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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환 회장 간증과 ILC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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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환 회장 간증과

ILC(International Leadership Conference) 보고

12월 17일 워싱턴 쉐라톤 호텔 15층 참부모님 공관에서

본래 유교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기독교에 인연이 문중에는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고루하고 전통적인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얼마나 왜정 때에 어렵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해방 직후에 연달아 일어난 전쟁으로 희생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어렵게 살았습니다. 피난을 갔다 오니, 집이 전부 불에 타 없어지고, 몽땅 폐허의 상황이 된 힘든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 공부를 교실에서 하지 못하고 개천에서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경북중고를 졸업하고 경북대 법대 3학년 때 말씀을 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출세라는 것이 머리에 가득하고 외적인 출세를 기대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원리를 대하는 심정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어렵게 살았는데, 이 원리를 알고 나니 이스라엘과 대비가 되고 미래에 한국과 한국 사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고등학교 2,3학년 때 가정이 어려워 서울 유학도 꿈도 꾸지 못하고 대구를 떠나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영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계가 있다면 알고 싶어 스승을 찾고 목사님, 스님을 찾았습니다. 만족할 만한 것은 못 되었지만 불교 쪽이 조금 와 닿았는데, 원리를 알게 되자 모든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그 원리를 저작하신 분은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계는 누구나 알 수 있고 연관 맺을 수 있다는 원리 내용은 놀라움 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운몽, 박태선 장로 등의 영적역사가 있어 그들만의 역사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인간이 영계를 접할 수 있다는 원리에 대해 굉장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대구교회에 입교를 했는데, 그 때 시원하게 강의를 들을 수도 없어 원리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면 될 것이라는 한 식구님의 말을 들었는데, 기도도 잘 모를 때고 금식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간단하게 정성을 들였는데 너무도 쉽게 답을 받았습니다.

밤 2시에 큰 불덩어리, 아니 태양 같은 것이 들어와서 나를 다 태우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났는데, 직감적으로 '이놈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의심을 해!'하는 느낌이 들어 꿇어 앉아 잘못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꿈을 연속으로 많이 꿨습니다. 해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상을 치를 때 입는 누런 옷을 입고 형체도 없는 초라한 많은 무리들이 울면서 지나가는 꿈 등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길몽도 아니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습니다.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흰 광채가 나고 한 무리가 영광을 돌리는 꿈도 나타났습니다.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가 교회에 있는 분에게 물었더니, 섭리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2천 년 전의 내용과 앞으로 될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경지에 접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참아버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대구에 순회 오셔서 처음으로 뵙게 되었습니다. 부흥회중 휘호를 쓰시는데, 쓰시는 분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그 휘호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바깥에 있다 들어가서 내가 '이야! 명필이다'라고 하니 주위에서 너무 의아하게 보기도 하였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강의를 듣기는 들었는데 제대로 듣지는 못했습니다.

제1회 전도사 40일 수련을 하는데 원하면 참석하라고 하는 전보를 받고 참석했습니다. 무모하리만큼 주변정리를 하고 작은 가방을 챙겨서 수련에 참석 했습니다. 서울 가서 본격적인 참아버님의 지도를 받고 원리강의를 듣는 수련을 참석했습니다. 당시 나는 막내고, 지도자도 아니지만 특별히 참석을 했습니다.

당시 참아버님께서는 한 강좌도 거르지 아니하고 유효원, 안창성 강사의 강의를 들으시고 말씀을 해 주시면서 지도를 해주셨는데, 당시는 그 귀한 말씀을 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깨닫고 3회 수련을 다시 한 번 받았습니다.

그 이후 하루 아침에 지도자가 되어 평택교회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척자를 따라 가서 도우면서 수족노릇을 하겠다고 했었는데, 평택으로 참아버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교회는 길가에 천막을 쳐놓고 있었고, 식구 몇 명이 있던 곳이었는데, 그렇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젊고 힘이 넘치고 뭐든지 해보겠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입교는 먼저 한 식구들이 있는데 원리강의는 못하는 것을 보고, 평택에서 저녁마다 원리강의를 하면서 원리를 전파했습니다.

