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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A/ 전북지회 성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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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붕어빵에 새긴 비전


성호갑


저는 1960년 5월 28일, 중2 때 입교하였다. 그리고 1960년 7월 20일, 고창군 고수면 두평리에 여름 하계 40일 전도를 시작으로 뜻 길을 출발하였다. 그때는 마른 막대기만 세워놓아도 하늘이 역사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때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을 통해 말씀을 전했던 하나님은 그곳 에서 430가정 1가정, 777가정 1가정, 기성 가정 1가정 등 믿음의 자녀들을 찾아 축복을 받게 해 주셨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숭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 학교는 미션 스쿨이었다. 2년간 광주 성화 학생회장으로 수많은 학생들을 데려왔고 쉬는 시간에는 교실마다 돌아다니며 원리 강의를 했다.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해 성미 사업이라고 쌀을 얻어다 비어있는 쌀독에 채워 넣곤 하였다. 학교생활보다는 교회가 앞서다 보니 결석을 많이 하게 되었고, 시험 성적은 어떤 때는 1등, 어떤 때는 210등이었다.



                                                                                                   학교에서 퇴학처분이 결정되었다. 나는 마지막 할 말을 하고 싶다고 하여 교사들을 놓고 원리 강의를 했다. 교사 중 몇 분이 저렇게 똑똑한 학생을 퇴학시키기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하여 투표에서 다행히 퇴학은 면하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내게 시험 전날 밤 시험문제를 미리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역사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커닝을 의심했지만 나는 결백했기에 당당하게 맞섰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답답 하셨던 것 같다. 퇴학을 결정할 때 학교에 불려 오신 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던 훌륭한 분이셨다. 그때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전 후편 원리 강의를 마스터하여 고2 때부터 전남지구 수련 강의를 하기도 했었다.

그 후 뜻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4년 진도군 의신면 구역장, 함평 지역본부 강사 겸 학다리 개척 전도 그리고 보성군 벌교교회 개척활동을 했다. 여기에서는 벌교교회 개척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1966년 12월 7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매서운 눈보라로 추운 날, 전남 지구 최용석 지구장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전남 보성군 별교구역장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고장이며,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여수 에서는 돈 자랑, 순천에서는 얼굴 자랑 말라’고 하던 그 벌교 땅, 교회도 식구도 하나 없는 별교 땅! 그러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담요와 세면도구, 원리책을 배낭에 짊어지고 최 지구장님이 주신 돈 2,000원과 공기총 두 자루를 가지고 무작정 별교 행 버스를 탔다. 목적지도 만날 사람도 정해지지 않는 처음 가보는 벌교를 향하며 버스 차창가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콧노래가 나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갈 곳도 없는 발걸음이 몹시 불안하기도 할 텐데 콧노래가 나오다니…..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찬송을 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벌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오는 곳이지만 낯설지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내렸으나갈곳은없고참을수없이배는고프다. 붕어빵 2개를 사서 하나를 먹고 허기는 채웠으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잘 곳이 없는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마을 뒷산 중간쯤에 올라 산 밑 시내를 내려다보며 임지 도착 보고기도를 올렸다.

“아버지 제가 이곳 벌교에 첫발을 디디고 섰습니다. 결코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어떤 어려운 환경이 몰려온다 해도 결코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늘이 가장 기뻐하시고 참부모님이 행복해하실 기적을 만들어 만민 앞에 보여 주겠나이다.”

기도를 하고 난 후 아름드리 소나무 밑 평평한 곳에 담요를 깔고 하늘을 이불 삼아 누었다. 초겨울 찬바람은 살갗을 파고들고 밤하늘의 별들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지만, 우주를 품에 안은 듯 따스한 바람을 생각하며 몰려오는 피곤에 그냥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침햇살이 얼어있는 내 몸을 녹이며 다정한 인사를 했다.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산에서 내려와 벌교읍 거리거리를 돌아보며 거리 순회 기도를 시작했다.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의 속삭임과 함께 거리를 휘저으며 걷고 또 걸으며 추위를 이겨나갔다.



  이때부터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지난밤 먹다 남은 붕어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벌교 읍사무소로 가서 기도를 한 후 벌교상고 앞에서 누구를 전도할까 생각하며 학교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 이 땅을 복귀할 수 있는 학생을 만나게 하소서!’ 약속 없는 기다림에 무척 긴장이 되었다. 혼자 걸어오는 여학생을 발견하고 나는 ‘학생!’하고 불렀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깜짝 놀라 도망치려 하였다.

