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역사12.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국가들의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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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12.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국가들의 근대화
1) 와하브 운동
오스만제국은 18세기에 들어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직면했다. 이러한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고, 거의 모두가 서구의 부추김과 지원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제국 내 오스만 파샤(장군, 총독)들의 배반과 반란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예가 무함마드 알리 파샤였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로 출병하여 수단을 정복하는 한편, 이집트의 근대화를 위해 나일 강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 후 이스마일의 통치기에는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고, 산업. 교통. 교육의 혁신을 가져 왔다. 그러나 지나친 재정지출은 경제를 파탄시켜 수에즈 운하의 실권이 영국으로 이관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1882년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파샤들은 대부분 아랍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아랍인이 아닌 발칸반도나 카프카스 지방 출신으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 장군들이었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통치자가 지역 자치를 얻으려 했던 대표적인 곳은 아라비아 반도, 특히 오스만과 이란, 그리고 점증하는 영국 세력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걸프지역이다. 18세기 후반부터 부족장과 지방 토후들은 이러한 경쟁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상당한 자치를 확보하였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쿠웨이트 공국 이었다. 성채라는 의미를 가진 인도어의 아랍어 축소형인 쿠웨이트에는 1756년 사바흐(Sabah) 라는 지배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오스만제국의 정통성에 도전한 유일한 아랍 운동은 와하브 운동(Wahhabism)이었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나즈드 지방의 신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1703~1787)였다. 그는 순수하고 정통적인 예언자 시대의 이슬람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미신, 거짓신앙, 사악한 의례 등과 같이 이슬람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오염시키고 왜곡시키는 요소들과 그것을 조장하고 장려하는 정권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하였다. 압둘 와하브의 추종자 중에는 후일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 나즈드 지방의 다리야 지역 아미르(토후)였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도 있었다. 18세기 중엽부터 탁월한 군사적인 능력을 가진 이븐 사우드가 와하브 운동에 고무되어 아라비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한 때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게를 위협하였다. 오스만 군대는 반란을 일으키는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유럽 열강을 격퇴하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1806년에서 1878년 사이에 러시아는 오스만제국과 4차례의 전쟁을 벌였는데, 4전쟁 모두 오스만의 중요한 영토 손실로 끝났다. 만약 서구가 개입하여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의 일부를 단념하지 않았다면, 오스만제국의 패배는 훨씬 더 참혹했을 것이다.
결국 와하브 운동은 오스만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우드 가문의 호응을 받아 와하브 왕국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와하브 운동은 아랍인의 각성을 촉구하여 후일 아랍 여러나라의 독립에 정신적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탄생에 정신적 지주와 종교적 바탕이 되었다.
2) 이란의 카자르조
16세기 초 이란에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Safawi)왕조가 세워져 페르시아어를 바탕으로 이란의 전통문화 회복에 기여하였다. 사파비 왕조는 압바스 왕 때 전성기를 맞아, 오스만제국의 여러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문화와 경제 분야에서도 수준 높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당시 수도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이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건축물과 우아한 장식물로 아름답게 꾸며져 오늘날까지 그 모습이 남아 잇다. 사파비 왕조가 주변 민족들의 침입으로 약화된 후, 이란 지방은 18세기 말 카자르 왕조에 의해 재통일 되었다.
카자르 왕조는 한때 아프가니스탄까지 그 영역을 넓혀 번영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는 열강의 간섭과 침략이 가속화 되었다. 따라서 이란의 근대화 과정도 유럽 열강에 대항하는 항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1890년에는 담배 전매권이 영국인의 수중으로 넘어가자, 담배 보이콧 운동이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으나, 결국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카프카스 지방을 점령하고 남과 북에 각각 자국의 세력권을 형성했다. 이에 자극받은 국왕 알딘 샤는 1906년 헌법 제정과 의회 성립을 통한 입헌혁명을 이룩하고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제국주의 유럽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높아 효과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러한 저항은 1911년 러시아의 무력간섭으로 좌절되고 입헌혁명 운동은 끝이 났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이란도 많은 부분에서 오스만과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1세기 이상 이란의 역사는 러시아와 영국이라는 열강의 경쟁에 의해 좌우 되었다. 러시아의 정복으로 카스피해의 동서쪽에서 이란은 러시아와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아가 영국의 인도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로 이란은 영국과 동남쪽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영향력은 그 경계를 넘어 확산되었다.
다만 이란에게는 오스만제국과는 달리 소수민족 문제라는 골칫거리가 덜 심각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방을 러시아에 뺏긴 후에는 이란의 소수 집단은 규모가 작아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란의 소수민족 집단들은 이란 정부에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국가에 편입되거나 국가 건설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란에게 상당한 이점이 되었다.
이란의 카자르조 샤(왕)가 채택한 개혁정책은 오스만 술탄의 정책과 비슷하였고, 어떤 점에서는 모델로 삼았다. 군의 현대화와 중앙화, 행정과 교육의 현대화, 특히 통신과 같은 현대적 사회간접시설의 구축, 최소로 필요한 만큼의 서구 기술과 방식의 도입과 채택, 이와 함께 경쟁적인 유럽 열강을 상호 견제하게 함으로써 자국의 독립을 보존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군대와 민간부문에 대한 개혁은 철저하지 못했고, 중앙집권화 조치는 지역적이고 부족적인 특수성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1905년에는 비단 이란 뿐만아니라 역내 전체에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유럽 열강이 아시아 국가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 패배는 러시아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다 주어, 1905년 10월 최초로 국민대표제와 의회정부 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영향은 이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란의 헌법혁명은 1905.12월에 시작되어, 최초의 국민의회인 마즐리스가 1906.10월 테헤란에서 소집되었다. 그리고 샤가 서명한 헌법을 입안하였다.
한편 국제정세는 급격히 변화하여 이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1907년 8월 러시아와 영국은 협정을 체결하여 이란을 사실상 분할하였다. 북쪽은 러시아 영향권에, 걸프해 주변의 남쪽은 영국의 영향권에, 그리고 중앙벨트는 양국의 중간지대로 비워 두었다.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북부 이란에 대한 러시아의 침투와 정복은 이미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아리비아 지역에서는 영국이 키프로스에 이어 이집트를 점령하고 1809년에는 바레인과 쿠웨이트를 세력권에 넣자,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스도 튀니지, 소말리아, 모로코를 연달아 침략하였다. 이와 같은 열강의 지배에 맞서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이슬람교의 부흥, 아랍 민족주의, 서양문물의 도입 등을 통해 근대화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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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벌써 어떤 분들은 '특정인 한 사람만을 위한 곳이냐?'고 볼멘 얘기가 나오는 분위기 입니다.
기존의 글쓰는 공간이 '문학하는 이들 중심'이 되지 않나 생각되어 다른 판을 벌려 놓으면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달라진것이 없으면, 홈위원들의 간절한 시도가 무의미해 짐은 당연 합니다.
'메아리 없는 웨침이 안되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번 불러 봅니다. 전,현직 공직자님! 교육자님! 전 회장님! 환고향으로 성공하신 님! 실업 현장에서 꿈을 이루신 님! 모두 모두 이 사랑방의 광장으로 납시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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