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카츄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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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멀리서 이 홈을 사랑해 주시는 황을님 사모께 감사 드립니다. 가끔 6000가정 홈피에서도 그 이름을 본 기억이 납니다만, 종종 들리시어 좋은 말씀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항의 용광로 이무환 목사님의 식지 아니한 정열은 정말 대단 하십니다. 그 바쁘신 와중에도 쉼터를 개근하시니 놀랍고 감사한 일 입니다. 목사님과는 '가섭의 미소'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생각 납니다.
[염화시중의 미소]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도 연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죠. 또한 선가(禪家)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묘법(妙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설법은 하시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제자 중에 가섭 존자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禪宗)에서는 세곳에서 마음 전한 이치(三處傳心)라하여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 된 것은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보살(菩薩)은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생사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연실.蓮實)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과(因果)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중생들은 이 인과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온갖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포항의 용광로 이무환 목사님의 식지 아니한 정열은 정말 대단 하십니다. 그 바쁘신 와중에도 쉼터를 개근하시니 놀랍고 감사한 일 입니다. 목사님과는 '가섭의 미소'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생각 납니다.
[염화시중의 미소]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도 연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죠. 또한 선가(禪家)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묘법(妙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설법은 하시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제자 중에 가섭 존자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禪宗)에서는 세곳에서 마음 전한 이치(三處傳心)라하여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 된 것은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보살(菩薩)은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생사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연실.蓮實)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과(因果)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중생들은 이 인과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온갖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정해관님의 댓글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절도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는 까츄샤를 만난다. 그녀는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까츄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을 쫓겨나 타락하여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 까츄샤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하여 깊은 의혹을 품게 되고, 동시에 남의 노역으로 포식하게 되는 토지사유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까츄샤의 감형운동을 위하여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에 그는 도움을 바라는 무고한 죄인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냉혹한 불합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일신상의 정리를 위해서 자기 영지에 내려가서 농촌의 궁핍을 눈앞에 보게 되고 또 뻬쩨르부르그에 가서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귀족 사회의 경박함과 부패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재판소에서의 인상이 사회 비판과 현대 문명에 대한 규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서 제 1 부에서는 재판소와 감옥을 중심으로서 한 사법 형벌의 세계가 다루어지고, 제 2부에서는 자기 영지의 농민과 빼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묘사와 죄인호송대의 출발 전후의 사건이 다루어지고, 제3부에서는 시베리아의 죄인호송 여행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네흘류도프라는 한 귀족이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시베리아의 황막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작자 자신이 한번도 시베리아의 황야나 감옥을 구경한 일이 없으면서도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한 죄인들의 생활, 시몬손을 비롯한 남녀 혁명가들의 생활은 당시의 사회를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뻔뻔스럽도록 양심이 마비돼 버린 재판관, 오만불손한 부패한 관리, 호화찬란한 껍데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속은 텅텅 비어 있는 상류사회 귀족들이 경멸적으로 그려진 모습은 이 나라에 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제정 말기 압제정치의 옹호자였던 포베노스쩨프가 문교대신 또뽀로프의 가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참 정신을 망각하고 껍데기 의식에만 집착하여 정부의 추악한 주구에 지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공허함이 여지없이 풍자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부활》은 제정 러시아의 부정인 동시에 새로운 러시아의 예언이라고 하겠다. 제정 러시아의 사회생활이 비판되고 해부되어 있을뿐더러, 그 불완전한 사회제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국민의 이상과 고통과 앙심이 〈세계의 양심〉인 작가의 양심을 통해서 《부활》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 문학의 2대 지주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가리켜, 전자를 지식계급의 대표작가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는 러시아 정신의 표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전자가 러시아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랑으로 속죄하려고 했다면, 후자는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토지문제에 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그 자신이 큰 영지를 가진 대지주였으며, 국민의 대부분이 농사에 매달려 사는 러시아의 형편으로서 그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를 쌓은 그는, 《부활》에서 스펜서의 〈사회평형론>을 읽고 감명을 받은 네흘류도프가 대학 졸업논문을 〈토지사유론〉이란 제목으로 쓰고, 또 자기 자신의 사상을 실증하기 위해서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준다는 이야기를 넣어 의의를 부여했던 것이다.
