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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理의 빛을 찾아서 --- 김찬호 목사 入敎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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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빛을 찾아서]

모범 공무원으로 내무부장관상을 받고 특진하여 최연소 산업계장이 되어 동료공무원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근무를 했던 까닭에 다음 해에도 또다시 우수공무원으로 선정되어 충청남도 도지사상을 받게 되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칭찬받고 대우를 받는 행복한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연륜이 더해 갈수록 공무원 사회의 부패상과 부조리를 알게 되었으며, 순수했던 학창시절에 배웠던 바른 인생관과는 다른 현실 사회의 부조리 사이에서 심적인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적성이 행정공무원 보다는 교육계로 진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틈있는 대로 준교사 자격시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부정과 타협할 수 없는 본성적 순수성과 현실세계의 부조리, 모순 사이에서 오는 심적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때 나의 인생행로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안성관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 가까웠던 유병오라는 급우의 소개로 통일원리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내가 머무르고 있던 안성관에서 학교 가는 길목에 토담집으로 지어진 초라한 건물이 당시 금산통일교회였고 친구의 권유로 그곳에서 정승원 지역장이란 분으로부터 원리강의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대단히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 잇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나는 공무원 시험에 바빴고 합격 이후 발령을 받아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당시 인연은 끊어졌다. 그런데 5년여 세월이 흐른 뒤 1971년 5월, 공무원의 생활 속에서 현실의 부조리와 갈등을 느끼면서 새로운 이상세계를 그리워하다 보니 5년 전 들었던 원리 생각이 났다.

나는 옛날 기억을 더듬어 토담집 교회가 있던 그 곳을 찾아 갔다. 그 근처에서 멀지 않은 조그마한 2층 건물이 바로 금산통일교회였음을 알게 되었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웃을을 띤 중년 부인이 맑은 목소리로 나를 맞이 했다. 나는 방으로 안내되었고 내가 찾아온 목적을 얘기하고 난 후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원리를 듣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그 중년 부인이 곧 나의 신앙을 이끌어 주신 믿음의 어머님 이순희 권사님이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는 선배 축복가정 부인들이 3년간 전도대원으로 전국에 파송되어 활동하고 있던 기간이었으며 믿음의 어머님은 금산에 파송된 부인 전도대원들의 조장으로 활동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신대리 우리 집에서 교회 까지는 2키로 정도 떨어져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매일 밤 원리 강의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갔다. 당시 원리 강의를 해주신 분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님이었던 송영석 교역장이셨는데 그 분은 교육대학을 졸업하시고 교사 발령까지 받았는데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로 나오셔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셨다.

첫날 강의는 창조원리였는데 이는 논리 정연하고 명쾌한 내용이어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송교역장님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고 박력이 넘쳤다. 감동을 받고 돌아와 첫날부터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나는 얼굴이 더러워 세수를 해야 하겠는데 맑은 물을 찾으려고 온 들판을 헤매어도 천지가 온통 황토 물 뿐이어서 씻을 곳이 없었다. 그런데 멀리 파란 뚝이 보여서 달려가 보니 그 너머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나는 그 물에 얼굴을 씻었다. 둘째 날도 창조원리 가운데 일부를 들었고 귀가해서 잠을 자는데 또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내가 맑은 물에 들어가 옷을 빨고 목욕을 하는 꿈 이었다. 셋째 날도 감동적인 강의를 듣고 돌아와 세 번째의 꿈을 꾸었는데, 너무도 선명한 천연색 꿈이었다. 내가 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야산에 연녹색의 초원이 펼쳐지고 그 위에 하얀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데 산 정상 쪽에서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아름다운 노래소리에 이끌려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중턱 쯤 가니까 8부 능선 쯤에 하얀 옷을 입은 중년 남녀들이 비스듬이 원을 그리고 둘러서 있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원형의 제일 아래 끝자리 하나가 비어 있어서 내가 올라가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원형의 가장 윗자리에 흰 두루마기와 같은 옷을 입은 분이 계셨는데 머리에는 황금빛 찬란한 왕관을 쓰고 계셨다.

꿈을 깨고 나서 기분은 좋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다음날 교회에 갔을 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앨범을 하나 들고 오셔서 펴 보이시며 꿈속에서 왕관을 쓰고 계신 분이 여기에 있는지 찾아보라 하셨다. 정말 그 앨범 속에는 꿈속에서 뵈었던 그 얼굴이 왕관은 안 쓰셨지만 큰 사진으로 꽂혀 있었다. 그 분이 문선명 총재님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문 총재님을 뵌 적이 없지만 그 몽시를 받은 이후 그분이 범상한 분이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 꿈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몽시를 받고 기분은 좋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통일교회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고 입회원서를 제출했는데, 그 날이 바로 1971년 5월 30일 이었다.