나는 ‘이 시대 새로운 희망을 전하는 사람인데 내 이야기 30분만 들어 달 라’고 했더니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함께 걸어가며 나는 정신없 이 총서론 강의를 했다. 죽느냐 사느냐 생사를 오가는 진실한 호소를 했다. 학생(김미리)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나는 최 지구장님이 주신 공기총을 판매하기 위해 이곳저곳 벌교 상가를 돌며 열심히 공기총 성능을 설명했다. 한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사업을 하시던 그분은 어설픈 내 설명 을 듣고도 바로 2자루를 사셨다. 준비된 의인이었다. 하늘 앞에 감사하며 잠잘 곳 없는 나는 또 뒷동산에 올라 기도하며 밤을 보내고 있는데 경찰 세 명이 산 위로 올라와 ‘손들어! 반항하면 쏜다.’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으나 알고 보니 내가 간첩으로 신고된 것이다. 나는 경찰들과 경찰서로 갔다.

나는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고 내가 반공 강사라고 하며 전남경찰국장이 발행한 반공 강사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경찰은 간첩신고라 출동했다며 굉장히 미안해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잠깐 만나 몇 마디 인사 정도 한 사이인데 다정다감하고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를 벌교 땅에 세우시기 위해 하늘이 벌인 비밀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67년도에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있던 때이었는데, 북한의 남침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이었다. 전국적으로 국민정신교육을 실시하여 반공교육으로 단결된 새 시대를 열자고 하는 박정희 정부의 시책이 있던 시점이었다.

간첩으로 오인해 미안했던 정보계장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여 중식 후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나는 유물론에 입각한 김일성 주체사상, 그리고 오늘의 남북한 상황과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감명을 받은 파출소장이 갑자기 ‘잘 됐다’며 오늘 벌교상고에 반공 강의를 해야 하는데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허락하고, 직원과 함께 학교로 갔다. 학생 500여 명이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정세로 본 한반도의 안보’라는 제목으로 1시간 30분 동안 강의를 했다. 하나님이 내 입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먼발치에 김미리 학생이 보였다.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며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사람이 그립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기를 갈망하며 말씀 전하기에 목말라있던 나는 온 힘을 다하여 강의를 하였다.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단을 내려왔다.

공기총을 팔아 생긴 돈으로 집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광주에서 벌교로 들어오는 길목에 1층에 방 하나 2층에 사무실인 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집을 돌아보았다.

바로 계약을 한 후 방을 수리하고 2층 창문에 ‘세계 평화 연구소’ 라고 쓴 종이를 창가 유리창에 붙였다. 성염으로 성별하고 기도한 후 벌교 전도 활동의 첫 출발을 시작했다.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건물이지만 참부모님을 



    모셨으니 내게는 고대광실 높고 아름다운 집에 비교되지 않을 만 큼 행복했다. 다음 날 미리라는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학교에 있는 많은 학생들이 큰 감명을 받고 선생님을 만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학생들을 나에게로 인하도록 했다. 2층 사무실을 성전으로 사용하는데 너무 좁지만 김 미리 학생과 친구들이 찾아와 매일 2-3시간씩 강의를 들었다. 본격적인 학생 전도를 위한 금식 철야기도, 거리기도, 산기도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와 더불어 강의 준비를 하고 학생들을 기다렸다. 오후 3 시가 되자 2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세계 평화 연구소 소장 성호갑’이라고 명함을 만들어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돌렸다. 다음날 파출소 직원이 왔다. 벌교 시내 각 사업체, 기관, 교회를 순회하며 강의하자는 것이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경찰서에서는 공문을 발송하기로 했다.

처음 읍사무소 강의 날이 왔다. 정보계장의 소개로 단상에 선 나는 ‘국제 정세와 김일성 주체사상과 조국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와이셔츠를 땀에 적시며 미친 듯이 2시간을 열강했다.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오자 어디로 가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느냐며 모두가 내 손을 잡기 위해 야단이다.

함께 했던 지서장 정보계장도 감명을 받아 야단이다. 신바람 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벌교중앙교회 강의 날이다. 단상에 오른 나는 ‘주님이시여, 역사하소서. 제 입이 당신 것이 되게 하소서! 이들 중에서 하나님이 택해 놓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알아보게 하소서!’하며 절실하게 기도했다. 찬송가 162장을 독창하고 400여 명의 신도들에게 해방신학과 변증법적 유물론 강의를 울부짖으며 했다. 박수와 아멘으로 신도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강의를 끝내고 교회를 벗어나 큰길가에 나왔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앞을 보니 웬 아가씨가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다. 나는 체면 불고하고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걸어가다 나를 향하여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세요? 하며 방금 전 교회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금방 대화가 됐다. 교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약간 망설이더니 더 말씀을 듣고 싶다고 하며 나를 교회까지 바래다주었다.