원래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네흘류도프와 까츄샤를 결혼시켜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면서 중요한 국가개혁안을 기안하여 황제에게 진언하는 형식으로 그의 의견을 직접 소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 기초안이란 《헨리 조지론》에 입각하여 토지를 국유로 하고 조세를 단일제로 한다는 개혁서였다, 결국 이러한 계획은 피했지만 아무튼 톨스토이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당시의 잔인한 러시아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모든 권력과 전제에 대한 매서운 통매를 가하는 톨스토이의 이러한 불온사상에 대해서 당국에서는 그냥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부활》은 주간잡지 《니바》에 연재되고 있을 때부터 벌써 수많은 삭제가 가해졌다. 이 때문에 《부활》의 완본이 러시아 안에서 간행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간행되어 러시아에 밀수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차없는 교회에 대한 비판은 종교성의 기피하는 바가 되어 작자 톨스토이에게 정교회 파문선고(1910년)를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가 교회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어떠한 권력도 그를 신으로부터 파문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성명으로 응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 자신은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온갖 행위를 다 금했었다. 그리고 사제들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는 그러한 장황한 말과 모독적인 요술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딴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했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금하고 누구나 혼자서 기도하기를 가르쳤고, 교회 자체를 금했을뿐더러, 자기는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며, 교회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진리 속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이같이 교회의 일체의 권위를 부정했다. 교회의 의식, 기만에 찬 미사, 교회 안에서의 우상숭배 등 교회 자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에 어긋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위선과 부정과 불평등을 기조로 한 사회가 강압과 허위에 의해서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부활》에서 강조하고 있다.
한편 톨스토이 자신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한 후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고 믿는 것일 뿐,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런 사상은 《부활》의 에필로그 속에 선명하게 피력되어 있다. 그는 산상의 설교 속에 모든 본질적인 도덕률이 있다고 믿고, 만일 인간이 불화와 위선과 폭력을 버리고 자유로운 협조와 형제애를 소중히 여기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이 지상에서도 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 중에서 이 해답을 찾았고, '어떠한 악이라도 거기에 항거하지 말라'는 설교를 지상명령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무저항주의〉와 〈무교회주의〉는 러시아 정신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전세계에 새로운 사상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무저항을 설교하면서도 자기의 세계가 공격당할 때는 성난 사자와 같았다. 그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당시의 제도, 도덕, 생활양식을 비판했다. 바로 여기에 톨스토이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 거부의 효력은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호소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모든 점에서 완전무결하게 자기의 무저항주의에 철저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인간, 성자 아닌 거룩한 인간 속에서 우리는 가장 다정한 벗으로서의 인간 톨스토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자기가 사상과 감정의 일면을 대표시키는 인물로서 기꺼이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의 초기의 작품 《지주의 아침》(1856년)이나 《청년시절》(1857년)에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라는 인물을 보아왔다. 이것은 이미 작자 자신의 주관적 자서전적 인물의 하나로 톨스토이 정신생활의 어느 한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부활》이라는 위대한 예술적 경험을 종합함에 있어서, 또다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새로이 등장시켜 1890년대의 자신의 사상을 대표시키고 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지적 방종이나 정신적인 방황이 거의 없으며, 정신의 균형과 합리성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네흘류도프의 특이성은 《부활》에서 보듯이 도덕적 경험의 통제에 꽤 적응되어 있다. 또한 네흘류도프에게는 《청년시절》의 주인공 이르쩨니예프가 《까자흐 사람들》(1863년)의 주인공 올레닌이나 《안나 까레니나》(1877년)의 등장인물 레빈이 겪는 정신적 혼란도 소요도 없다. 네흘류도프의 내면세계는 투명하게 곧잘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다.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에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자아가 있었다. 