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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7대불가사의5. 로마 콜로세움 (Colos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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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7대불가사의5. 로마 콜로세움 (Colosseum)



   황제들의 정치무대 콜로세움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집트인들아, 피라미드를 자랑하지 말거라. 아시리아인들아, 바빌론를 입에 담지 말라. 황제의 새 원형경기장 앞에서 그것들이 설 자리는 없으니 모든 명성은 이를 위한 것. 모두가 이 그림자에 가려지리라.”

시인이 비길 데 없이 위대하다고 일컬은 황제 원형 경기장! 바로 콜로세움입니다.

콜로세움은 위대한 로마문명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지금 현재 남아있는 콜로세움은 원형의 약 1/3규모입니다. 그러나 당대 이 건물들은 명실상부 로마최고 최대를 자랑하는 원형극장형 경기장이었으며 또한 이곳은 황제들의 놀라운 정치무대이기도 했습니다.

모의해전은 원래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던 행사로 강이나 호수에서 병사들이 패전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범죄자나 노예들을 배에 태우게 되었고 한 편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구경거리로 전락했습니다.

경기장에 맹수를 풀어놓고 사람과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죽은 후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가죽은 시민에게 선물 되었고, 고기는 이후 진행될 맹수 사냥을 위해 우리에 갇혀있던 맹수들에게 먹이로 주어졌습니다. 콜로세움의 경기에 쓰인 동물들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성을 띠었습니다. 이 경기는 문화적 차원의 기능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동물들을 정복함으로써 로마가 정복한 도시들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로마가 더 멀리 진출할수록 더 이국적인 동물들을 데려왔고, 이는 로마의 힘을 과시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던 거죠. 맹수사냥으로 매일 죽어나가는 동물의 수만 매년 5천 마리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이 엄청난 규모의 축제가 무려 백일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티투스황제는 무엇 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축제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서기 69, 티투스황제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황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새로운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주어진 과제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로마를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황제로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평민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로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선 폭군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네로황제와 자신을 분명히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그 때 베스파시아누스가 내놓은 가장 큰 선물이 콜로세움 건설입니다. 어떤 공공시설보다 검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재건하는 것이 민심을 얻는 데는 제일이었기 때문에 역대 로마의 황제들은 곳곳의 도시에 경기장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로마최고의 인기스포츠였던 검투가 아주 특별한 무엇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황제의 경기장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건축물이기를 바라며 바로 이 콜로세움을 세움으로써 시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 로마인들의 공공오락을 위한 핵심적인 구조물이 건축되고 있으며 이는 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설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경기장은 왜 시가에 위치했을까

사실 그곳은 원래 시가 중심부에 위치한 네로황제의 궁전자리였습니다. 바다처럼 보이는 인공호수와 150개의 방을 거느린 초대형의 호화궁전인 황금궁전으로 불리던 그 곳은 오로지 네로 개인만을 위한 궁전이었습니다.

네로 개인의 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시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을 지음으로서 시민들의 마음을 사고자 한 것이 베스파시아누스가 택한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콜로세움이 다른 경기장들과 달리 로마시가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된 이유입니다.



콜로세움 건축, 자세히 알아보기

당시 콜로세움건설은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두 개의 원형극장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이런 형태의 경기장은 처음인데다 거대규모를 건축해야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52미터에 달하는 높이였는데 이 높이는 오늘날 아파트 17층이나 18층과 맞먹는 엄청난 높이였습니다. 당시 돌로 지은 건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구조적 발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치의 발견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의 건축은 아치들의 교향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겹겹의 아치들이 마치 벌집의 구조처럼 되어있습니다. 아치의 체계적인 사용이 콜로세움을 가벼우면서도 거대하고 강한 구조물로 만들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모든 벽은 기둥과 아치로 만들어진 가벼운 벽으로 대체되었으며 기둥 사이의 공간과 아치로 만든 거대한 창문이 구조적 강도를 유지한 채 많은 하중을 줄여준 것입니다.

콜로세움 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오늘날 현대건축에서 흔히 쓰이는 것과 같은 건축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벽돌과 콘크리트의 흔적인데요, 시멘텅은 석회와 물에다 특별한 재료를 섞은 것인데 그 특별한 재료가 바로 화산재였습니다. 나폴리 베수비오 화산 근처 포추올리에서 발견된 이 잿가루는 모든 돌과 벽돌 사이에 강한 접착을 만들어내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벽돌을 쌓아 두 개의 마주 보는 얇은 벽을 만든 후, 그 사이에 포촐라나 시멘트와 자갈로 만든 콘크리트를 부어 튼튼한 벽을 만들었습니다. 보다 가볍고 견고한 건축재의 발명과 활용, 이것이 로마건축의 혁명을 가져왔고 콜로세움 건축을 가능하게 한 열쇠였던 거죠.