그 이후 나는 매일 원리강의를 들으면서 본격적인 신앙을 시작했다. 송영석 교역장님은 나를 중심에 세우시기 위해 집중적인 강의를 해주셨고 믿음의 어머님은 많은 기도와 정성을 나를 위해 쏟으셨다. 덕분에 나는 입교 6개월 만에 청년회장이 되었고 입교 1년 만에 교역 총무 일을 맡아 교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에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당시 교역장님은 나를 목회자로 키우기 위한 가능성을 놓고 지도해 주신 것으로 생각 한다. 나 역시 마음으로는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었다. 행정공무원보다 교육계로 진출하고 싶었던 생각이 이미 나에게 있었던 터라 지식 교육보다 인격교육이 보다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의 현실은 내가 결단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버님의 건강상태로는 가정을 이끄시기에 너무 어려운 상태였다. 나의 20년 성장과정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극빈한 생활고 속에 시달렸고 그렇게 살아오던 중 겨우 공무원이 되어 가정을 떠 받쳐 살 수 있는 유일한 기둥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내가 공직과 가정을 버리고 떠나면 우리 가정은 또다시 비참한 생활로 전락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차마 부모님 앞에 입을 열어 말씀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각한 갈등 속에 빠져 고뇌하고 있던 중, 그 당시 충남지구장을 역임하셨던 홍광철 지구장님께서 금산교회 순회 부흥을 위해 오셨다. 나는 그 분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또다시 몽시를 받았다. 학창시절 나는 가정교사 생활을 많이 해보아서인지 꿈 속에서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학교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양 손에 사업활동용 학용품이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얼마를 가다 보니 목적지인 학교가 멀리 보이는데 페르시아 궁궐처럼 황금빛 찬란한 궁궐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궁궐을 찾아가야 사업이 잘 된다는 것이다. 막상 가려고 보니 멀리 학교가 보이는데 눈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길을 막고 나타났다. 나는 갈 수 없어 낙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 앞에 노란 동아줄 3개가 낭떠러지 바위에서부터 황금빛 궁전까지 연결되어 뻗혀 나타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운데 노란 동아줄을 잡으면 목적지 황금색 궁전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할 때 외줄타기를 하듯 동아줄을 타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양손에는 무거운 사업가방을 들고 있어 줄을 붙잡고 탈 수가 없어 끙끙대고 고민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어쩌면 그렇게 이상과 현실 속에 고민하는 내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줬는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이 몽시를 받고 나는 담판 기도를 하기로 결심 했다. 그리고 7일 금식을 시작했다. 1973년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금식을 하는 동안 4일간은 출근하여 정상근무를 하였고 후반 3일은 휴가를 내어 교회에서 쉬면서 금식을 했는데 4일이 지나고 남은 3일 동안은 오히려 정신이 맑고 깨끗해지면서 그리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은혜로운 가운데 진행하였다. 어찌 아셨는지 집에 계시던 어머님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보시고는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고 염려를 하셨다. 금식의 의미를 모르시는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금식이 긑난 후에도 나는 진로문제를 놓고 계속 기도를 하면서 하늘의 응답을 기다렸다. 금식 후 40일이 지난 2월 말 경 나는 마지막 마음의 결심을 하고 부모님께 내 뜻을 말씀 드렸다. 가정을 위해서는 나의 뜻을 꺾고 공무원 생활을 계속해야 도리이겠지만 나의 미래를 생각해서는 목회의 길을 택하여 퇴직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말씀드리고 부모님의 뜻을 여쭈어 보았더니 부모님께서는 네가 잘 되는 길이라면 가정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말고 떠나가라는 것이었다. 아들을 붙들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나 간절하셨을까마는 당신들의 희생을 감수하시며 자식이 원하는 길을 가라고 허락해 주시는 부모님의 희생적 사랑을 나는 두고두고잊을 수가 없다.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과 함께 뜬눈으로 날을 밝혔다.

3월 초에 나는 근무처에 퇴직을 정식으로 통고하고 뒷마무리 사무처리를 했다. 직원들이나 금산군 내 공무원들은 내가 산업계장을 그만 두고 어디로 가느냐며 몹시 의아해 하며 궁금해 했다. 모범공무원으로 특진까지 한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관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통일교회에 욕을 먹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인삼 재배지인 금산에서는 그래도 잘 알려진 일화제약에 과장으로 간다고 말했다. 사실 그것은 전혀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된 것이 그 무렵 통일산업에 근무하시던 믿음의 부모님께서 (주)통일이나 (주)일화로 옮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을 해 주신바 있던 터라 그렇게 둘러댔던 것이다.