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는 자아만을 찾는 정신적인 자아였다. 또 하나는 자기 행복만을 찾고 이를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도 희생시키려는 동물적 자아였다." (제1부제14장) 그러나 최초의 몇 장을 읽게 되면,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의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한 것은 극히 일시적이었음을 대뜸 알게 된다. 많은 관계에 있어서 규범적 현상이기나 한 것처럼 보이는 동물적 자아는 네흘류도프로서는 변태적 현상이며, 그의 본성의 악신이며, 이기주의적인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네흘류도프는 본래"도덕적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은 고상한 정신적 기쁨을 가져오게 한다."(제1부 제12장)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이 정신적 자아의 동물적 자아에 대한 승리, 이를테면 그의 갱생, 즉 "부활이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힘차게 그의 눈뜬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렇다, 까츄샤를 만나서 사과하자. 그렇다. 어린애가 하듯이 빌자."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가르쳐주소서.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소서!"(제1부 제28장).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그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정신적 존재에 대한 각성이기 때문에 선의 눈물인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바로 그의 《인생론》(1887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과 예술
그의 인생이란 선에 대한 희구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선이 인생의 목적이며, 사람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이 각자가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성 ― 신의 활동인 사랑을 통하여 선이라는 목적을 향하는 노력, 이것을 톨스토이는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문제에서 출발하여 그는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인생의 의의를 그릇되게 해석시키는 허위의 과학과 사이비 종교를 비난하면서, 개인적인 행복과 참된 행복과의 차이를 논한다, 또 동물적인 생존과 합리적인 생활과의 차이를 밝히고, 결국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루소 이후 그의 도덕적 저술로써 인간 양심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우리들의 개인적 생활(이기적 생활), 동물적 생활 속에서도 이성에 의해서 살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인간생활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의 특색은 그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상이 바로 실행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의 활동이므로, 현재의 활동에 있어서 사랑을 표시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생활을 무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그러한 불합리를 그는 싫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행복론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며, 남을 위해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자기 행복만 생각하고 살면 그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 즉 이성의 활동인 사랑을 가지고 일반 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며 그 가운데 올바른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부활》에서는 자비로 나타난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여행 중에 느끼게 된 사랑은 오직 자비심의 발로였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자비인 것이다. 온갖 생활의 체험을 지닌 네흘류도프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악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네흘류도프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과 제18장에서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제3부 28장).
"사람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항상 모든 사람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만 한다." 는 이 한 가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는 이 생각의 확증을 얻기 위하여 산상의 설교를 읽는다. 이 설교는 지극히 간단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이며 만일 이대로 실행만 한다면 폭학도 없어지고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즉 지상천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볼 때, 톨스토이의 사실적이면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듯한 묘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까츄샤의 나이브한 첫사랑의 장면, 네흘류도프가 꺄츄샤를 유혹하는 안개 낀 부활제의 밤, 캬츄샤가 네흘류도프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비바람 치던 심야의 정거장, 변기에 앉아 있는 여죄수들의 모습, 감옥 안에서 진행되는 허식적인 종교의식, 죄인면회소의 광경, 영지에서 목격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 시베리아 감옥에서의 정치범들과 일반죄인들의 심리조사 등에 능란했던 톨스토이는 그의 주인공은 물론 한번 등장했다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사소한 인물들, 예를 들어 재판관, 배심원, 시골의 촌장, 전옥의 딸 등과 같은 사소한 인물에까지도 각자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부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 육체의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어서 심리적인 뉘앙스를 그에 대응하는 육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활》에서 까츄샤의 육체적인 외견이 그녀의 도덕적인 정신 상태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여러 번 묘사되고 있다. 