요성을 느껴, 복잡한 역사를 주관적으로 줄여 주마간산 식으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류의 홈피나 카페 같은 곳에서 긴 문장을 읽어가며 '공부'한다는 것은 넌센스 인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우리 사랑방은 우리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참고하실 분이 비록 소수라할 지라도 또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는 기대로, 독수리 타법임에도 보람으로 느껴 왔습니다. 끝까지 눈길을 주신 분들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일본의 고대- 근세사'이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대로 마무리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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