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소유한 이타정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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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소유한 이타정신의 가치
주저없이 불 속으로 뛰어들어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그는 분명 영웅이었다 생각합니다. 그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찬사를 받았고, 그자리에서 답례로 내놓은 그의 말은 우리에게 더욱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해여할 일을 당연히 했을 뿐이라며 또 다시 그같은 상황을 맞딱뜨린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용기짙은 겸손의 언어로 자신의 심경을 대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3층으로 돼있는 원룸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그 불 속으로 뛰어들어 10여 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한 카자흐스탄 출신 알리아크바르를 대해 쓴 어느 네티즌의 댓글입니다. 그외 많은 네티즌들도 답글을 달았고, 그들 역시 감동먹은 자신들의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찬사의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이타정신으로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었던 그의 길을 의롭다 여기며 그같이 찬사의 마음을 아낌없이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카자흐스탄 출신인 그는 일일 노동자가 되어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에 있는 3층 빌라의 원룸에 세 들어 생활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3월 29일 밤 11시 경, 그 빌라가 화재에 휩싸여 불타고 있을 때, 그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을 본 그는 당황하면서 급하게 뛰어 다닙니다. 위험에 뻐진 그 상황을 그 빌라에 세들어 있는 거주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의식에서 였습니다. 성난 야수처럼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거룩한 용기는 그를 더 깊은 불 속으로 뛰어들어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노크를 하면서 뛰어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한 집을 지나치지 못한 채 문 앞에 멈춰섰습니다. 집안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급했습니다. 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음소리만 들려나올 뿐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순간 그는 그 건물 주인에게서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열쇠를 가져와 열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열쇠가 맞지 않아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급한 김에 그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외벽에 설치된 가스 배관을 타고 불길이 치솟고 있는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두드리면서 열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창문은 열리지 않았고, 신음소리만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결국 그는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갔습니다. 그러나 그사람은 구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연기와 불이 이미 그 방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고, 그같은 화상을 입는 위험 속에서도 이웃을 구하려는 그의 희생정신은 결국 10여 명의 주민들을 무사히 대피시켜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타인을 위한 그의 희생정신과 이타주의 정신은 그렇게 한 순간에 일어났고, 많은 인명을 구하게 됩니다.
그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추방의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같은 그의 안타까운 처지는 언론을 통해 보도 되었고, 네티즌들은 그를 응원하면서 용기를 내라는 답글과 함께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의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청원은 그의 그같은 신분을 풀어주고 한국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원은 단 시일 내에 수만명으로 늘어났고, 청와대는 그에따른 상응의 액션을 취해주었습니다.
그탓으로 정부의 의사상자심사위원회는 그를 의상자로 인정해주면서 법무부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게 하였고, 그는 결국 심사를 통과하여 영주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네티즌들은 영주권을 얻은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타인을 위한 그의 희생과 이타주의 정신은 우리사회가 본받아야 할 고귀한 값을 지닌 사례로서, 그가 얻은 영주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가치를 지닌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으로 헌신의 길을 걸은 그의 이타정신은 많은 네티즌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어 우러르게 되었고, 높이 기려주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일련의 이같은 사회현상을 바라보면서 종교의 궁극적 가치는 물론, 사회의 도덕적 최상의 가치 또한 헌신이나 희생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이타정신에서 울어난다는 걸 더욱 느끼게 되었고, 그같이 느낀 부분을 귀하다 여겨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비록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 행동이었다 할지라도 크고 작음을 넘어 상대를 위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행동이나 그같은 삶의 정신은 그 자체로 인간 존재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하여 살라" 하신 말씀의 실천으로 헌신과 희생의 길을 스스로 택해 걸으면서 그같이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나 사건이 담긴 기사와 글을 대할 땐, 그 분과 그 분의 삶을 공경하여 우러러보고 싶었고, 그같은 삶을 새기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칫 죽을 수도 있는 불길 속에 뛰어들어 이웃의 생명을 구한 그의 이타정신의 실천스토리가 그래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위하여 살라" 하신 말씀이 실제 이뤄지고 있는 현장으로써, 거룩한 사건의 실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입니다.