즉 매력적인 까만 사팔눈이 반짝이는 귀엽고 순진한 둥근 얼굴은, 한때 살이 찌고 들떠서 매춘부의 음탕한 추파를 던지지만, 이윽고 시베리아 유형 길에서 도덕적인 갱생의 힘이 작용하게 되자. 또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의 활기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가장 뛰어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형이하적인 특질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또 달리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호소하고 매혹시켰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러시아 문학에 있어서 톨스토이만큼 철저한 사실주의자는 없었고 또 그만큼 구체성과 이 세상의 생존의 색조에 애착을 가진 작가도 드물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소설에 그토록 발랄한 생명감을 부여해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톨스토이 예술의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그의 작품의 자서전적인 요소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주로 묘사하면서 자기의 사상과 불안을 표현했지만,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과 그의 생활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을 주로 묘사했다. 그의 초기 3부작 《유년시대》(1852년) 《12월의 세바스또뽈리》(1855년)에서 톨스토이는 자기를 니콜렌까라는 이름으로 묘사했고, 《까자흐 사람들》에서는 올레닌으로, 《전쟁과 평화》에서는 삐에르로, 그리고 마지막 작품 《부활》에서는 네흘류도프로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의 묘사는 흔히 객관적인 실재성을 결여할 우려가 많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완숙한 이 작품도 몇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결함은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객관적인 실재성을 구비하지 못한 점이다, 이런 결함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쟁과 평화》의 삐에르, 《안나까레니나》의 레빈보다 네흘류도프는 특히 모순이 많다. 그 까닭은 앞의 두 작품의 주인공의 나이는 집필한 당시의 톨스토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데 비하여 70세의 노인이 35세의 네흘류도프를 쓰자니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결함은, 로망 롤랑이 지적했듯이 엄밀한 사실적 관찰이 주가 된 제3부에 쓸데없는 복음서적인 결론이 너절하게 나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발표 당시에도 독자들의 그 같은 불만이 컸던 것으로, 이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나 같은 노인이 그처럼 긴 세월을 보내고 작품을 쓸 때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복음서 구절을 한번 회상케 하려는 생각이 어찌 안 들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활》에서는 작가의 서정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부활》은 인간에 대한 고민의 가장 아름다운 시이다. 그래서 로망 롤랑은 "모든 작품 중 나는 이 작품 속에서 톨스토이의 가장 맑고, 바로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날카롭고 엷은 회색의 눈동자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신을 보는 눈길을 느낀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며 종교가였던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세계문학사상 불굴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항시 인생에 대하여 절박한 고민을 체험하고 그 사상을 실현하느라고 애쓴 작가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난민구제의 방면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러시아의 크나큰 죄악에 대해서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절도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는 까츄샤를 만난다. 그녀는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까츄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을 쫓겨나 타락하여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 까츄샤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하여 깊은 의혹을 품게 되고, 동시에 남의 노역으로 포식하게 되는 토지사유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까츄샤의 감형운동을 위하여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에 그는 도움을 바라는 무고한 죄인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냉혹한 불합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일신상의 정리를 위해서 자기 영지에 내려가서 농촌의 궁핍을 눈앞에 보게 되고 또 뻬쩨르부르그에 가서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귀족 