청강자만 생겨도 그 주변에서 욕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길을 걸어가도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는데 청강자 한 사람 데려오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전도사는 강의를 하겠다고 하는데, 사람도 데려오지 못하니, 있던 식구들도 어려워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1년 반 만에 일곱 번을 평택교회에 순회 오셨습니다.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민망한 것은 오시면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주로 나를 놓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그 귀한 말씀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한 유지가 있었는데 헌금을 하려고 해도 부인이 그렇게 반대를 하니, 도대체 어떻게 내가 이런지 용산의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입교직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들어와서 손금을 봐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나도 얼결에 보았는데, 고등고시에 오직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교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라서 당시 모두가 황당해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용산 어디엔가 갔었습니다. 적산가옥이었고 다다미 집이었습니다. 탁자가 있었고, 보살이 나오는데, 책상까지 오는데 거리가 3-4미터 되는 짧은 거리인데, 큰 소리로 저기 앉아 있는 젊은 사람 말을 들을 운명이니 저기 있는 청년 말을 들을 팔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얼결에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자를 한 번 적는데 그 글자로부터 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첫말이 통일교인이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신흥교단인 통일교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때였는데 첫 번에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통일교회로 인도한 분이 나씨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나순열씨의 인도를 받음) 순간, 그 보살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나를 사방에 석가모니 네 제자가 따라다니면서 보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내 나이는 23살로 교회에서도 막내중의 막내 입장에서 전도사 하던 사람으로 군대로 보면 이등병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네제자가 호위한다는 것입니다. 연이어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이야기는 앞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전도사를 하면서도 밥 세끼를 먹지도 못하고 버스비도 없는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믿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온 세상에 문 선생이 위대한 분으로 등극을 하는 굉장한 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도저히 감이 가지 않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 귀한 문 선생인데, 보살님은 왜 그 뜻을 따르지 않느냐? 고 물으니 사람은 타고난 사명이 다르다는 대답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불자를 인도하는 사명이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영계가 이렇게 나에게 생생하게 불 받고, 몽시 받고, 간접 체험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오른쪽에서 열이 납니다. 오른 팔이 어깨 진동을 느낍니다. 나쁜 곳에는 왼쪽 팔에서 찬바람이 나옵니다. 임지를 가게 되면 대표사탄이 칼로 여러 위협을 하는 것을 보면서 영계를 점점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50여 년이 지났지만, 내가 바라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주셨습니다. 하늘이 먼저 주셨습니다. 바랄 여지가 없이 먼저 주셨습니다. 그 주신 은혜를 다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 보면 큰 은혜였음을 알게 되곤 합니다.

조금 깨닫고 노력을 하면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어려움이나 고비가 있었지만, 식구들이 말하는 어려움같이 크게 방황하거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이 길을 왔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를 올리는지 모릅니다. 입교당시에 타락론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내 생활은 처음부터 사위기대의 귀한 가치를 안 것은 아닙니다. 영계를 충격적으로 받고 한국에의 소망과 희망으로 입교를 했는데, 사위기대 이상을 알게 된 것은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입니다. 당시에는 축복이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가정을 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입니다. 결혼을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튼 공부하다 말고 쪽지 하나 놓고 내가 가문에서 사라져 버린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시골마을 곽씨 출신으로는 제1호 목사가 된 것입니다. 집은 집대로 반대할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나올 때 써놓은 메시지는 ‘그냥 뜻한바 있어 가니,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똑같은 아들이니 5년간만 휴가를 주었다고 생각을 하고 이해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5년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으로 알고 5년이라고 썼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올라 오셨습니다. 매일 욕을 먹는 청파동 시절입니다. 앉으신 아버지가 하는 첫 말이 '이제 5년이 되었다' 였습니다. 엄한 유교 집안으로 효성하는 집안이였는데, 아무튼 그 때 아버지가 간청한 것은 내가 장자니까 결혼이라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결혼 안 하는 신부같은 생활이 였는데 너무 빨리 성혼식이 온 것입니다. 가치도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축복도 그렇습니다. 입교자 중에서 동생뻘 이었기에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영통하는 사람들이 아버님의 12제자를 축복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집에서도 마침 축복결혼을 무사히 받게 되었습니다. 고비 고비마다 결정적으로 하늘이 도와주신 것을 느꼈습니다.