다음날 10시쯤 그 아가씨는 교회를 찾아왔다. 오후 3시까지 원리 강의를 했다. 그분은 ‘아멘’ 하면서 취해서 말씀을 들었다. 그 후, 광주에 7일 지구 수련을 보냈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후 완전한 중심 식구가 되었고, 식구들 관리와 식사 준비 그리고 학생들 뒷바라지까지 해주었다.

이때부터 학생들이 정신없이 몰려들었다. 김미리 학생을 중심하고 학생회를 조직하여 간부가 20여 명이 되었다. 내 환경을 잘 아는 학생들은 매일 도시락을 가져와서 놓고는 학교에 갔다.

도시락을 나에게 주고 학교에 간 그 학생들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 때를 생각하면 그 학생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립고 보고 싶다. 뜻길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나를 도왔던 그 학생들을 만나 옛날 이야기 하며 소박한 점심을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고 싶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 도시락을 먹으며 한없는 눈물의 기도로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정성을 모았다. 벌교상고 뒷산에 성지를 마련하고 언제나 학생 전도를 위해 기도하도록 지시하고 학생들을 정예화해 나갔다.

최용석 지구장님은 벌교 보고를 들으시고 남자 1명, 여자 1명의 전도사를 보아주셨다                                                                                                                                                                      여자 식구는 식사와 학생들을 접대하는 업무와 남자 식구 는 사업 활동으로 교회를 도왔다. 교회는 학생들과 김충위 님(120가정)이 이사를 오셔 양복점을 개업하여 물심양면으로 교회를 협조해서 정착 토대를 조성해 가고 있었다. 경찰서에서는 마을마다 공문을 발송하고 파출소 직원과 함께 밤 집회를 계속하였다. 감명을 받은 주민들이 교회를 찾아오고 그들을 예배에 참여 시키며 교회의 면모를 세워나갔다.

최용석 지구장님이 벌교 순회를 오셨다. 학생들이 100여 명 몰려왔다. 신바람 나신 지구장님의 말씀이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학생들이 돌아간 후 지구장님은 ‘이제 전남 학생부장과 지구 수련회 수련 강의를 담당하 라.’고 하셨다. 얼마나 원하던 일인가? 세계를 내 입으로 정복해 보리라. 나는 지구 수련 에서 7일 수련 중 처음 3일은 혼자서 맡아 하루 8시간 강의를 했다. 강의를 하라고 하면 나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마음은 이미 강의 장소에 가 있었다. 전라남도 전 시군에서 몰려오는 수련생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좁은 성전에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시군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수련생 들이 3일만 지나면 성초를 켜놓고 단심가를 부르며 눈물로 통곡을 하게 되 는 은혜로 영계가 함께 했던 역사의 시절이었다. 어려웠지만 넘치는 은혜 속에서 힘든 줄 몰랐던 기쁨의 시간들이었다.

나는 정성을 들여야 생명력 있는 말씀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아침, 그리고 점심까지도 금식하며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매일 8시간 강의를 소화했다. 이젠분필만들면몇시간이고강의할수있는강사가된것이다.이렇게 하늘은 지구장님을 통해 나를 강사로 단련시키셨고, 나는 매일 꿈을 먹으며 성장해 가고 있었다.


                                                                                               

한편 나는 전라남도 경찰국 위촉강사가 되어 학교와 주민을 상대하는 강

의를 하기도 했다. 강의에 감명 받은 학생들과 주민들이 내 숙소로 몰려와 제2차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못 먹고 쉬지 못하는 사이 내 몸은 너무 말라 45kg이 되었다.

'내 소원은 인류 평화와 위대한 조국 창건이다. 민족이 하나 되어 통일을 하고 동북아의 중심에서 위대한 대한반도를 만드는 것이 내 목표다. 그 길 은 오직 국민교육뿐이다. 나는 죽으면서도 강의할 것이다.'

언제 세계인을 울리고 웃길 명강사가 되느냐. 통일교인 뿐이 아닌 세계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날이 오기를 열망하는 기다림의 나날이었다. 군대에 입대해야 했으나 몸이 너무 약해서 걱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군대에 갈 수 있게 되었고, 3년 동안 건강을 회복시키는 시간이 되었다.