사회의 경박함과 부패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재판소에서의 인상이 사회 비판과 현대 문명에 대한 규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서 제 1 부에서는 재판소와 감옥을 중심으로서 한 사법 형벌의 세계가 다루어지고, 제 2부에서는 자기 영지의 농민과 빼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묘사와 죄인호송대의 출발 전후의 사건이 다루어지고, 제3부에서는 시베리아의 죄인호송 여행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네흘류도프라는 한 귀족이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시베리아의 황막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작자 자신이 한번도 시베리아의 황야나 감옥을 구경한 일이 없으면서도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한 죄인들의 생활, 시몬손을 비롯한 남녀 혁명가들의 생활은 당시의 사회를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뻔뻔스럽도록 양심이 마비돼 버린 재판관, 오만불손한 부패한 관리, 호화찬란한 껍데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속은 텅텅 비어 있는 상류사회 귀족들이 경멸적으로 그려진 모습은 이 나라에 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제정 말기 압제정치의 옹호자였던 포베노스쩨프가 문교대신 또뽀로프의 가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참 정신을 망각하고 껍데기 의식에만 집착하여 정부의 추악한 주구에 지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공허함이 여지없이 풍자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부활》은 제정 러시아의 부정인 동시에 새로운 러시아의 예언이라고 하겠다. 제정 러시아의 사회생활이 비판되고 해부되어 있을뿐더러, 그 불완전한 사회제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국민의 이상과 고통과 앙심이 〈세계의 양심〉인 작가의 양심을 통해서 《부활》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 문학의 2대 지주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가리켜, 전자를 지식계급의 대표작가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는 러시아 정신의 표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전자가 러시아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랑으로 속죄하려고 했다면, 후자는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토지문제에 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그 자신이 큰 영지를 가진 대지주였으며, 국민의 대부분이 농사에 매달려 사는 러시아의 형편으로서 그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를 쌓은 그는, 《부활》에서 스펜서의 〈사회평형론>을 읽고 감명을 받은 네흘류도프가 대학 졸업논문을 〈토지사유론〉이란 제목으로 쓰고, 또 자기 자신의 사상을 실증하기 위해서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준다는 이야기를 넣어 의의를 부여했던 것이다.
원래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네흘류도프와 까츄샤를 결혼시켜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면서 중요한 국가개혁안을 기안하여 황제에게 진언하는 형식으로 그의 의견을 직접 소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 기초안이란 《헨리 조지론》에 입각하여 토지를 국유로 하고 조세를 단일제로 한다는 개혁서였다, 결국 이러한 계획은 피했지만 아무튼 톨스토이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당시의 잔인한 러시아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모든 권력과 전제에 대한 매서운 통매를 가하는 톨스토이의 이러한 불온사상에 대해서 당국에서는 그냥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부활》은 주간잡지 《니바》에 연재되고 있을 때부터 벌써 수많은 삭제가 가해졌다. 이 때문에 《부활》의 완본이 러시아 안에서 간행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간행되어 러시아에 밀수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차없는 교회에 대한 비판은 종교성의 기피하는 바가 되어 작자 톨스토이에게 정교회 파문선고(1910년)를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가 교회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어떠한 권력도 그를 신으로부터 파문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성명으로 응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 자신은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온갖 행위를 다 금했었다. 그리고 사제들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는 그러한 장황한 말과 모독적인 요술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딴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했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금하고 누구나 혼자서 기도하기를 가르쳤고, 교회 자체를 금했을뿐더러, 자기는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며, 교회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진리 속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이같이 교회의 일체의 권위를 부정했다. 교회의 의식, 기만에 찬 미사, 교회 안에서의 우상숭배 등 교회 자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에 어긋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위선과 부정과 불평등을 기조로 한 사회가 강압과 허위에 의해서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부활》에서 강조하고 있다.
