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의 잘못된 이해와 이순신 장군의 단장과 토혈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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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종군의 잘못된 이해와 이순신 장군의 단장과 토혈의 심정
먼저 백의종군이란 말 뜻을 알아보자.
"백의(白衣)"란 - 단순히 흰옷이란 의미 외에 벼슬 없는 일반 백성 즉 서민이란 뜻과. 또한 당시 죄인들의 죄수복(囚衣)을 의미한다.
"종군(從軍)"이란 - 글자 그대로 군대에 따라 간다는 말이다.
따라서 백의종군이란 벼슬 없는 일반 백성이 군에 따라간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의종군이란 일반 백성과는 전혀 상관 없는 용어 인 것이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관직(특히 무관직)에 있던 자가 파직 당하고서 관복을 벗고 죄인의 신분으로 일반 병사와 같이 전장에 임한다는 것으로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고 오직 명령권자에 의한 강제된 군복무 명령이었다.
따라서 백의종군이란, 그 원인이야 여하튼 명분과 신의를 생명시하던 왕조시대에 있어서는 본인 당사자에게는 불명예와 치욕인 동시에 또한 기회를 보장받을 수 없고 오직 전장에서 공적을 세워야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러한 백의종군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못 하고서 제 3자에 대하여 죄인 취급을
당연시 하거나 자신이 마치 최종 결정권자 인양 백의종군을 하라, 말라거나 백의종군 하는 것이 신앙적 자세에 합당한
처사라고 강요하는 등 명령권자의 의사는 물어 보지도 않고 마치 자의적으로 단정하고 평가하는 일이 예사로 자행되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순진한 분들의 단순성에 대하여 연민의 정도 느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 파악의 허술함이 얼마나 많은 오해와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고 있는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백의종군이란 옛 군대 사회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잘못이 있으면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파직시키고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으로 끝내면 된다.
다만 명령권자가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버리기는 아깝고 그대로 두기에는 명분이 안서는 경우에 아주 드물게 이러한 강제 군 복무 명령을 하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는 백의종군의 경우가 특이하게도 일생에 두번씩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그 첫번째가
하급군관 시절인 1587년(선조 20년) 함경북도 국경 부근인 "조산만호"(종4품) 겸 녹도 "둔전사의" 로 있을 때 북방 여진족의
약탈과 침략을 막고 수비를 강화하고자 직속 상관인 절도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그 해 가을
여진족이 대병을 이끌고 침입하여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혼신을 다해 싸워 포로 60 여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 병영이 와해 되었다.
이 사건으로 경흥 부사 이경록과 함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수금 되었고 백의종군 하게 되었다.
이것은 직속 상관으로 무책임하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고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이일이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회피한 것이었다.
이 후에 이순신은 순변사(이름?) 휘하에서 죄인으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여
죄를 사면 받았다.
그 두번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해인 1591년에 47세로 비로소 정3품인 절충장군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약칭 전라 좌수사)에
발탁되고 다음해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 15만이 함대 700척으로 부산포를 기습 침략한
사건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부임 1년도 안된 짧은 기간이지만 만반의 준비와 정성 그리고 치밀한 작전으로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해전, 웅포해전, 등등에서 연전 연승함으로써 풍전등화의 조국 강토를
가까스로 지켜내었다.
이 공로로 1593년 본직인 전라 좌수사 겸 삼도 수군 통제사에 제수 되었다.
그러나 1597년 또 다시 전열을 재 정비한 대대적인 정유재침 이후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척을 보이지 않는 데다가 경상 우수사 원균과의 불화 등으로 초기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현지의 기상 요건을 포함한 전략적인 이유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을 기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정적들의 음해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1597년 음력 2월 25일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간신히 사형을 모면하고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그것도 죄인의 멍에를 그대로 쓴채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
그 두번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번째의 경우만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 알고 있다.
다음은 본글 제목에 맞게 이순신 장군의 조정(선조 임금)의 명령 불이행 - 즉 최고 책임자의 지시, 다시 말해서 절대 복종에 대한 거부(불순종)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그 결과 개인의 생명을 버리고(사형선고 후 집행직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최후의 방패로서 수군의 온전한 보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조명하기 위해 좀 더 전쟁의 진행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1597년 음력 7월 16일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해전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된다.
지금까지 간신히 조선 수군에 의하여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전라도를 포함한 전략적 요충지가
모두 위험에 빠지게 되자 그제서야 조선 조정에서는 허겁지겁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병조판서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가련하게도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는 기존 군사 120여명과 함선 12척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병력으로는 적을 대항하기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눈물로써 호소하며 또다시 불순종(?)의 반대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 ---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다. --- "
라고 비장한 결의를 표하고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 전열을 재정비 하였다.
원균의 우리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한지 불과 2달만인 1597년 음력 7월 16일 이순신은
새로 건조한 1 척을 추가한 13 척의 전선으로 무려 333척의 일본 함대를 급류가 강한 울돌목으로 유인하여
31척의 적선을 격침 시키고, 92척을 대파 시켰다. 이것을 명량해전이라고 한다.
이 해전의 승리로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때마침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죽음으로 일본군은
철수를 결심하게 된다.