70년대 후반에 PWPA(세계평화교수협의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평화', '교수'라는 말을 꼭 넣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은 '자유'를 공산주의자는 '평화'를 주로 쓰던 당시 사회에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의아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은 앞으로 우리는 공산권의 양심적인 사람들과 지식인을 불러내야 하는데, 그 공통분모가 평화이고 하나님의 이상도 평화가 맞으니 그 이름을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본부 강사였습니다. 마산교회로 발령이 나서 인사드리러 왔었다가 일이 벌어졌습니다. 몇 마디 물으시고는 오늘 저녁에 수요 예배인데 강의를 한 번 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고, 첫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대로 부활론 강의를 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내실로 들어가시면서 본부강사로 길러 쓰도록 하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본부 강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내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부에 있었는데, 한 번은 참아버님께서 유협회장에게 지방 지구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유협회장이 만류하고 간청을 하여 본부에 더 있었는데, 대구에서 활동을 하다 대구 경북지구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농어촌개발봉사단을 만들었는데 전국 시도 단장들은 반공연맹지부장들이었습니다. 가상도 안했는데 경북만 유일하게 내가 단장을 맡았습니다.

그후 대학생부장이 되어 본부에 갔는데, 대학졸업장이 없었습니다. 입교당시에는 5년이면 한국이 복귀된다고 생각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목회일선에 선 것입니다. 졸업장을 어디에서 받도록 노력하라고 하였지만, 복학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상지대에 간신히 편입해서 졸업은 하였습니다만, 한 학기를 남겨놓고 PWPA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교수를 보면 하늘같이 보이는 때였습니다. 교수조직을 해야 될 입장이니, ‘교수초청 원리세미나’ 강의를 하며 그러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당시 주동문 사장, 박중현 회장이 교수 아카데미 일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직하는데 웃지 못 할 일이 생겼습니다. 준비위원회를 만드는데 교수님들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모릅니다. 창설선언문 몇 자를 고치는 것도 난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교수 조직이니 교수가 사무국장이 안 되면 안 된다는 발의를 하여 통과시켜 버렸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답이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미국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교수초청 원리세미나’가 있었는데 의외로 83명이나 모였습니다. 그중 명지대 재단이사장이고 설립자, 총장이시고 기성교 장로이신 유상근 박사가 참석하였습니다. 맨앞에 앉아서 서론부터 2박 3일 동안 완전히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상근 총장이 강의 후에 너무 은혜를 받았는데, 이 말씀은 교수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나를 명지대학교 교수로 초빙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자격이 없다고 하니', 교수 되고도 남는다고 하면서 내일 아침 10시에 총장실로 오라고 하고는 휭 가버렸습니다.

대학이라도 졸업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니, 이튿날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명지대에 갔더니 총장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형편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면서 그동안 살았던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어도, 교수가 듣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강권을 하여 '국민윤리' 과목을 맡아 강단에 섰습니다. 일주일에 15-17시간을 교수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묘하신 섭리를 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덕분에 교수아카데미 창립총회는 하루 아침에 교수 신분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공산진영의 미래 지도자들을 끌어 전체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이를 위해 이러한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하늘이 얼마나 급했을까, 하루아침에 교수가 된 것입니다. 그 후 기간이 되어서 대학도 졸업을 하고, 그 이후에 대학원에 입학해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것이 그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창립총회 시에 눈물이 폭포수와 같이 나오는 창설대회를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기구를 통해서 한일교수를 연결하였고, 세계적으로 확산을 하였습니다. 교수를 통해 외연을 넓히고 초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면서 큰 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미 ‘72년 창설 지시를 하실 그 때부터 이러한 큰 UPF(천주평화연합)을 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련 제국의 멸망'이라는 주제로 1985년에 제네바 대회는 의미가 깊었습니다. 옥중에서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몰튼 카플란 박사는 냉전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인데, 대회 의장으로 대회를 주최하려는 그 교수가 황당해 하였지만, 참아버님은 강력하게 지시하셨습니다.