한편 톨스토이 자신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한 후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고 믿는 것일 뿐,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런 사상은 《부활》의 에필로그 속에 선명하게 피력되어 있다. 그는 산상의 설교 속에 모든 본질적인 도덕률이 있다고 믿고, 만일 인간이 불화와 위선과 폭력을 버리고 자유로운 협조와 형제애를 소중히 여기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이 지상에서도 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 중에서 이 해답을 찾았고, '어떠한 악이라도 거기에 항거하지 말라'는 설교를 지상명령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무저항주의〉와 〈무교회주의〉는 러시아 정신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전세계에 새로운 사상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무저항을 설교하면서도 자기의 세계가 공격당할 때는 성난 사자와 같았다. 그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당시의 제도, 도덕, 생활양식을 비판했다. 바로 여기에 톨스토이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 거부의 효력은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호소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모든 점에서 완전무결하게 자기의 무저항주의에 철저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인간, 성자 아닌 거룩한 인간 속에서 우리는 가장 다정한 벗으로서의 인간 톨스토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자기가 사상과 감정의 일면을 대표시키는 인물로서 기꺼이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의 초기의 작품 《지주의 아침》(1856년)이나 《청년시절》(1857년)에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라는 인물을 보아왔다. 이것은 이미 작자 자신의 주관적 자서전적 인물의 하나로 톨스토이 정신생활의 어느 한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부활》이라는 위대한 예술적 경험을 종합함에 있어서, 또다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새로이 등장시켜 1890년대의 자신의 사상을 대표시키고 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지적 방종이나 정신적인 방황이 거의 없으며, 정신의 균형과 합리성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네흘류도프의 특이성은 《부활》에서 보듯이 도덕적 경험의 통제에 꽤 적응되어 있다. 또한 네흘류도프에게는 《청년시절》의 주인공 이르쩨니예프가 《까자흐 사람들》(1863년)의 주인공 올레닌이나 《안나 까레니나》(1877년)의 등장인물 레빈이 겪는 정신적 혼란도 소요도 없다. 네흘류도프의 내면세계는 투명하게 곧잘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다.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에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자아가 있었다. 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는 자아만을 찾는 정신적인 자아였다. 또 하나는 자기 행복만을 찾고 이를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도 희생시키려는 동물적 자아였다." (제1부제14장) 그러나 최초의 몇 장을 읽게 되면,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의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한 것은 극히 일시적이었음을 대뜸 알게 된다. 많은 관계에 있어서 규범적 현상이기나 한 것처럼 보이는 동물적 자아는 네흘류도프로서는 변태적 현상이며, 그의 본성의 악신이며, 이기주의적인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네흘류도프는 본래"도덕적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은 고상한 정신적 기쁨을 가져오게 한다."(제1부 제12장)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이 정신적 자아의 동물적 자아에 대한 승리, 이를테면 그의 갱생, 즉 "부활이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힘차게 그의 눈뜬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렇다, 까츄샤를 만나서 사과하자. 그렇다. 어린애가 하듯이 빌자."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가르쳐주소서.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소서!"(제1부 제28장).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그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정신적 존재에 대한 각성이기 때문에 선의 눈물인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바로 그의 《인생론》(1887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과 예술
그의 인생이란 선에 대한 희구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선이 인생의 목적이며, 사람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이 각자가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성 ― 신의 활동인 사랑을 통하여 선이라는 목적을 향하는 노력, 이것을 톨스토이는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문제에서 출발하여 그는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인생의 의의를 그릇되게 해석시키는 허위의 과학과 사이비 종교를 비난하면서, 개인적인 행복과 참된 행복과의 차이를 논한다, 또 동물적인 생존과 합리적인 생활과의 차이를 밝히고, 결국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루소 이후 그의 도덕적 저술로써 인간 양심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우리들의 개인적 생활(이기적 생활), 동물적 생활 속에서도 이성에 의해서 살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인간생활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의 특색은 그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상이 바로 실행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의 활동이므로, 현재의 활동에 있어서 사랑을 표시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생활을 무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그러한 불합리를 그는 싫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행복론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며, 남을 위해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자기 행복만 생각하고 살면 그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 즉 이성의 활동인 사랑을 가지고 일반 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며 그 가운데 올바른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부활》에서는 자비로 나타난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여행 중에 느끼게 된 사랑은 오직 자비심의 발로였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자비인 것이다. 온갖 생활의 체험을 지닌 네흘류도프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악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네흘류도프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과 제18장에서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제3부 28장).