콜로세움 건축현장에는 도르래를 이용한 기중기가 동원되었습니다. 무거운 건축대를 위층의 작업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기중기가 필수였죠. 콜로세움은 최첨단 건축재와 건축기술의 전시장 같았습니다. 당대 로마인들이 고안해낸 최신기계장치, 기중기도 그 하나였습니다.

콜로세움의 외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됐고 각 층을 지탱하는 기둥들은 각각 다른 그리스양식이 채택되었습니다. 1층은 간소하고 중후한 도리아식 2층은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이오니아식, 3층은 화려한 코리트식 이었습니다.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가 채워지고 5만 여명이 앉을 수 있는 계단식 관중석은 대리석으로 완비되었습니다. 콜로세움의 맨 위층에는 나무기둥을 달아 벨라리움이라 불리는 개폐식 차양막을 설치해서 덕분에 햇볕이 뜨거운 날에도 관중석에 서늘하게 그늘을 드리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콜로세움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은 아치에 장식된 조각품인데요, 네로의 정원을 장식하고 있던 조각품들을 베스파시아누스가 공공의 것으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네로가 자신의 모습을 본 따 황금궁전 앞에 세웠던 거상은 없애지 않고 태양신으로 변조했습니다. 이 거상의 이름은 콜로서스에서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콜로세움을 통해 자신이 로마의 본질성을 회복시킨 황제로 기억되길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공사가 시작된 지 8년 마침내 드러난 콜로세움의 그 모습은 마르티 알리스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황제의 지도력아래 로마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했는데 개인의 쾌락이었던 이 공간은 이제 시민들의 기쁨이 되었다. ’

이 엄청난 건축물을 짓는데 필요한 재원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단서는 콜로세움 내에 있었습니다. 콜로세움 헌납비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전리품으로 새 원형경기장을 지었다. 콜로세움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한것은 바로전쟁이었다."

티투스가 마지막저항을 하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당시 티투스의 귀국길에는 수레가 끝이 없었다고 전할정도로 수레에 실려 온 수많은 전리품들이 콜로세움건설비용에 충당됐고 천만여명에 달하는 노예들은 현장노동력으로 투입됐습니다. 한마디로 콜로세움은 정복자의 경기장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자신의 완작인 콜로세움의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콜로세움의 개장은 티투스의 몫이 되었습니다. 콜로세움은 티투스에게도 중요한 정치무대였습니다. 새 황제는 아버지의 거대경기장에 버금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펼쳐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100일 축제, 100일간이나 계속되는 축제프로그램입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각석으로 된 콜로세움 입장권부터 받아야했습니다.

 

티투스의 콜로세움

입장권에는 경기장에 있는 76개의 출입구중 자신이 입장해야할 출입구 번호가 씌어 있어 그곳으로만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설계는 사람이 많이 몰려도 효율적인 입, 퇴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5만 여명의 관중이 30분이면 다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출입구마다 입장할 수 있는 좌석도 정해져 있었는데 귀족들은 맨 아랫단이 지정석이었으며 그 뒤는 기사들, 그 뒤는 평민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과 여자들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장 불편한 위쪽 좌석에 앉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돈을 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티투스는 시민들을 위한 배려도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황제의 입장경로와 황제의 자리는 경기장 어디에서나 잘 보이게끔 신중하게 설계 되었습니다. 황제가 로마사회의 정점임을 한눈에 드러내 보이는 위치로 민중들에게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대는 없었습니다.

경기장은 권력의 최정상인 황제가 민중의 소리를 직접 듣는 자리였습니다. 콜로세움은 그 규모나 구조에서 황제가 한눈에 관중을 보고 파악하는데 최적화된 공간이었고, 이런 공공오락시설은 황제와 시민이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콜로세움은 황제가 일반 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습니다. 5만에서 6만 명이 넘는 관중이 그들 앞에 펼쳐지는 경기를 관람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황제가 또한 관중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얻고, 그들과 소통할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곧 콜로세움은 단순한 오락시설일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장소이며, 황제가 그의 시민과 최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적인 장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민중의 소리를 듣는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티투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지도자로서 해야 할 역할과 시민과의 관계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그것이 시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중에 중단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경기장에서 어떤 사람이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고 황제가 그의 죽음을 묵인하더라도 관중이 마음에 안 들면 No 라고 외칠 수 있었고,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면 황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에 티투스황제는 로마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집정은 단 2년 만에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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