그때문이 이같은 사건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같은 측면에서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건 하나를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7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이 아니었던가 싶으니까요. 476명의 탑승객을 태운 청해진해운 소속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해상에 침몰되어 전복된 사건 발생일 말입니다.
무려 304명을 싸늘한 바닷물에 수장시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칠흑 같은 그 바닷물 속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잠기고 있는 데도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그대로 기다리라는 거짓 방송을 되풀이 해대면서 자신들만이 구명선에 오른, 그야말로 인간이하의 비정한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극단적 이기주의에 의한 범죄 행위를 뚜렷이 목격했던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이기심에 의한 극단적 범죄 행위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타정신을 발휘하여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타인의 생명을 구해낸 의인의 길을 걸었던 분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분들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같이 희생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몇분 꼽을 수 있으나, 끝내 살아나오지 못한 채, 자신을 그 물 속에 수장시켜가면서까지 타의 생명을 구해내기 위해 최선의 길을 걸었던 의인 박지영 승무원의 거룩한 이타정신을 대표적으로 떠올려봅니다.
배가 기울어져 물이 차오르고 있을 때, 선실 매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이 승무원은 선실 밖으로 누구보다 먼저 빠져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구명조끼를 찾아나섰습니다. 그리고 찾은 그 조끼를 침착하게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그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위층으로 올려보냈습니다. 빨리 올라가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대피시켰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질서있게 대피시켜 그들을 살려냈던 것입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위층으로 대피한 학생들은 그녀의 그같은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물 속으로 점점 뻐져들고 있는 그녀의 두렵고 무서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타는 목소리로 수 없이, "언니, 언니, 하면서 그 언니를 큰 소리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녀의 위험함을 일깨우고, 그녀를 그 위기로부터 구해내려 했던 것입니다. 해서 그들은 "언니 위험해요"를 수 없이 되풀이 외치면서 그녀가 그냥 그대로 빠져나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그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언니만이라도 그냥 빠져나와야 한다는 피치못할 결단으로 그토록 부르면서 간청하여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시간에도 그녀는 답했다 합니다. "선원들은 맨 나중에 나가야 되는 거야, 맨 나중에"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 다 구해낸 담에 나갈께" 라는 말을 거듭 했다 합니다. 참으로 눈물없이 대할 수 없는 거룩한 장면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 칠흑같은 어두움으로 물이 차오르고 있는 데도 그녀는 그랬다 하니까요. 그녀는 끝내 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아니 빠져나오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사명의식의 화신이었던 그녀는 아직 대피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학생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혼자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정신으로 그 사명의 길을 죽음으로 걸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구명조끼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의인 박지영은 그렇게 영영 그들 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위하여 존재하고, "위하여 살라" 하신 성현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한 눈물겨운 희생의 길을 걸었던 그녀를 그들은 그렇게 바라만 보면서 떠나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에 의인이 따로 있고, 어디에 거룩한 분이 따로 있겠느냐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바로 그 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타성에 의한 이타주의 정신을 온 몸에 지닌 채 실천했던 분으로써, 위하여 살라는 그 길을 주저없이 걸었던 분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였습니다.
무의식의 의식이 곧 그사람일 수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획되고 계산되지 않는 은연중에 울어나는 마음이나 생각, 그리고 그 행위가 곧 진실된 그사람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길임을 훤히 알면서도 그 거룩한 이타정신의 길을 걷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뭔가의 충동에 의해 굳힌 그 결단의 정신과 그것의 실천이 있는 그녀의 그 모습을 그같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타고난 천성으로써 천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같이 큰 결단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평소의 삶 속에서 길러지는 생각과 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보다 후자의 관점이 더 타당할 지 모른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과거의 산물이고 과거의 현상일 뿐, 현대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뜻과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강남에서 나고 자라, 그곳의 교육절차와 과정을 이수해야 비로소 사회의 엘리트 층으로의 신분상승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채워진 우리사회의 현실이 그것의 한 예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낙후된 시골의 뒤떨어진 교육과 그 과정 만으로는 강남 출신 만큼 우수한 사회인으로의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같은 측면에서 승무원 박지영의 거룩한 희생으로 인한 이타정신의 삶을 더욱 높이 기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녀의 그같은 희생적 이타정신이 그녀의 삶을 통해 길러졌고 향상되어진 것으로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타를 위해 살아가는 이타정신의 생이 인간 삶의 근본이고, 인간 존재가치의 본질이라 생각할 때, 자신을 바닷물에 수장시켜 죽어가면서까지 타인의 목숨을 구해낸 것으로 위하여 사는 삶의 본을 보이고 간 그 행적을 누구라서 거룩하고 의로운 행함이 아니었다할 수 있겠느냐 싶었습니다.