"사람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항상 모든 사람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만 한다." 는 이 한 가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는 이 생각의 확증을 얻기 위하여 산상의 설교를 읽는다. 이 설교는 지극히 간단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이며 만일 이대로 실행만 한다면 폭학도 없어지고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즉 지상천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볼 때, 톨스토이의 사실적이면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듯한 묘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까츄샤의 나이브한 첫사랑의 장면, 네흘류도프가 꺄츄샤를 유혹하는 안개 낀 부활제의 밤, 캬츄샤가 네흘류도프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비바람 치던 심야의 정거장, 변기에 앉아 있는 여죄수들의 모습, 감옥 안에서 진행되는 허식적인 종교의식, 죄인면회소의 광경, 영지에서 목격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 시베리아 감옥에서의 정치범들과 일반죄인들의 심리조사 등에 능란했던 톨스토이는 그의 주인공은 물론 한번 등장했다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사소한 인물들, 예를 들어 재판관, 배심원, 시골의 촌장, 전옥의 딸 등과 같은 사소한 인물에까지도 각자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부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 육체의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어서 심리적인 뉘앙스를 그에 대응하는 육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활》에서 까츄샤의 육체적인 외견이 그녀의 도덕적인 정신 상태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여러 번 묘사되고 있다. 즉 매력적인 까만 사팔눈이 반짝이는 귀엽고 순진한 둥근 얼굴은, 한때 살이 찌고 들떠서 매춘부의 음탕한 추파를 던지지만, 이윽고 시베리아 유형 길에서 도덕적인 갱생의 힘이 작용하게 되자. 또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의 활기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가장 뛰어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형이하적인 특질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또 달리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호소하고 매혹시켰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러시아 문학에 있어서 톨스토이만큼 철저한 사실주의자는 없었고 또 그만큼 구체성과 이 세상의 생존의 색조에 애착을 가진 작가도 드물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소설에 그토록 발랄한 생명감을 부여해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톨스토이 예술의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그의 작품의 자서전적인 요소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주로 묘사하면서 자기의 사상과 불안을 표현했지만,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과 그의 생활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을 주로 묘사했다. 그의 초기 3부작 《유년시대》(1852년) 《12월의 세바스또뽈리》(1855년)에서 톨스토이는 자기를 니콜렌까라는 이름으로 묘사했고, 《까자흐 사람들》에서는 올레닌으로, 《전쟁과 평화》에서는 삐에르로, 그리고 마지막 작품 《부활》에서는 네흘류도프로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의 묘사는 흔히 객관적인 실재성을 결여할 우려가 많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완숙한 이 작품도 몇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결함은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객관적인 실재성을 구비하지 못한 점이다, 이런 결함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쟁과 평화》의 삐에르, 《안나까레니나》의 레빈보다 네흘류도프는 특히 모순이 많다. 그 까닭은 앞의 두 작품의 주인공의 나이는 집필한 당시의 톨스토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데 비하여 70세의 노인이 35세의 네흘류도프를 쓰자니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결함은, 로망 롤랑이 지적했듯이 엄밀한 사실적 관찰이 주가 된 제3부에 쓸데없는 복음서적인 결론이 너절하게 나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발표 당시에도 독자들의 그 같은 불만이 컸던 것으로, 이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나 같은 노인이 그처럼 긴 세월을 보내고 작품을 쓸 때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복음서 구절을 한번 회상케 하려는 생각이 어찌 안 들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활》에서는 작가의 서정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부활》은 인간에 대한 고민의 가장 아름다운 시이다. 그래서 로망 롤랑은 "모든 작품 중 나는 이 작품 속에서 톨스토이의 가장 맑고, 바로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날카롭고 엷은 회색의 눈동자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신을 보는 눈길을 느낀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며 종교가였던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세계문학사상 불굴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항시 인생에 대하여 절박한 고민을 체험하고 그 사상을 실현하느라고 애쓴 작가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난민구제의 방면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러시아의 크나큰 죄악에 대해서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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