제대 후 주간종교신문사에 근무하던 중 황환채 총무부장님이 주간종교 신문사에 오시더니 고창교회장으로 갈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고 하시며 시무를 권유하셨다. 1972년에 고창 지역장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왔다. 식구도 하나도 없고 교회도 월세를 못내 칠판까지 잡혀버린 상태였다. 도착 기도를 할 곳도 없어 성지로 올라가 소나무를 놓고 취임예배를 드렸다. 발붙일 곳이 없던 상황에서 경찰서를 찾아가서 승공 강의를 해보자고 말하였 다. 고창고, 고창여고에 강의를 시작하며 고창군 전체 중고등학교마다 강의를 하게 되면서 학생 전도의 길이 열렸다.

그러던 중 1974년 9월, ‘이 땅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봉사할까’ 생각 하던 중, 옛날 함평 개척 시절 지역장이셨던 72가정 김덕수 형님이 교회를 찾아오셨다. 그 선배가 아이디어를 주셔서 나는 노인대학을 만들겠다는 생각을하였다


   곧바로 계획을 구체화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고창군노인회 회장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나는 노인회를 중심으로 고창군 승공노인학교를 설립하였다. 승공노인학교 이사장에 취임한 나는 학생회장, 부회장, 총무를 세우고, 고창군 14개면에 분교를 만들었다. 군청, 경찰서, 교육청, 농협을 방문하여 취지를 설명한 후 각 기관에 공문을 발송하였다. 포스터를 붙이고 지방 유지를 만나 설득하고 내 강의를 들었던 모든 사람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한 후

회원 모집에 들어갔다.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1975년도 고창에서 임지 생활을 하던 6.000가정 전도사 강영신, 신순

임, 이경옥, 이종분 등 귀한 사람들이 마을을 돌며 노인학교 입학원서를 받 았다. 그어려움은말로다설명할수가없었다.엄청난눈으로도로가막혀 교통이 두절되어 오고 가지 못하는데도 가가호호를 방문하느라 동상으로 3개월이나 고생을 했다. 현장의 반응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고창읍에서 처음 개강식을 개최하고 이어 13개 면 단위로 개강식을 했다. 대단한 화제 거리가 되어 신문에서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매월 한 면에 하루씩 순회하며 노인의 건강, 오늘의 세계, 국제정세, 합동 생일잔치, 효자 효부 표창, 수학여행 등 다양한 노인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매월 13일 동안 합동 생일잔치를 위해서 집에서 시루떡을 만들었고 종이로 만든 왕관도 씌워드렸다. 합동생일 잔치에는 자녀들도 불렀고, 효자 효부 표창과 강의를 통하여 효사상을 접목시켰다.

제2회 합동 입학식은 고창읍 성림 극장에서 개최하였는데 2,130명의 노 인 학생들이 운집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최장수 노인 표창, 강연, 장학금 전달식, 고창고등학교 밴드부, 고창여고 합창단으로 입학식은 흥이 돋았다.


                                                                                                       제2차, 제3차로 해를 거듭하면서 학생 수는 10,000명이 넘어섰다. 이때 고창군민은 180,000명이었다.

노인 학생들이 많아지고 교육 프로그램이 다양해지니 노인 학생 수송을 위한 버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버스를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회의를 했으나 있으면 좋지만 돈이 필요하기에 누구 하나 버스를 구입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회의 말미에 ‘걱정하지 말라. 내가 책임지고 마련하겠다’.고 했다.


기적처럼 버스를 구입하다


나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하늘이시여 참부모님이시여! 이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하나로 묶어 선민권을 완성하여 놀라운 하늘부모님. 참부모님의 역사로 실질적인 민족 복귀 주권 복귀를 위한 하나님의 조국 창건의 미래를 내 손으로 열고야 말겠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제 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소서! 천하 만민이 자석 앞에 철분이 모이듯 끌려오게 하옵소서!’ 그리고 나는 버스 구입을 위한 실행에 들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시집올 때 선물했던 목걸이와 반지를 팔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내의 허락을 받아 마련한 돈 50만 원, 그것이 버스를 구입할 나의 전 재산이었다. 나는 그 돈을 가지고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 전북지사를 찾아갔다. 


    본부장을 만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만나 주지 않았다. 낮에는 본사로, 밤에는 통곡의 기도를 했다. 21번째 찾아가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나는 5,000만 원 하는 버스를 50만 원 보증금에 36개월 할부로 달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담보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나에게 담보가 어디 있겠는가. 본부장은 화를 내며 당장 내보내라고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하는 수없이 직원들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돈이 무엇인가?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있어도 경제력이 없으면 대접받 지 못하는 사회다. 나는 이것을 개혁하리라. 돈 없어도 능력만 있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기적을 만들어 만민에게 보이고 말겠다.’고 하는 욕심이 생겼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업에 목숨을 건다!’고 다짐했다. 긍정적인 생각과 생명을 건 간절한 도전에는 기적이 손을 잡아준다고 생각하며 나는 또 본부장을 만나러 갔다.