하여 이같은 사건을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면서도 자기 희생으로 이뤄지는 이타주의적 삶은 커녕 이기심의 유혹마저도 떨쳐내지 못한 채, 어쩌면 그 힘에 끌려 살아왔는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문에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의 목숨을 구해낸 거룩한 사건으로서의 그녀의 길을 동경하면서 공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솟아 오르는 이기심을 누르고 이타정신을 길러내고 싶은 마음과 힘을 그로부터 구해보자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경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몫을 양보하면서 그에게 먼저 숙이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써, 일상에서 이뤄낼 수 있는 작은 것조차도 해내지 못한 채, 살아온 삶에 대한 자책의 마음이 그 사건으로 인해 든 까닭이기도 합니다. 좋은 세상이나 좋은 사회는 물론, 좋은 가정 또한 상대를 위하는 배려의 마음으로서, 그를 위하는 이타정신이나 이타주의적 행함없이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향해 다가갈 수조차 없다는 믿음을 갖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위하여 살라" 하신 말씀으로서, 그 위함 실현은 좋은 사회나 좋은 가정구현의 바탕이고 버팀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같은 버팀목이나 바탕을 기초하지 않고 좋은 사회나 좋은 가정을 바란다면,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한 거품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같은 측면으로서, 죽음으로 타인의 생명을 구한 그녀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 사건이 죄의 장막을 찢어버린 대속의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는 예수의 희생적 죽음의 가치와 같은 선상에서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는 그리스도로서의 본질적 사명은 그와 다르다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신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인명을 구했다는 측면에서 그녀의 죽음의 가치를 그와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해석의 가치는 물론 다르다할 것입니다. 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사건을 리틀 그리스도 사건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기독교는 대속의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는 스승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값을 믿음과 신앙으로 얻을 최상의 가치로 고백하게 하였고, 그것을 기초하여 초기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추구할 최상의 가치를 이타정신에 의한 고난과 죽음에 있다 고백하면서 그 길을 걸었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위하여 살라시며 그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시고 몸소 그 길을 걸으신 참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원리와 말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같은 고백을 기초한 삶의 의식과 시선으로 승무원 박지영의 구명사건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종교 최상의 가치는 고난과 희생의 값이 치러지고 드러나는 곳으로부터 비롯되어진다는 것으로, 종교지도자와 리더들의 최상의 덕목과 권위 또한 이타정신으로써, 그 고난과 희생의 값이 치러지는 곳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권위를 신성시하고 리더는 맴버에게 순종이나 따르라는 언어의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도 이같은 가치의식에 의해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였습니다. 종교마다 그나름의 순종과 따름의 미덕이 논리적으로 체계화돼있는 도그마가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같은 사건은 종교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해되어지고 있는 사건으로써,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불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을 구해낸 알리아크바르를 대한 시민들의 애정과 공경의 시선이나 정부의 조치에서 그같은 현상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시일 내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청원의 댓글에서도 그같은 의미를 족히 읽어낼 수 있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희생으로 인한 이타정신의 가치와 행적을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면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선의 절대적 가치의 한 부분으로 동의하고 공경하여 받들어주면서 기억해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죽음이나 헌신에 의한 그들의 "위하여 살라" 하신 말씀의 실천은 이타성의 이타주의와 이타정신의 한 부분으로써, 종교와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초림 그리스도와 재림주님의 가르침이면서 바라시는 바가 아닐까 싶어 그들의 스토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리해보았습니다.
미국에서
2021년 10월 1일
전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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