다시 두 달여 후인 1598년 11월 19일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隣)과 함께 노량 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중 적탄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져 죽는 순간
"...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고 말하고서 54세의 나이로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장렬히 전사하니 이 해전이 장군의 마지막 노량해전이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위기에 처한 국가(나라)의 운명과 국민(백성)의 생명을 책임진 전쟁터의 장수에게 있어서
과연 최고 권력자(왕)의 명령과 지시에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
옛 말에 전쟁터에 임한 장수는 임금의 지시나 명령에도 불복 할 수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의 경우,
첫번째 백의종군은,
보고하고 순종했으나 무능한 상사(병마사 이일)의 대처능력 부재로 불가항력적으로 당한 억울한 사례이다.
두번째의 백의종군은
임금의 지시에 불복했으나 장수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순종함으로서 얻는 무책임한 개인적 안일과 면책보다는 ,
불복함으로써 당하는 개인의 명예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멸사봉공 정신 곧 구국의 일념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순신 장군 처럼 충효 사상이 강한 분이, 더구나 나라의 주인이
국민(백성)이 아닌 오직 왕 뿐이었던 왕권 제일 주의 시대에,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가 몰고 올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느꼈던 창자를 도려내고 피를 토하는 심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입으로는 눈에 나타난 이순신 장군의 나라와 겨례 위한 충절과 희생을 찬미하지만,
그러한 결과가 있기까지의 심정적 번민과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느끼지 못 한다면
한 핏줄을 이어받은 배달 민족의 후예가 아니라, 영원한 이방인의 신세를 면치 못 할 것이다.
나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생각할 적마다, 물론 일시적 현상이라 자위는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통일 가족의 사고(思考)의 현주소와 제 현상들이 너무나 가슴저리고 목이 메여
한 없이, 원 없이 울고 싶다.
짝이 있으면 소리죽여 밤새 같이 울고 싶다.
2010년 11월 26일 새벽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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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우님의 댓글
적어도 난세인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천운을 받기를 원하니 제발 메인 공간에 한자리만
여유를 달라고 애원하는 식구님을 만나며
전국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식구님들 ,
마지막날 부모님 모시고 다섯시간 동안 서서 은혜를 받고 있던 식구님들
공간마다 넘치는 손님들 안내 하노라니 이틀은 세찬 바람까지 불어
현관으로 들어오시는 손님들 옷자락에 매달려 사정없이 끼어들어오는 바람때문에
한복입고 벌벌떨며 한강에 바람도 주님 뵈우러 악착같이 들어옴이라고,
주변에 자존감 높은 씨티파크 키큰 건물들도 천복궁 내려다보며
창틈으로 은혜좀 달라고 기웃거림 같았습니다.
짧았던 4일 그곳은 분명히 천국이였습니다.
김동운 회장님의 공들이신 글 그리고 중론을 함께하신 댓글들 소중하게 만나 댓글을 보탭니다.
(본문 댓글을 부인회방에 정리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기왕 얘기가 나온 터에 사족을 하나 달자면, 지금과 같은 난세?에 적어도 지도자라면 어려움의 탓을 남에게, 특히나 별로 힘도 없고 재능도 부족한 아랫 사람들(필자와 같은)에게 돌리지 말고 당시의 충무공처럼 "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던 기개와 충절로 이 난국을 돌파했으면 하는 마음 입니다.
공교롭게도 내외적인 총체적 난국 가운데 우리들의 근심은 쌓여만 가니, 큰 회장님!의 소회와 같이 안타까움과 울분을 밤새워 함께 나누면 가벼워 지겠다는 바람도 헛된 소망은 아닐것으로 생각 됩니다. 건승하소서!!!
성범모님의 댓글
무엇이‘정’이고 무엇이‘부’인지가 지극히 혼란스럽습니다. 이 ‘홈’은 신앙의 척도를 계측하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회는 소수의 편안한자 보다 다수의 불편한자를 보듭는‘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주 안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6학년 세대가 청년 세대의 목적을 추구 한다면 회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때로는 의견수렴도 필요하겠지요.
석양에 걸린 해는 찬란한 낙조를 발해야 합니다. 가정회의 범주를 벋어나는 행동은 절제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문제로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2세는 2세들의 영역이 있고, 그들에게는 보다 더 진전된 자신들의 세계가 전개될 것이니까요. 본문에서
“역사적 사실(歷史的史實)은 순수하게 있었던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미리 어떤 목적을 세워 놓고 그곳에다가 자신의 생각을 유리한대로 해석한다면 이미 역사적 사실 - 즉 진실을 그 순간 모두 잃게 됩니다.”
라는 논조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표출하는 상징과 비유의 뜻은 독자마다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동운선생의 예봉에 한방 맞은 느낌이군요. 앞으로 고견을 많이 기대합니다.
김동운님의 댓글
미리 어떤 목적을 세워 놓고 그곳에다가 자신의 생각을 유리한대로 해석한다면
이미 역사적 사실 - 즉 진실을 그 순간 모두 잃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참된 진실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그로 인하여 육체적,
인격적. 파멸을 당했을 지라도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저항(반역)하지 않았으며 死後에야
안타깝게도이미 백성은 다 알고 있었던 충철을 늦게서야 국왕과 조정 권신들이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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