당시 소련 멸망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여러 분야를 쪼개어 전문가를 영입하였는데, 그 분들이 전부 연구하다 보니 틈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온 생애를 바쳐 공산세계를 연구한 석학들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참아버님이 앞장서서 이것을 실현해 나가신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배후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대회장인 호텔을 보니 가보니 건너에 소련대사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럽제일 큰 대사관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길 하나 건너 호텔에 예약되어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이젠 그 회의의 발표자들은 선각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PWPA기반을 통해서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조건을 세우시고 소련을 공략하신 것입니다. 3년 교수를 하고 미국에 와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미국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생선으로 말하면 가운데 토막을 잘라서 세계선교사를 내보내시는데, 그 가운데가 초종교신학대학원을 만든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수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다른 종단의 교수 석학들이 교수를 하였습니다. 초종교 초교파운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신학계에서 누가 교수님 입장에서 우리 내용을 발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78년도인가?, 원리를 중심삼고 우리 강사들이 발표를 하는데, 유명한 정상들이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간단히 뿌리는 고사하고 몸통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싸움은 끝났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원리의 위대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말씀이기에 기성신학자의 연구와 말씀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확실히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초종교운동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아무도 이 중심 줄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파를 넘고 종교를 넘는 일을 세계적으로 주도해 오신 것입니다. 나비작전이라는 책을 한글로도 출간하게 됩니다. 이 책은 과거 공산권 비밀 선교를 하는 것의 비화를 담은 것인데, 여기에 내가 그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냉전 종식의 주인이 아버님인 것을 입증하는 내용을 첨가했습니다. 아버님은 국제공산주의의 멸망을 1951년에 남기셨는데, 이때의 한국 실정이 풍전등화였습니다. 아버님은 먼저 미래를 아시는 것입니다. 천도를 아시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도 기가 막힌 것이지만, 이것을 준비 안 된 우리를 교육시켜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이루어 내시는 실천적 삶을 사시는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북녘 땅을 가시고 감옥을 극복하신 것이고 피난길을 가신 것입니다. 60년대 중반, 승공계몽운동 등이 얼마나 어렵게 출발했는지 모릅니다. 계몽강사증을 받을 때의 그 심각했던 내용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격적인 일입니다.

모스크바 방문 시에도 생명을 걸고 가신 부모님의 노정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많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이 놀라운 비전은 'God Conference'에게 까지 갑니다. 이때의 발표 논문은 지금도 각 신학대학원에서 주요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수준 높은 각 종교 종단의 발표 자료인 것입니다.

세계경전의 발행도 놀라운 것입니다. 요즘 하고 있는 중동평화운동도 사실은 많은 역사적 수고와 발판 위에서 결실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모슬렘 지도자 교육, 초종교축복식 등 참으로 놀라운 과정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지금은 초종교 운동의 주인이 아버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번 회의의 큰 주제인 남북미의 구교와 신교운동을 이러한 연장선에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이번 대회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영계의 근본적인 역사와 손길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섭리사를 중심하고 본다면, 2차대전 때 연합국(영미불)과 추축국(일독이)과 한국을 위해 참부모님께서는 수십 년간 기도해 오셨습니다.

기독교를 섭리의 중심축으로서 정립해 나가는 것이 2차 대전의 결과였습니다. 미국은 장자의 책임을 진 것이었습니다. 2천년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준비했던 것이 2차 대전 후에 한국에서 그대로 준비되었고, 미국을 중심한 기독교 문화가 한국에 전파되었고, 특별히 참부모님의 가문에 문윤국 할아버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은 참아버님을 한국을 중심으로 준비를 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기독교가 반대를 하고 미국 선교사들이 반대를 함으로 말미암아 광야노정이 시작되어 40년 수난과 탕감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완결적인 역사를 위해 외적인 하나를 만들어 나가는 비전으로 창설된 것이 유엔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세워진 섭리적인 기구가 유엔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책임을 다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소련진영을 끌어들인 점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섭리기관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고, 미국을 중심한 연합국 측의 최대 실수였던 것입니다. 유엔의 태생적인 한계가 바로 이 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엔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쉽지 않아 아벨유엔을 만들어 기존의 가인유엔권을 극복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유엔으로서 천주평화연합이 그 사명을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대회가 이러한 하늘의 본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아벨유엔, 천주평화연합의 실현기구인 '천주평화통일가정당창설을 환영하고 결의'를 하는 대회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참석자들을 보호하고 아벨유엔을 본격화하는 데 기여하고 결의를 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결의시키고 환영시키는 것이 중심이고, 그 이전에 우리 UPF가 아벨유엔이고, 우리가 환영을 하고 결의를 하는 자리가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당하게 참부모님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승리하신 참부모님 앞에 큰 승리의 박수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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