1973년 3월 30일자로 나는 공무원 생활 7년을 마감하고 퇴직을 했다. 그리고 퇴직금을 정리하여 동생들 교육비와 가정 생활비로 내놓고 단돈 5,000원을 가지고 정든 부모형제와 가정을 떠났다. 맨몸으로 떠나는 나는 그래도 소망을 갖고 떠났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신 아버님 슬하에 어린 동생들과 가족들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

나는 독한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집을 떠나 곧바로 충남교구에서 실시하는 1주일 수련에 입소했다. 속세에 살던 속인이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이 되는 순간과 같은 심정이었다. 1주일 수련을 마친 나는 목회자의 심정으로 개척의 길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첫 임지 발령을 받은 곳이 충남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였으며 개척 전도사로 그 곳을 찾아간 날이 1973년 4월 11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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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金 明烈님의 댓글

이종선형제가 쓰신 님따라 뜻따라를 읽어 보았는데,
내가 1961도에 입교할때와 비슷한 초창기의 기록이었습니다.
이곳에 옮겨놓은 김찬호목사의 글도 초창기의 생생한 사도행전이네요.

문정현님의 댓글

한분의 신앙노정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싶습니다.

송영석 회장님께서 시무하시던 교회에서
연결된 초년 식구님들이 말씀에 고무되어서
오늘날 뜻 앞에 크게 이바지하는 님들을
자주 뵙게 됩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 큰 사부를 만나셨군요.
감사합니다 !!~

이태임님의 댓글

감동입니다. 그런데 김찬호님처럼 특별한 동기도 없고 그냥 친구따라 강남간 사람처럼 친구따라 입교를 하여 오늘까지 그냥 뭐 특별한 것도없이 온 사람은 뭐라고 적어야 하나요?
괜히 이곳에 들렀다가 숙제만 안고가네...(혼자서 꿍얼~꿍얼 궁시렁~궁시렁)

parksinja님의 댓글

입교동기!
고등학교 시절 안성관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 가까웠던 유병오라는 급우의 소개로 통일원리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내가 머무르고 있던 안성관에서 학교 가는 길목에 토담집으로 지어진 초라한 건물이 당시 금산통일교회였고 친구의 권유로 그곳에서 정승원 지역장이란 분으로부터 원리강의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대단히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 잇는 내용이었다.
감동!
우리 집에서 교회 까지는 2키로 정도 떨어져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매일 밤 원리 강의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갔다. 당시 원리 강의를 해주신 분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님이었던 송영석 교역장이셨는데 그 분은 교육대학을 졸업하시고 교사 발령까지 받았는데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로 나오셔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셨다.
첫날 강의는 창조원리였는데 이는 논리 정연하고 명쾌한 내용이어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송교역장님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고 박력이 넘쳤다. 감동을 받고 돌아와 첫날부터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나는 얼굴이 더러워 세수를 해야 하겠는데 맑은 물을 찾으려고 온 들판을 헤매어도 천지가 온통 황토 물 뿐이어서 씻을 곳이 없었다. ..............



정해관님의 댓글

지금 강남교회 부목사로 활동하시는 김찬호 목사께서는 이미 회고록 ("진리의 빛을 찾아서" 2007.01. 기현출판사)을 내신바 있습니다. 시력만 좋으시다면 우리 사랑방 아랫목에서 여러 형제들과 심정어린 대화로 많은 깨우침을 주실 수 있을텐데, 안타깝고 유감 입니다.

이번 새 집행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의 하나인 <회고록 발행>에 가장 적합한 모범답안을 제시해 주신 감동적인 내용 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나머지 부분도 이곳에 연재할 것입니다. 이곳 [회원가족]란에 있는 김목사님댁을 직접 방문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참고하셔도 좋을듯 싶습니다.

한분 한분께 회고록의 원고를 청탁하는 일은 매우 지난한 일입니다. 작년부터 이곳에서 전개해 왔던 '제3앨범 구축운동'에 참여하신다면 일은 매우 간단할 것입니다. 많은 형제들의 동참을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혹시 김목사님의 책에 관심이 있으시면, 전화 02-3478-1243~4.(평화교육문화센터) 011-222-6764(김찬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김찬호 목사님께는 사전 의논이 없이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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