아예 밤을 새우며 사무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다음날 출근시간에 본부장은 나를 보자, “이 사람 또 왔네!”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본부장 방으로 와요. 어린 사람이 집념이 강하구만! 무엇을 믿고 자네에게 버스를 주나?” 하고 본부장이 물었을 때 “본부장님!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의 젊음을 담보로 잡아 주십시오.”하고 대답했다. “그래, 믿어봅시 다.”하는 본부장 앞에서 체면도 위신도 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사촌동생을 데리고 창원에 가서 버스를 인수하고 전북도청에서 번호판을 달았다. 고창교회 앞에 버스를 세워놓고 무사고를 빌며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하늘부모님을 모시고 나보다 못한 약자의 편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어떤 경우에도 남의 눈에 눈물 고이게 하지 않는다. 나를 만난 자는 누구나 행복하게 만든다.


                                                                                                      언제나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남을 위해 최선 을 다한다.’ 버스는 노인학교 수업, 수학여행, 노인 회원 장례식 지원 등으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고, 3년 만에 할부금을 전부 갚았다. 고창 승공노인학교는 전국 최고의 노인학교가 되었다.

그 후, 전주 35사단 정신교육관 초청으로 간부단 200명을 교육한 이후 사단장님의 추천으로 국방부 향토예비군 정신교육 강사로 위촉되어 읍면동을 순회 예비군 훈련장을 방문하여 매일 정신교육을 하였고, 내무부로 부터 민방위 창설 위촉강사가 되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언제나 말씀을 할 때는 최용석 회장님의 가르침을 따라 아버님 서대문 형무소에 끌려가시던 모습을 상상하며 단에 올랐고, 청중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심각한 심정으로 5분 내에 청중을 휘어잡아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며 부모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단상에 올랐다.

한때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하기 위해 결심하고 고창읍. 무장, 해리 등 장날이면 어디든지 명함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강의를 들은 청강생이었다.

‘성 회장 큰일 할 사람이야.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니 이번에는 출 마 하소. 나이도 어리고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자네 를 도울 걸세. 자네는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가능해!’ 많은 선후배들의 격려 와 협조도 받았다.

나는 뜻길을 가면서 하늘 앞에 국가를 들어 참부모님께 바쳐드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평생을 꿈꾸었다. 국회에서 참부님이 메시아임을 선포할 기반 구축을 목표로 살아왔다. 정말 간절히 원했던 나에게, 하늘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나의 능력 을 길러주셨다.

산수원 애국회 회원 3,000명을 만들기도 하고, 승공연합 전북도지부장 시절에는 면리 단위까지 도합 10,000명 승공지부장단 전진대회 등 외적인 활동 기반을 계속 만들었지만 나의 정치적인 꿈을 참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의 교만함이 너무 컸던 것 같다. 대회 후 일만 명 지부장단 대회에서 회비를 걷어 성공적으로 했다고 보고 드리자, 아버님께서는 네가 이 중에서 제일 똑똑하지? 하고 질문하셨다. ‘되어봐야 알지요.’라고 대답 한 철없고 교만했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전을 버리지 못했다. 미련을 가지고 활동을 해왔는데 꿈속에서 아버님은 ‘너는 집 짓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 났다. 그 집에 살 사람은 따로 있다고 하셨다.’ 나는 너무나 억울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요, 왜 내가 지은 집에 내가 살 수 없는지 항의를 했다. 아버님은 나에게 타협을 하셨다. ‘그러면 네 후손 중에 그 집에서 살도록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

그 뒤로 나는 정치적인 욕망을 버렸다. 꿈에서도 아버님은 내게 “다 버 렸느냐?”라고 확인하셨다. 높은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떨어뜨리셨다. 버리는 것을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버릴 것이 남아있는 것 같다.

요즈음 내 기도는 항상 국가 복귀와 2세, 3세의 위대한 지도자 탄생이다. 내가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우리 축복 자녀들이 천일국의 소망을 꼭 이루어 주기를 기도한다.

나도 이제 80세를 바라보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지상에 와서 삶의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가까워 온다. 하늘 앞에, 참부모님 앞에 적은 효라도 돌려드려야겠다. 자연만물과 인간 세상에도 빚지지 않고 사랑을 베풀면서 후손들을 위한 복나무를 많이 심어 내가 꿈꾸던 비전이 이루어 지는 미래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호에서 계속)


2022.09.09  

제공/ 미국지회 이대길 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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